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려 Mar 09. 2022

18년

웃고 싶어 쓴 글


시아버님 기일이었다. 아버님은 남편이 고 2 때 돌아가셔서 얼굴을 직접 뵙지 못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아버님 제삿날은 언제나 무거운 기운이 내려앉았다. 어머님은 날카로워지셨고 남편과 형제들 얼굴은 어두웠다.


그날도 편치 않은 마음으로 상을 차리고 있었는데 큰어머니가 나를 보시며 말씀하셨다.

“이제는 알아서 잘하는구나.”

친정은 제사를 지내지 않았던 터라 결혼초에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다들 예민해져 있는 날에 ‘나의 익숙하지 않음’은 모두를 더욱 힘들게 했었다. 세월이 약이라고 나는 강제로 먹어 온 약 덕에 물 흐르듯 제사상을 차리고 있었다. 큰어머니는 그런 내가 대견스러우셨나 보다.

“시집온 지 얼마나 됐지?”

수에 약한 나는 한참을 되짚어 내가 결혼한 횟수를 세었다. 큰 아이 나이를 생각하고 다시 더하기 빼기를 한 결과가 나왔다.

“18년이요.”

나처럼 수에 약하신 건지, 아니면 흘러간 세월을 부정하고 싶으셨는지 큰어머니 눈이 커졌다.

“아니, 벌써? 아니다. 얘야.”

다시 수를 세었다. 이번엔 둘째의 나이를 헤아렸다. 중학교 2학년이면 15살인가? 둘째가 빠른 2월이니깐 한 살을 빼고…. 아, 아니다. 중국 다녀오면서 맞춰 갔나? 다시 더하기 빼기를 하고 난 결론은 마찬가지였다.

“큰어머니, 맞아요. 18년 됐어요.”


음음, 어머니가 헛기침을 하셨다. 남편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잔을 받쳤고 아주버님이 술을 따르셨다.

그때야 계산이 끝나셨는지 큰어머니가 다시 말씀하셨다.

“아니다. 네가 무슨 18년이냐?”

“저 진짜 18년이에요.”

여러 번의 정산을 마친 나는 당당하게 주장했다.

물을 들고 가시던 형님이 입을 꽉 무셨다. 아주버님이 술을 따르시다가 흘리셨다. 남편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뭐가 잘못된 거지? 이상한 낌새에 옆에 서 있던 대학생 조카를 바라보며 소리를 내지 않고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내 입 모양을 읽은 조카가 힘겹게 대답했다.

“외숙모, 18년.”

조카가 말을 마치더니 눈을 피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외숙모 18년 됐어.”

그러자 큰어머니가 다시 소리 높여 말씀하셨다.

“아니다, 너 18년 아니다.”

“아, 정말이에요. 저 18년이에요.”

“네가 무슨~. 아니다. 너 18년 아니다.”

“큰어머니, 저 18년 맞다니까요.”

성대까지 넓혀가며 강하게 주장했다.


으음~흑. 헛기침을 하시던 어머니가 웃음을 터트리셨다. 식구들이 웃기 시작했다. 손 모아 서 있던 조카들도, 주전자를 들고 계시던 아주버님도 잔을 들고 있던 남편도…. 나와 큰어머니만 멀뚱멀뚱 식구들을 살폈다. 큰애가 다가와 제 얼굴을 내 가슴에 파묻고는 크큭 거렸다. 무슨 일이 있었나? 난 큰 애가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궁금해하며 등을 문질러주었다


그날따라 둔했던 나는 제사가 끝나고 나서야 사태 파악을 했다.

"어떡해?"

입을 틀어막는 나를 보며 남편이 미소 지었다.

"괜찮아."

식구들을 둘러보았다. 아주버님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으셨고 형님은 이를 들어내고 씩 웃어주셨다.

어머니 입가에는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아마 아버님도? 한바탕 크게 웃으셨겠지?

아니면 우리 며느리가 18년이 됐나 안 됐나, 덧셈 뺄셈을 하고 계셨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안면인식 장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