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5장 1958년 모스크바
선호는 더 이상 그 나무 밑에서 선희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 어디에서도 선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선희는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물었지만 소용없었다. 북조선 학생들은 예전처럼 선희를 외면했다. 학생처 직원들이나 남자 기숙사 학생들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모른다는 소리만을 반복했다.
그렇게 한 달이 흘러갔다. 교실 한 구석에 넋을 놓고 앉아 있는 선희에게 세르게이가 다가왔다. 텅 빈 교실 안에서도 주위를 살피며 세르게이가 입을 열었다. 북조선 간부로 보이는 남자 둘과 소련 비밀경찰 하나가 찾아와 선호를 데려갔다고 했다. 날짜를 헤아려 보니 볼쇼이 극장에 다녀온 날이었다.
“위로가 되지는 않겠지만 그 사람들이 선호를 함부로 하지는 못했어. 팔조차 잡지 못하고 한참을 떠들더군. 그리고 선호는…, 자신이 잡혀갈 걸 이미 알고 있는 사람 같았어.”
세르게이가 힘겹게 말을 마쳤다. 선희가 세르게이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미안해, 조선희. 그걸 본 학생들은 모두 비밀경찰들한테 불려가서 입단속을 당했어.”
세르게이가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세르게이가 강의실 문을 열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율리아와 다른 학생 둘이 세르게이의 등을 두드리며 사라졌다.
'그래, 내 탓이야.'
선희는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우고 복도로 나갔다. 계단 가에 모여 있던 북조선 학생들이 선희를 보자 흩어졌다. 그중, 빵떡모자를 쓴 남학생 하나만이 남아 선희를 쳐다보며 비웃었다. 계단에 한쪽 다리를 올리고는 거들먹거리며 큰소리로 떠들었다.
“그러게, 조심하라고 할 때 조심했어야지. 마스터 양녀인지, 첩년인지 알게 뭐야? 뭔지도 모르고 놀아나더니, 그 꼴을 당한 거 아냐.”
선희가 돌아섰을 땐 그 빵떡모자 앞에 이미 은영이 서 있었다.
“동무야 말로 입 조심 하라, 아니면 제일 먼저 골로 가는 수가 있어.”
은영의 서슬에 놀란 빵떡모자가 모자를 눌러쓰며 도망쳤다. 다른 북조선 학생들도 빵떡모자를 쏘아보거나 손가락질했다. 돌아서던 은영이 선희와 마주쳤다. 은영의 얼굴에 질타와 걱정이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그래, 내 탓이야.' 선호가 사라진 후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했던 선희는 본관 건물을 나서다가 쓰러졌다. 하늘 위로 새들이 날아올랐다.
열차에 몸을 맡긴 채 흔들거리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어 갔다. 사람들의 텅 빈 눈동자. 선희는 유령 같은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가면서 사람들 얼굴을 살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선희의 얼굴은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한 여자가 배에 칼이 꽂힌 채 쓰러져 있었다. 선희가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갔다. 흥건한 피 위로 선희의 어머니가 누워있었다. 선희가 무릎을 꿇고 어머니의 머리를 무릎 위에 올렸다.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둘러보았지만 아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기차 한 구석, 검은 망토를 두른 남자가 칼을 든 사내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사내는 컥컥거리며 벗어나려고 몸부림쳤지만 힘이 달렸다. 아버지였다. 선희가 소리를 쳤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떨어뜨렸다. 선희가 다가가려 하자 사람들이 길을 가로막기 시작했다. 점점 검게 변하는 사람들, 그들의 초점 없는 눈동자들이 선희를 조여 왔다. 아버지의 몸이 늘어졌다.
‘안 돼’, 겨우 소리를 내지른 선희가 사람들을 밀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사람들이 검은 연기로 변하며 사라졌다. 검은 망토를 두른 남자가 선희를 돌아봤다. 선호였다. 선희와 눈이 마주치자 선호의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선희가 놀라 걸음을 멈췄다.
목이 졸려 축 쳐져 있던 아버지가 머리를 들었다. 차갑게 웃는 얼굴. 아버지가 아니라…, 마스터였다. 마스터가 선희를 보고 웃으며 손을 천천히 들었다. 그리고 총소리. 선호가 스러져갔다.
헉, 악몽에서 깬 선희가 일어나 앉았다. 학교 의무실,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선희는 링거를 뽑고 휘청거리며 문밖으로 나섰다.
강의실 문 앞에 섰다. 선희는 강의가 끝날 때까지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학생들이 몰려나왔다. 선희가 걸음을 뗐다. 선희의 눈은 한 사람만을 따라가고 있었다. 김 은영.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웃는 은영을 선희는 멀리서 지켜보았다. 은영의 발걸음에 맞춰 걷고 멈췄다. 지나가던 바즈데예프 교수가 은영과 이야기를 나눴다. 둘은 웃으며 손을 흔들고 헤어졌다.
선희는 다시 은영의 뒤를 따라갔다. 바즈데예프가 선희 옆을 지나쳐 갔다. 초점 없는 눈동자, 선희는 꿈속에서 보았던 사람들과 같은 모습으로 은영을 따라갔다. 바즈데예프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한참 동안 그대로 서서 선희를 지켜보았다.
건물을 나간 은영은 지나가던 북조선 학생들에게 손을 흔들고 정원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주위를 살폈다.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은영이 벤치에 앉아 책을 펼지고는 중얼거렸다.
“이제 할 말 있으면 하시라요.”
“무사한 지 궁금해요. 살아 있는지만 알려 주세요.”
선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책을 노려보던 은영이 탁 소리가 나게 책을 접고는 일어섰다. 아무 말도 없이 걸어가는 은영의 뒷모습이 나무 뒤에 숨어있던 선희의 텅 빈 눈동자 위에 맺혔다.
차마 볼쇼이극장으로는 갈 수 없었다. 발길을 돌려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으로 향했다. 지난여름 향기로웠던 라일락꽃은 모두 지고 나무들은 잎사귀마저 떨군 채 맨 몸으로 눈보라를 맞고 있었다. 선희는 붉은 광장 한가운데에서 선호의 흔적을 찾았다. 군인 둘이 선희를 못 본 척하며 잰 걸음으로 크램린 궁 안으로 사라졌다. 선희는 큰 길을 가로질러 보로비츠카야 망루를 등에 지고 모스크바 강가에 섰다.
모스크바의 성급한 겨울이 이미 강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얼어붙기 시작한 강 위로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선희는 선호의 눈길이 닿았던 곳을 바라보았다. 다리 한가운데 아직 얼지 않은 강의 심장이 검게 출렁거리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간다. 강기슭을 내려가 발을 디디면 얼음이 부서진다. 바사삭, 강의 가벼운 껍질이 부서진다. 천천히 한 걸음 더. 모스크바 강의 검은 심장이 선희를 갈망하며 뛰어오른다. 성급한 강이 제 몸을 깨뜨리고 선희를 집어삼킨다.
축복 같은 냉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온몸이 얼어버린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깊은 어둠. 선희는 그곳에서 자신을 잊는다. 보고 싶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리고 선호도…, 잊는다. 선희는 목을 조여오던 그리움 속으로 빠져든다. 깊은 어둠 속으로 깊이깊이….
꿈틀 무언가가 솟아오른다. 하나둘 살을 찢고 삐져나온다. 둘러보니 온 몸이 검은 깃털로 가득하다. 검은 깃털이 선희의 목과 얼굴까지 뒤덮는다.
“으흐흐.”
푸르고 시린 웃음소리가 검은 깃털 사이를 파고들어온다. 저기 검은 강의 심장 한가운데에서 마스터가 파란 눈을 번득이며 웃고 있다.
번쩍! 일제히 켜진 가로등 불빛에 선희의 눈앞이 환해졌다. 헉, 망상에서 벗어난 선희는 겨우 숨을 내뱉었다. 강물이 출렁거리다 솟구쳐 올랐다. 바람에 날아가던 하얀 눈송이들이 선희를 대신해 강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선호야, 나 무서워.”
선희가 말을 토했다. 강물 위로 선호의 쓸쓸한 얼굴이 출렁거렸다.
“나 너무 무서워.”
선희의 텅 빈 눈망울 위로 눈송이들이 휘몰아쳤다.
“나 악마가, 악마가 될 거 같아.”
선희의 목소리가 하늘 위에서 부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