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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에서 시작하다

상실에서 한 발짝 딛고 일어나

by 호단

'첫'으로 시작하는 단어 몇 가지를 나열해 본다. 첫사랑, 첫 직장, 첫 입학, 첫 졸업, 첫 이별, 첫 여행. 당신은 어떤 처음을 가지고 있는가. 누구는 설렘과 떨림에 어쩔 줄 모르던 여름밤의 기억을 가지고 있고, 다른 누구는 미련과 아픔에 괴로워하던 스무 살 무렵을 떠올리고, 또 다른 누구는 시원섭섭함을 느끼며 어중간한 상태에 놓였던 자신을 생각하겠지. 처음이라는 것은 대체로 이렇다.

그런데 이보다 강렬한 감정이 드는 처음도 있다. '첫 상실.'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잃고서야 소중함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고. 이미 일상의 일부가 되어서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일상이 떼어져 나간 후에야 정신이 확 드는 거다.

2월의 한 자락

나는 계획을 아주 좋아한다. 하루를 설계하고, 하나를 마무리할 때마다 동그라미 치고, 네모 칸에 원이 가득한 나날을 보내는 것. 이거야 말로 꾸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다. 그런데 어느 날을 기점으로 플래너가 멈췄다. 계획은 죄다 엑스표로 찢겼다. 함께 일하고, 꿈꾸고, 시간을 보내던 이가 사라진 여파였다.

아무리 바빠도 칸을 채워 넣었던 때와 달리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무엇을 계획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끝없이 질문만 늘여놓았다. 내가 무얼 하며 하루를 보냈더라? 어떻게 집중할 수 있었더라? 오늘이 이렇게 긴데 내일이 오긴 할까? 감정이 격해진 상황에서 으레 그러하듯 생각은 극으로 흘렀다. 괜찮아질까? 이전처럼 살 수 있을까?

십 년 친구를 불러다 놓고 속을 털었다. 처음이었다. 힘들어서 사람을 먼저 부른 것도, 나의 이야기를 들려준 것도, 꽃샘추위에 몸을 떨면서 컴컴한 공원을 벗어나지 않은 것도. 엉엉 울 거라고 생각해서 실외를 선택했건만 의외로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분위기는 생각보다 가벼웠고, 친구의 반응도 차분하고 침착했다. 감정이 격해질 틈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멀쩡해진 것은 아니었다. 바보처럼 또 물었다.



나 괜찮아질 수 있을까?



잠시 정적. 이어진 친구의 말에 눈물이 잔뜩 고였다.



나는 사실 네가 부러워. 이렇게 일상이 붕괴될 정도로 강한 감정을 느껴보는 건 흔한 일이 아니잖아. 지금 이 나이, 이 시점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지. 네가 나이 들고 물질적으로 풍족했으면 전혀 문제 될 거 없었을 거야. 이 감정과 생각을 느끼지도 못했겠지.

너는 글을 쓰잖아. 스트레스받을 때 글로 푼다고도 했고. 이 경험이 너에게 큰 자양분이 될 거야. 네 글이 훨씬 깊어질 기회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그로부터 2주가 지났다. 놀랍게도, 잘 살고 있다. 괜찮아진다. 시간은 약이었다. 하지만 아주 쓴 약이었지.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서 하루가 24시간임을 몸소 느껴야 했다.

나는 유독 멀리 보는 것에 약하다. 마감이 정해진 일은 우직하게 해낼 수 있으나, 이 상실감은 나를 언제까지 괴롭힐지 감도 안 잡혔다. 지금도 기한 없는 시간을 착실하게 보내는 요령 따위 생기지 않았다. 단지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감정은 순간이고, 순간은 지나간다.

시간은 감정을 데리고 간다. 덕분에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울퉁불퉁한 감정이 꽤 매끄럽게 녹아내린다. 잠잠해진 감정의 자리는 이성이 슬그머니 꿰찬다. 오래간만에 울지 않은 어떤 밤, 이런 생각을 했다. 딱히 의욕적으로 살고 싶진 않지만 죽기는 싫다. 그래, 삶을 선택한 이상 사람은 살아가야 한다.

나를 보살피기 위한 첫 선택. 일단, 계획을 하지 않았다. 매일 자정 즈음에 플래너를 펼치고 그날 했던 것을 적었다. 며칠 동안은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과 아이패드만 부산스레 만져댔고, 거기서 하루 이틀 지난 후엔 예전에 재밌게 봤던 웹툰을 정주행 했다. 몇 밤을 더 보내고 나니 웃긴 영상을 보며 진심으로 깔깔댈 수 있었다. 그때가 되어서는 다시 플래너에 계획을 채워갔다.

친구의 조언도 잊지 않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해야 할 일을 손에서 놓지 마. 나중에 후회해. 그래서 강의를 꼬박꼬박 듣고, 과제를 제출하고, 글을 썼다. 퀄리티는 엉망이었지만 무너진 나를 내팽개치지 않고 나름 책임졌다.

무거운 몸뚱이를 이끌고 낮에는 해를 쬐러 나갔다. 어느 날은 자전거를 타고, 어느 날은 벤치에 가만히 앉고, 어느 날은 버스 창가에 머리를 기대며. 사람 소리가 좋았다. 양손 가득 장바구니를 들고 정류장에 선 아주머니들, 재잘거리는 학생들,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 급히 뛰어가는 발소리, 나지막이 웃는 소리. 평화로웠다.

하지만 평화도 일시적이다. 괜찮다가도 울컥 눈물이 나고, 자신감 넘쳤다가도 한순간에 용기를 잃는다. 대중없는 감정 곡선 때문에 하루가 벅차기도 하다. 아직 상실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문득 스치는 괴로움마저 나의 일부가 되었음을 안다. 과거가 내 안에 살기에 현재를 숨 쉬게 한다.

오늘도 나는 끝에서 시작한다. 고통, 분노, 슬픔, 그리고 희망을 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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