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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려 Oct 07. 2022

하얀


 여름이었다. 서울 연남동의 한 카페에서 한강 작가의 소설 '흰'을 만났다. 작가가 가슴에 담았던 '흰' 것들이 너울져 있었다. 단숨에 읽어 내려가 글을 한 편 뱉었다.

 

한강의 흰


머리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한강의 흰과 함께 장막을 두른다

희고 흰 세상들

난 얼어붙은 바다의 흰 파도가 되고 물고기의 지느러미가 된다

하얗게 내려앉는 흰…


그녀가 짊어지고 간 시간이

나와 다르지 않음에 안도한다

그리고

무섭다

넋이 내려앉는다

넋이 날아오른다


“거짓말을 그만둘 것.

(눈을 뜨고 장막을 걷을 것.

기억할 모든 죽음과 넋들에게 -자신의 것을 포함해- 초를 밝힐 것)”

그녀의 글은 희다

나의 글은,

검다

 떠난 넋은 희다

널 떠난 나는,


내려앉을 곳을 찾는다

허공을 떠도는 넋의 피로

초를 밝혀 달래줘야 한다

더 높이

떠올라

떠올라

사라지게 해야 한다

하얗게

하얗게


그리고,


가을이었다. 난 도공의 방에서 '하얀'을 만났다. '하얀'은 공방 한구석 그늘진 곳에 앉아 있었다. 제 몸을 다 말리고 가마의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만들어 놓은 그릇들 사진이나 찍어야지 하고 다가갔는데 보는 순간 아찔했다. 이렇게 하얄 수가….

물기가 다 마른 백토는 내가 만들어 놓은 형태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지만 너무 하얬다.

하얗고 하얘서 그냥 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다 해도 부서져버린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한강 작가가 이 '하얀'을 본다면 무어라 했을까? 혹시 만나게 된다면 이 '하얀'을 꼭 소개시켜 주겠다고 다짐했다.


하얀


그것은 태초의 빛


바스락

세상에 귀를  아기의 최초의 웃음

바스러질까 두려운 경계

아사삭

손으로 잡을 수 있는 마지막 표피

아스라한 순백의 너울


그대로 눈에 담아도 녹아내릴 듯

눈보다 더 희디흰 살결

어떤 마음도 끼어들 수 없는

있는 그대로의 환희


이 모습 그대로 남기고 싶어

몇 천 년 동안 풀지 못한

도공들의 숙제


그래서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하얀


     - 소려의 못된 시 '하얀'



"선생님, 이 모습 그대로 보존할 수는 없을까요? 유약 바른 것도 좋지만 순수한 이대로도 아름다워요."

공방 선생님에게 떼를 썼다. 당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없습니다."


나보다 더 도공들은 이 모습을 그대로 남기고 싶었을 것이다.

'하얀', 그 본연의 아름다움을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손끝 하나로도 부스러져 버릴 수 있는 '하얀'.


"너를 지켜줄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어."

도공은 '하얀'이 그 속에서라도 영원하길 바라며 유약을 발랐을 것이다.

눈물을 떨구는 도공을 위해 그 '하얀'은 기꺼이 불 속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순간의 '하얀'을 영원한 사랑으로 만들기 위해서.


사진으로는 그'하얀'을 담을 수 없었다. 공방에서도 잠시 스치는 만남이었다.

정형을 마치고 반그늘에서 일주일쯤 말려야 그 '하얀'이 나타난다. 그리고 가마로 들어간다.

그래서 더 아름다운가 보다.

먼지 쌓이고 때 탄 모습을 볼 수 없어서.

그래서 더 아름다운가 보다.

불을 무서워하지 않고 영원을 꿈꿔서.



* 참고문헌  "흰" 한강 지음, 문학동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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