그 도시가 마음을 채워준 방식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은 흐린 날 아침이었다. 마치 레인쿠버라는 이름값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비를 잔뜩 머금은 흐린 구름이 밴쿠버를 감싸고 있었다.
그 카페는 Delanys Coffee라는 이름을 가진, 잉글리시 베이 근처에 있는 카페였다. 어딘가 투박한 인테리어가 30년 넘게 운영되어 온 이곳의 시간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진열장을 가득 채운 아침 식사용 베이커리와 커피 머신 옆에 겹겹이 쌓아 올려놓은 머그잔들. 오래된 카페의 테이블에는 아침 커피를 마시러 나온 동네 사람들이 가득했다. 단골손님들이 많은 것이 거의 확실하다.
카운터에서 커피를 주문하는 시간은 좀 즐겁게 느껴진다. 5년 전 토론토에서 지낼 때도, 여행 중이었던 이날도 역시 마찬가지다. 친절한 느낌이 드는 아주 단순한 대화가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준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속성이 꽤 좋은 그 행복감은 오늘도 이만하면 괜찮은 하루라고 느끼게 해 주었다. 그토록 사소한 순간 속에서 발현된 긍정적인 정서들은 조금씩 쌓여 나라는 사람을 만들기도 했다.
커피를 주문하고 우리는 밖이 보이는 창가 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내 부드러운 크레마가 잔뜩 올려진 따뜻한 아메리카노 세 잔이 나왔고, 바람이 불어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창밖의 풍경을 보고 있으니 흐린 날씨도 꽤 괜찮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아빠는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가 창가 쪽에 앉아 있는 엄마와 나의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프롤로그에서 밝힌 골치 아프지만 어쩔 수 없이 귀여운 여행 동행자 두 분은 사실 글쓴이의 엄마와 아빠다.)
너무도 일상적인 장소에서 사진을 찍는 건, "우린 이 도시를 여행하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뭔가 귀여운 모습일 것이다. 그때 우리 옆에 앉아, 따뜻한 라테와 크루아상을 드시던 어떤 여성분이 말을 거신다. "사진을 찍고 있는 거였어요? 여기 앞에 창문을 열어보세요. 더 잘 나올 거예요." 그녀의 표정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미소가 있었다.
그녀는 몸을 기울여 오래되고 묵직한 창문을 열어주었다. 그 모습이 다정하여 평소에는 결코 나올 리 없는 질문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괜찮으시면 저희와 함께 찍으실래요? 우리는 이 도시를 여행하고 있는 중이거든요.” 30초도 안된 순간의 대화로 사진첩에는 낯선 사람과 다정한 사진이 3장이나 찍혀있다.
(아빠는 그 와중에 사진을 세장이나 찍었다.)
아무도 우리의 이름을 모르는 도시에서 마음을 가득 채운 충만함은 이런 비물질적인 것이었다. 그때 그 웃음과 태도는 그녀의 매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당시 내가 느꼈던 심리적인 풍요는, 그녀에겐 특별한 순간이 아니라 일상에 내재되어 있는 아름다움일 것이다. 이건 어느 휴양지의 고급 호텔에서 받는 친절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결이다. 어쩌면 이런 내적인 행복은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가치가 내 안에서 더 커진 것일지도 모른다. 희소성의 법칙 같은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새롭고 낯선 도시들 안에서 좋은 감정을 느꼈던 공통적인 상황들이 있다.
처음 본 사람들과 시시한 대화, 모르는 사람에 대한 따뜻한 눈빛과 배려, 자연스러운 기다림, 고맙고 미안함에 대한 정확한 표현, 상대에 대한 담백한 칭찬까지. 이런 사소한 순간들은 유독 나에게 큰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도시들에서 느낀 나의 행복감에 대해 조금 더 냉철하게 생각해 봤다. 여행, 새로움, 낯선 곳과 같은 특별한 시간이 부여하는 쾌락적 요소를 걷어냈을 때도, 내가 느낀 행복의 본질은 그 작고 친절한 순간들 속에서 비롯되었다.
매일 찰나의 기분 좋은 순간들이 크루아상 속처럼 겹겹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 '사소한 좋음' 들은 나의 감정과 생각의 디폴트 값(default value)이 되어준다.
그 마음의 상태는 다른 사람에게도 비슷한 친절을 베풀 수 있는 마음의 여유 공간을 제공했다.
6년 전 토론토에서, 왠지 쓸쓸하거나 기분이 안 좋을 날엔 언제나 카페에 가서 커피를 주문했습니다. 카페에서 언제나 뜨거운 블랙커피를 주문했지만 가장 달콤한 시간을 얻어오기도 했지요. 그리고 오늘 하루도 꽤 근사하다고 느끼며 태연해진 모습으로 다시 카페를 나서곤 했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종종 밥을 먹으며 그녀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