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3장 1958년 모스크바
분수대 물줄기마다 무지개가 영롱하게 피어올랐다. 선희와 선호는 극장 앞 광장에 서서 분수대의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물줄기 반대편으로 볼쇼이 극장이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평생 기억에 남을 둘만의 추억을 만든다는 생각에 선희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주위의 다른 연인들을 보던 선호가 팔꿈치를 내밀었고 선희가 팔짱을 꼈다. 둘은 여자, 남자 주인공처럼 사뿐사뿐 볼쇼이 극장 문 안으로 들어섰다.
천장 위에 매달린 샹들리에에서 희고 노란 불빛이 쏟아져 내렸다. 하얀 계단 위에 붉은 카펫이 상상의 세계를 향해 깔려 있었다. 선희는 벅차오르는 기쁨에 카펫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이 자리를 잡느라 힘을…, 조금 더 썼습니다.”
극장 2층 맨 앞자리에 앉으며 선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선호답지 않은 말투에 웃으며 선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리를 찾아가는 사람들과 악기를 조율하는 소리로 극장 안은 분주했다.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사람들은 설레는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빈 무대를 보며 일행과 속삭이는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천장까지 솟아있는 5층짜리 객석은 모든 나라의 공주와 왕자를 앉혀 놓은 것 같았다. 무대 바로 맞은편 황제 전용 좌석이었다는 곳에도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푹신한 의자와 붉은 커튼까지 모든 것이 세밀하고 아름답게 현실과는 다른 세상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 순간만은 다른 세상 속의,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볼쇼이 극장의 모든 것들이 속삭이는 것 같았다.
음악이 흐르고 실내조명이 꺼지면서 무대가 밝아졌다. 팡파르가 울리고 왕자가 날아오르듯 무대 위에 나타났다. 왕자의 생일 파티가 벌어졌다. 처음 보는 현란한 무대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에 선희는 문득 의문이 생겼다.
자신들이 전복시킨 왕조와 똑같은 세상을 무대에 세워놓고 인민이란 그들은 박수를 치고 있었다. 무대 위 공주들은 평범한 여자들은 평생 입어보지도 못할 나풀거리는 치마를 입고 왕자의 생일파티에서 춤을 춘다. 객석에 앉은 여자들의 눈동자가 동경으로 반짝거렸다. 삽질 한번 해보지 않았을 왕자의 손에 활이 들리자 옆 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는 투박한 자신의 손을 숨겼다.
왕조는 무너졌지만 왕조 시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혁명 전에는 왕족과 귀족들로 가득 찼을 관객석이 이제는 그들이 말하는 인민, 그들 자신으로 대체되었을 뿐이었다.
‘왕조 시대의 무대를 보면서 박수를 치는 소련 사람들은 어떤 마음일까? 자신이 그 세상을 가졌다는 여유일까, 예술은 예술일 뿐이라는 이중적인 마음일까?’
마법사 로트바르트의 검은 망토 뒤로 백조들이 날아오르다가 다시 내려앉았다. 오데트가 몸을 털며 사람으로 변해갔다. 현실과 상상의 세계 사이를 혼란스럽게 오가던 선희는 오데트 역을 맡은 마야 플리세츠카야의 떨리는 손끝에 상상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어머니의 눈물로 만들어졌다는 호수를 떠나지 못하는 마법의 노예들, 하얀 백조들의 몸짓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로트바르트의 횡포가 백조들을 더 불쌍하고 아름답게 만들었다. 어느새 선희는 아버지가 계신 알마티로 날아올랐다.
왕자가 마법사의 검은 날개를 찢었다. 마법사 로트바르트가 쓰러졌다.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어떤 사람들은 일어나 휘파람을 불었다. 선희도 일어나 박수를 쳤다. 하지만 선호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선호의 얼굴에 문득문득 스치던 어둠이 오늘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환하게 조명을 밝힌 볼쇼이 극장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극장 문을 들어섰을 때와는 달리 둘은 웃지 않았다. 어두워진 거리를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크렘린의 붉은 벽과 함께 선호의 침묵이 선희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볼쇼이 극장에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세계의 문을 열어버린 것 같았다.
모스크바 강을 비추던 가로등 불빛들이 세찬 바람에 출렁거렸다. 그 바람 속에 혹시 백조가 날아가고 있지 않을까, 선희는 고개를 들어 바람의 끝을 쫓았다.
“난 우리 마을 사람들이 백조들 같았어. 스탈린의 마법으로 백조가 되어버린 사람들…. 그들은 왜 고향으로 날아가지 않았을까?”
“마법이잖아. 악마의 마법은 사람들을 가둬버리는 저주니까.”
선호의 목소리가 강물처럼 출렁거렸다.
“그럼 좋은 마법은 없을까? 서로를 행복하게 해 주고 자유롭게 날아오르게 만드는…?”
선희가 선호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그러기엔 인간이 악한 걸까? 약한 걸까?”
선호가 강줄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선희도 선호의 눈길을 따라 모스크바 강을 바라봤다. 흘러가는 강물 위로 어지러운 생각들이 형체를 띠기 시작했다.
열차 칸에 갇힌 사람들, 그들은 아이가 울어도 사람들이 죽어 나가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대로 앉아 몸만 흔들거린다. 흔들거리던 사람들이 초점 없는 눈동자로 선희를 쳐다봤다. 그 텅 빈 눈동자들은 점점 커지더니 선희를 잡아먹을 듯 달려들었다. 선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텅 빈 검은 눈동자들이 강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선희야, 난 내가 로트바르트가 될까 봐 무서워.”
선호가 강물에 돌을 던지는 사람처럼 툭 말을 뱉었다.
“로트바르트?"
사람들을 모두 백조로 만들어 버린 마법사 로트바르트가 된다고? 선호, 네가 왜? 선호는 선희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선희에게 선호는 자신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마법을 풀어줄 유일한 왕자님이었다. 그런 선호가 왜?
선호는 여전히 검은 모스크바 강물만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이 백조라고 생각하지. 자신이 피해자라고. 그러고는 자신을 구해 줄 사람을 기다려. 물에 비친 마법사가 사실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모르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