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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려 Jul 30. 2022

대를 끊어야 산다

내 아픔이 너를 삼키지 않도록


"문제가 있는 아이는 아이가 아니라 대부분 부모가 문제지."

"그 부모는 다시 그 부모가 문제가 있었던 거고요."

대화를 나누던 네 사람은 씁쓸한 웃음을 띠었다.



갱년기가 오면서 살이 쪘다. 배부터 부풀어 오르더니 온 몸이 팽창했다. 검진을 받았지만 이상은 없었다. 운동을 해야 한다는 단순한 해결책을 뒤로 미루고 마음 탓을 했다. 세월 탓을 했다.

하루는 둘째가 말했다.

"엄마, 살이 찌는 것을 왜 자꾸 저한테 변명하세요?"


변명이 초라한 이유는 남 탓을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무능력을 주위 사람들에게, 세월에게 돌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명은 사실이 아니다. 새로 조합해낸 허상이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고 흐르는 대로 흘러가겠다는 포기다. 완전한 항복이다.


부부싸움을 아이들 앞에서 하는 부모들은 끊임없이 싸움에 대한 변명을 한다. 네 아빠 탓이다, 네 엄마 탓이다, 더 나아가 "네 탓이다".

아이는 아빠의,  엄마의 나쁜 점을 마음속에 키우게 된다. 아빠와 엄마가 번갈아 하는 이야기에 아이는 아빠와 엄마가 밉다. 엄마에 대한 미움을 심어준 아빠가 밉고 아빠를 미워하게 만든 엄마가 밉다. 그리고 그 둘을 미워하는 자신이 밉다.

아이는 그 흔한 '자존감'이란 단어와 결별을 하고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쳐야 한다. 어린 시절의 유일한 가족이란 세상이 자신의 무능력함으로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아이는 부모를 지키기 위해 본성을 버리고 꼭두각시가 된다. 부모가 만들어 놓은 ' 탓'이라는 철망에 갇혀 물구나무서기를 한다. 피에로가 된다. 아이는 세상의 모든 죄를 자기 것으로 칭칭 감고 신음한다.

'모든 잘못의 근원은 나야. 내가 태어나서 아빠와 엄마가 서로를 미워하고 망가지는 거야. 내가 잘했으면 우리 가족은 화목했을 거야.'



산책로 길목마다 언덕을 타고 올라온 칡덩굴이 촉수를 뻗어 길을 더듬고 있다. 동네 사람들이 번갈아 가며 칡덩굴을 베어내지만 길만 조금 깨끗해질 뿐이다. 칡은 뿌리를 키워 땅 속에서 더욱 거대해지고 있다.

산 잡목을 관리하시는 분에게 칡덩굴을 제거하는 방법을 들었다. 칡은 직근이라 뿌리를 다 캐려면 포클레인을 불러 땅을 2,3 미터 파내려 가야 한다고 한다. 비용도 많이 들지만 파헤쳐진 땅 관리도 쉽지 않다. 그래서 그분들은 칡덩굴의 뿌리 부분을 찾아내고 마디를 자른다. 그 위에 더 이상 칡이 자라지 못하도록 약을 바르고 비닐봉지를 돌려 공기를 차단한다.

"그래도 살아나는 놈들이 있어요."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밤새 독을 묻힌 칡이 나를 휘감는 악몽을 꾸었다. 목을 조이고 정수리조차 삼킨 덩굴은 촉수를 더듬어 남편에게 다가갔다. 남편의 다리를 잡아채고 몸을 감더니 높이 들어 올렸다. 그 뒤로 놀라 서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새로운 먹이에 흥분한 칡덩굴이 아이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나는 허덕거리며 꿈에서 깨어났다.

뿌리와 덩굴의 시작점을 찾아야 해. 덩굴을 잘라내야 해. 내 무의식을 다 헤집어 낼 수는 없다. 그럴 시간이 없어. 이미 난 내가 대를 이어 간직한 아픔들을 아이들에게 전했을지도 몰라. 덩굴의 목을 잘라내야 해. 약을 바르고 비닐봉지를 씌워야 해.


나는 낫을 들었다. 내 속을 헤집고 들어가 덩굴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때로는 꽃을 꺾었고 희망의 씨앗을 밟기도 했다. 다시 덩굴에 목을 조이고 일상을 놓아버리기도 했다. 그때마다 다시 솟아오르는 생각들이 있었다. 허깨비인 지난날들의 아픔으로 내 숨구멍을 막지 말자. 남편을 힘들게 하지 말자. 아이들에게 대를 잇게 하지 말자. 



책이나 수필들을 읽다 보면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아픔들이 있다. 핵심을 찌르지 못하고 빙글빙글 도는 글들을 보면 그 아픔의 깊이가 얼마나 깊을까, 아릿해진다. 자신의 길을 가지 못하고 한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땅에서 뻗어 오르는  덩굴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는 청춘들을 보면 눈물에 저릿하다. 마음이 소리친다.

"도망 가, 네 탓이 아냐. 피해자인 척하는 사람들 속에서 스스로를 가해자로 만들지 마. 달아나도 돼. 너는 네 인생을 살아. 너를 휘감고 있는 죄책감을 잘라내."

젊은 나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다. 그건 용기가 아니다. 선택도 아니다. 살기 위한 당연한 본능이다. 그러니 부끄러워하지 말고 당당하게 잘라내야 다.


누군가는 낫을 들어야 한다. 누군가는 톱을 꺼내야 한다. 그 부모의 부모들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문제의 시작. 문제의 뿌리를 잘라내야 한다.

무책임한 어른들이 씌워놓은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 힘이 있음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



무의식에서 솟아오른 덩굴을 자를 때마다 잘린 마디에 바를 약은 무엇일까? 씌워야 할 비닐봉지는 어디 있을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책을 읽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의 아픔 속에서 무의식을 파헤치기도 했다.

그나마 찾아낸 것은 그들도 그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인정'? 그리고 그들도 나약한 사람들이라는 진정한 '용서'?


난 아직 약을 바르지 못하고 비닐봉지를 씌우지 못한다. 그래서 매번 덩굴은 다시 자라 오르고 숨을 조여 온다. 하지만 이제 내 손엔 낫과 톱이 들려있다.

인정이라는 약과 용서라는 비닐봉지를 구할 때까지 낫을 베고 톱을 들어 죄책감이라는 덩굴을 잘라내고 잘라낼 것이다. 낫도 톱도 없다면 어금니로 덩굴을 씹을 것이다. 그렇게라도 대를 끊어낼 것이다. 부모의 부모를 넘어서는 아픔의 대를...


그래야  살 수 있다.  허접한 유산 따위는 남기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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