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었다. 서울 연남동의 한 카페에서 한강 작가의 소설 '흰'을 만났다. 작가가 가슴에 담았던 '흰' 것들이 너울져 있었다. 단숨에 읽어 내려가 글을 한 편 뱉었다.
머리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한강의 흰과 함께 장막을 두른다
희고 흰 세상들
난 얼어붙은 바다의 흰 파도가 되고 물고기의 지느러미가 된다
하얗게 내려앉는 흰…
그녀가 짊어지고 간 시간이
나와 다르지 않음에 안도한다
그리고
무섭다
넋이 내려앉는다
넋이 날아오른다
“거짓말을 그만둘 것.
(눈을 뜨고 장막을 걷을 것.
기억할 모든 죽음과 넋들에게 -자신의 것을 포함해- 초를 밝힐 것)”
그녀의 글은 희다
나의 글은,
검다
날 떠난 넋은 희다
널 떠난 나는,
내려앉을 곳을 찾는다
허공을 떠도는 넋의 피로
초를 밝혀 달래줘야 한다
더 높이
떠올라
떠올라
사라지게 해야 한다
하얗게
하얗게
흰
그리고,
가을이었다. 난 도공의 방에서 '하얀'을 만났다. '하얀'은 공방 한구석 그늘진 곳에 앉아 있었다. 제 몸을 다 말리고 가마의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만들어 놓은 그릇들 사진이나 찍어야지 하고 다가갔는데 보는 순간 아찔했다. 이렇게 하얄 수가….
물기가 다 마른 백토는 내가 만들어 놓은 형태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지만 너무 하얬다.
하얗고 하얘서 그냥 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다 해도 부서져버린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한강 작가가 이 '하얀'을 본다면 무어라 했을까? 혹시 만나게 된다면 이 '하얀'을 꼭 소개시켜 주겠다고 다짐했다.
그것은 태초의 빛
바스락
세상에 귀를 연 아기의 최초의 웃음
바스러질까 두려운 경계
아사삭
손으로 잡을 수 있는 마지막 표피
아스라한 순백의 너울
그대로 눈에 담아도 녹아내릴 듯
눈보다 더 희디흰 살결
어떤 마음도 끼어들 수 없는
있는 그대로의 환희
이 모습 그대로 남기고 싶어
몇 천 년 동안 풀지 못한
도공들의 숙제
그래서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하얀
- 소려의 못된 시 '하얀'
"선생님, 이 모습 그대로 보존할 수는 없을까요? 유약 바른 것도 좋지만 순수한 이대로도 아름다워요."
공방 선생님에게 떼를 썼다. 당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없습니다."
나보다 더 도공들은 이 모습을 그대로 남기고 싶었을 것이다.
'하얀', 그 본연의 아름다움을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손끝 하나로도 부스러져 버릴 수 있는 '하얀'.
"너를 지켜줄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어."
도공은 '하얀'이 그 속에서라도 영원하길 바라며 유약을 발랐을 것이다.
눈물을 떨구는 도공을 위해 그 '하얀'은 기꺼이 불 속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순간의 '하얀'을 영원한 사랑으로 만들기 위해서.
사진으로는 그'하얀'을 담을 수 없었다. 공방에서도 잠시 스치는 만남이었다.
정형을 마치고 반그늘에서 일주일쯤 말려야 그 '하얀'이 나타난다. 그리고 가마로 들어간다.
그래서 더 아름다운가 보다.
먼지 쌓이고 때 탄 모습을 볼 수 없어서.
그래서 더 아름다운가 보다.
불을 무서워하지 않고 영원을 꿈꿔서.
* 참고문헌 "흰" 한강 지음, 문학동네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