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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는 항상 같은 얼굴을 하지 않는다

실패의 단계

by 호단

그런 사람이 있다. 사소한 일에 벌벌 떨면서 잔뜩 움츠러들고, 쉽게 긴장과 불안을 느끼는 사람. 그래, 내가 그런 사람이다. 나처럼 긴장과 불안을 타고난 사람은 유독 약한 부분이 있다. 타인 앞에서 ‘나’를 말하기.


초등학교 3학년 때로 잠시 돌아가 본다. 국어 시간인지, 과학 시간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여느 때와 같은 모습으로 수업이 진행 중이었다. 선생님이 질문을 던지면, 늘 발표하던 몇 명만 적극적으로 손을 들어 무언가를 말했다. 이때 선생님의 한 말씀이 상황을 다른 방향으로 바꾸어 놓았다. 한 번이라도 발표한 친구는 시키지 않고 대신 처음 손을 든 아이들에게만 발표할 기회를 주겠다며. 끊길 듯 말 듯 이어지던 수업은 결국 뚝, 멈추고 말았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아직 발표 안 한 친구가 발표하지 않으면
수업을 계속할 수가 없어.



그러나 한 번도 손을 들어본 적 없는 나는 애써 선생님의 눈을 피해 교과서에 시선을 묶었다. 쿵, 쿵, 쿵.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래도 괜찮다. 언제나 그랬듯 조용히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발표한 사람만 자기 자리에 앉을 수 있어.
정답이든 아니든 상관없고,
그냥 손들고 말하면 돼.



예상과는 다른 전개가 펼쳐졌다. 선생님의 말씀에 반 전체가 의자를 시끄럽게 밀어대며 교실 뒤편으로 나갔다. 서로의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빼곡하던 공간은 어느새 몇 명이 채우기엔 널따란 공간으로 변했다. 일곱에서 다섯, 다섯에서 둘. 나와 다른 친구 하나만 남았다. 쿵쿵쿵쿵쿵.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 자리에 앉은 친구들은 선생님의 말씀에 모두 앞을 보았고, 내가 마주한 건 겨우 선생님의 두 눈동자였는데도 손을 드는 것조차 어려웠다.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이 두려움보다 꼴찌가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컸다. 힘겹게 손을 들어 무어라 말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곧장 책상 위로 엎드렸다. 눈물이 찔끔 나던 탓에. 아주 작은 안도와 커다란 절망감이 온몸을 뒤덮었다. 억지로 못하던 것을 해냈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나의 부족함, 나의 모자람을 느꼈다. 의연하게 해내는 사람들도 많은데 왜 나는 커다란 용기와 노력, 애씀이 있어야 겨우 남들과 비슷한 수준에 닿을 수 있을까.


별 볼일 없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와 오갈 데 모르는 불안한 눈동자, 그리고 어색한 몸짓으로 우스꽝스러운 쇼를 하는 나. 이런 내가 미웠다. 너무 미워서, 다른 ‘나’가 되고 싶었다. 떨지 않는 나, 발표를 겁내지 않는 데다 잘하기까지 하는 나. 마음이 들끓었다.


고등학교 1학년 무렵, 학기 첫 발표를 위해 연습을 계속했다. 컴퓨터 앞에 서서 실제로 발표하듯이 해보고, 때로 엄마와 언니를 청중처럼 앞에 두기도 하고, 매일 잠자기 전에 발표 시뮬레이션을 수십 번 돌렸다. 대망의 발표날. 평소보다 심장이 덜 떨었던 것 같고, 외운 대로 잘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왠지 모를 뿌듯함에 입가가 자꾸만 씰룩였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그랬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넌지시 친구에게 발표 이야기를 건넸다. 한껏 깔깔대던 친구가 농담처럼 말했다.



너 목소리 너무 떨어서 염소인 줄 알았어.



아, 나는 처음 발표를 끝내고 엎드려 울던 그 아이에서 한 뼘도 자라지 못했구나. 그러나 그땐 울지 않았다. 오기였다. 눈물 대신 웃음으로 대처할 정도는 자랐다고, 나를 달래고 싶었다.


필수로 해야 하는 발표는 고등학교에서 끝일 줄 알았건만 대학에서도 피할 수 없는 발표 수업이 존재했다. 전처럼 열성적으로 준비하진 않았다. ‘어차피 세 번 준비하건 스무 번 준비하건 결과는 같을 것이다.’ 패배감이 팽배했다. 그러면서도 미련은 버리지 못했다. 나는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니까. 발표 잘하는 방법 따위를 찾아보며 실제로 적용해보기도 했다. 심호흡하기, 어깨 스트레칭하기, 입 근육 풀기, 불안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내가 최고라고 생각하기, 연습 많이 하기. 결과는 비슷했다. 랩처럼 마구 쏟아내는 말, 미친 듯이 펌프질 하는 심장 박동, 떨리는 목소리.


그런데 최근, 처음으로 괜찮은 발표를 했다. 여전히 떨고 긴장했지만, 전하고자 하는 바를 모두 전달했다. 전과 다른 점은 하나였다. 대본을 만들지 않았다. 실수하지 않으려는 마음에 강박적으로 대본을 외웠는데 워낙 긴장을 잘하는 타입인 사람에게는 그 또한 압박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이것으로 나의 실패가 성공으로 바뀌었다고는 말 못 하겠다. 지금껏 망쳐온 발표를 생각해 보면 겨우 한 번의 변화였을 뿐이다. 정말 ‘한 번’이기도 하다. 그다음에는 다시 원래처럼 덜덜 떨었으니 말이다. 타인에게 나를 말하는 과정은 여전히 긴장되고, 불안하고, 두렵다. 나는 이 일 말고도 앞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수십 번, 어쩌면 수백 번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실패는 항상 같은 얼굴을 하지 않는다. 아픈 실패, 괴로운 실패, 서러운 실패, 괜찮은 실패, 그리고 만족스러운 실패.


나는 계속 더 나은 실패로 향하고 있다고,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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