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은 우산이 될 수도 있어
내가 상상했던 스탠리 파크의 모습이 있었다. 뜨거운 태양, 울창한 숲, 끝이 보이지 않는 남태평양 해변, 아름다운 공원에서 한가롭게 노니는 캐나다 구스 같은 것들이다. 한 가지 간과했던 사실은 한여름이 지나간 9월에도 비가 많이 내리는 밴쿠버의 날씨였다. 이 도시가 레인쿠버(Rain-couver)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스탠리 파크에서 자전거를 타기로 한날은 밴쿠버에 온 지 4일이 지난날이었다. 그동안 도시는 계속해서 맑은 날씨를 유지하며 레인쿠버라는 별명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었다. 스탠리 파크에서 자전거 타기란, 밴쿠버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날이야말로 날씨가 도와주어야 한다. (제발요)
그러나 나의 소망을 무시하듯, 지금까지 봐왔던 파란 하늘은 온데간데없고 비구름을 섞은 듯한 희끄무레한 아침이 밝았다. 톡 건들면 금방이라도 비가 추적추적 쏟아질 것 같은 구름이 하늘에 가득했다. 우리는 하늘을 덮은 먹구름을 조금은 무시하고, 스탠리 파크 입구 앞의 주황색 간판을 단 자전거 렌털샵에 도착했다.
다행인지, 아직 비를 머금고만 있는 구름 속에서 자전거를 타고 스탠리 파크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자전거를 타기 시작한 곳은 9km 길이에 달하는 공원 안의 씨월(Seawall)이라는 곳이다. 산책용 보도와 구분되는 자전거 전용 도로가 있고 스탠리 파크와 맞닿은 아름다운 바다를 감상할 수 있는 곳. 씨월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 산책로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왼쪽에는 울창한 숲, 오른쪽으로는 드넓은 해변, 등 뒤로는 멀어져 가는 도시의 건물들. 사람들을 둘러싼 외부 환경의 모든 구성 요소가 적당히 넓은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 마음속 여유는 공간적 여유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한다.
자전거를 타고 씨월을 20분 정도 달렸을 때,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한 방울, 두 방울 얇은 빗줄기가 헬멧을 쓴 머리에 떨어졌다. 그리고 이내 굵어지는 빗방울이 시야를 가리기 시작했다. 안개가 자욱한 하늘과 바다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스산해졌다.
앞으로 30~40분을 더 가야 출구가 나오고 렌털샵까지 거리를 생각하면 그보다 더 긴 시간을 비를 맞으며 가야 한다. 자전거를 타면서 지도도 봐야 하고, 맞는 길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마음속 불확실성은 내리는 비에 뒤섞여 불안과 걱정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염려는 앞으로 남은 일정이 더 많은데 뒤따라오는 엄마와 아빠의 컨디션이었다. 잠시 구글맵을 보기 위해 자전거를 멈춰 세웠다. 더 거세지는 빗줄기. 그러다가 뒤를 보고 갑자기 안도감이 생겼다. 소심한 걱정 인형의 염려가 무안하게 두 분은 해사한 미소를 짓고 힘차게 페달을 밟으며 나와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나는 아빠가 제주도에서 자전거 일주를 했다는 것과 엄마가 한라산 등반을 무리 없이 성공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제야 거센 빗줄기 사이로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도시의 내리는 비는 그들에게 어떤 불안을 야기하는 문제가 아니다. 여전히 걷고, 뛰고, 우리처럼 자전거를 타고, 커다란 나뭇잎을 우산 삼아 벤치에 앉아 보내는 평범한 금요일 오후일뿐. 이때부터 비가 내리는 스탠리 파크의 모습이 다정해 보였다. 비를 맞으면서 자전거를 타는데 축축한 게 아니라 산뜻한 느낌마저 들었다. 비에 공기가 섞인 걸까. 옷이 젖으면 몸이 무거워져야 하는데 나는 더 가벼워지고 있었다.
나를 가로막는 무언가가 빈번하게 찾아올때, 비가 오던 스탠리 파크를 떠올린다. 자전거를 탈때, 스쳐 지나갔던 아름다운 도시의 풍경을 생각한다. 불안에 침전되어, 나뭇잎 우산을 쓰고 강아지와 함께 벤치에 앉아 있던 캐나다 아저씨의 유쾌함을 보지 못했으면 그것 또한 꽤 불행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려운 시간을 헤쳐나갈 차분한 자유와 단단한 태도가 나에게도 존재한다고 믿게 되었다. 출구까지 가는 건 중요한 일이지만, 이제 비의 젖은 도시의 풍경도 놓치고 싶지 않다. 볕이 좋은 날만큼 아름답다는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주황색 간판의 자전거 렌털샵은 Spoke Bicycle Rentals이라는 곳입니다. 개인적인 이용 후기는 매우 만족스럽습니다. 이곳의 직원분들은 비를 잔뜩 머금은 자전거의 물기를 훌륭하게 제거하며 정비합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