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6장 1958년 모스크바
스스로 유령이 된 선희는 교실 맨 뒤에 앉아 시험지를 쳐다보고 있었다. 텅 빈 시험지, 여기에 남기 위해선 시험지를 검게 채워나가야 했다. 쓴웃음이 치밀어 올랐다. 선희는 고개를 들었다. 바즈데예프 교수와 눈이 마주쳤다. 한참을 그대로 선희를 쳐다본 듯 바즈데예프의 얼굴과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선희가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바즈데예프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선희에게 따스한 눈빛을 건넸다.
“괜찮니?”
바즈데예프의 입술이 조용히 움직였다. 뭐야?’ 선희가 표독스럽게 눈을 치켜떴다. 여전히 선희를 바라보고 있던 바즈데예프가 교탁 옆으로 나오더니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리고는 이번엔 소리 내어 말했다.
“미안합니다.”
선희가 놀라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고개를 든 바즈데예프가 다시 한번 말했다.
“쁘라시찌, 조선희.”
선희 앞에 앉아 있던 세르게이가 돌아앉으며 말했다.
“쁘라시찌, 선희.”
세르게이를 시작으로 강의실 안에 있던 학생들 사이로 단어 두 개가 돌고 돌기 시작했다. 쁘라시찌, 선희. 쁘라시찌, 선희. 율리아가 일어서서 고개를 숙였다. 쁘라시찌, 선희.
“미안해, 선희야.”
시험이 끝나고 선희는 강의실에 혼자 남아 책상 위에 놓인 만년필을 쓰다듬었다. 만년필에는 조선호 이름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붉은 광장에서 돌아오던 날, 지하철 안에서 선호는 만년필을 건네주며 말했다.
“혹시 누군가의 인생에 마침표를 찍고 싶은 날이 다시 온다면….”
말을 맺지 못하고 쓸쓸하게 웃던 선호가 생각났다.
만년필을 보던 선희는 갑자기 짐을 챙겨 뛰어나갔다. 건물 밖으로 나가 그 나무 밑을 지나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려갔다. 선희는 선호를 만나기 전까지 매일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들었던 곳,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래서 구석구석 익숙한 곳. 계단을 뛰어올라 책꽂이 사이로 달려 들어갔다. 공부하던 학생들이 도서관을 울리는 발소리에 짜증 섞인 얼굴을 들었다가 선희를 보고는 고개를 떨궜다.
서가로 가 책을 훑던 선희의 눈이 한 곳에서 멈췄다. 책을 뽑아 들었다. 책장을 넘기고 손가락으로 글을 따라갔다. 해바라기. 해바라기의…, 꽃말은…. 그리고 멈췄다.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후드득, 책 위로 눈물이 쏟아졌다. 선희는 흑백 사진 속 해바라기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눈물에 젖어들기 시작한 해바라기가 제 꽃잎을 노랗게 물들였다. 노란 해바라기가 목을 흔들며 선희를 바라봤다. 선희가 읊조렸다.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똑똑, 책꽂이를 두드리는 소리에 선희가 고개를 돌렸다. 은영이었다. 은영은 눈물이 가득 고인 선희의 눈을 보며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투두둑, 눈물이 다시 책 위로 떨어졌다. 선희가 책과 눈가의 눈물을 닦고 은영을 쳐다보았다. 은영이 선희에게 나오라는 눈짓을 하고는 사라졌다.
선희는 책 속의 해바라기를 한 번 더 쓰다듬고 책을 덮었다. 책을 제자리에 꽂아놓고 선희는 은영의 뒤를 따라 나갔다. 계단에서 기다리고 있던 은영이 선희의 기척을 느끼자 다시 걸음을 뗐다. 그렇게 멀찍이 선희는 은영을 따라갔고 은영은 선희를 기다려 줬다. 은영은 인적이 드문 학교 정원, 그때 그 벤치 위에 앉아 책을 펼쳤다.
“조 선호 동지는 평양으로 송환됐소.”
슬라브계 여학생 하나가 차가운 벤치에 앉아 중얼거리고 있는 은영을 이상하게 쳐다봤다. 은영이 으흠, 하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여학생이 사라지자 은영이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시라요, 무사하니. 댁들 같은 사냥꾼들을….”
은영이 읽지도 않은 책의 책장을 넘겼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건들 갔소.”
은영이 책을 덮고 일어섰다.
“선호 동지 소식은 알게 되는 대로 전해 줄 테니 선희 동무나 늙은 사냥꾼에게 놀아나지 않도록 조심하시라요.”
선희는 은영이 사라질 때까지 은영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나무' 밑으로 걸어갔다. 선희는 선호와 서 있던 그 자리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무가 바람에 흔들렸다. 나뭇가지에 쌓여 있던 눈들이 얼굴 위로 떨어졌다. 볼을 덮은 눈이 따뜻하게 녹아내렸다.
“그래, 우리 같은 사람들은…,”
선희는 눈을 감고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중얼거렸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선희, 괜찮아?”
누군가가 선희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