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7장 1958년 모스크바
세르게이가 선희 앞에 서 있었다.
“괜찮아.”
선희가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학장실로 오라는데.”
세르게이가 말을 전하고는 아직 할 말이 남은 듯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쉬고는 돌아섰다. 이번엔 선희가 세르게이를 불러 세웠다. 세르게이가 돌아봤다.
“세르게이, 왜 나를 이제 ‘조선희’라고 안 부르고 선희라고 부르지?”
세르게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은영이 그러는데 조는 성이고 선희가 이름이라며? 친구끼리는 이름 부르는 거 아닌가?”
선희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힘내, 선희.”
세르게이가 웃으며 가볍게 윙크를 했다. 세르게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선희가 중얼거렸다.
“스파시바, 세르게이. 고마워, 세르게이”
학장실로 통하는 비서실 문은 열려 있었다. 언제나 굳게 닫혀 있던 육중하고 높은 문이었다.
선희는 그곳에 설 때마다 알마티의 성 문이 생각났다. 구름에 가려 그 끝을 알 수 없었던 성벽. 선희는 숨을 크게 내쉬고 노크를 하곤 했다. 이미 선희가 올 것을 알고 있던 비서는 자신의 초라한 능력이 그것뿐이라는 듯, 한참을 대답하지 않고 선희를 문 앞에 세워놓곤 했다. 한두 번은 다시 노크를 했지만 어느 날부터 선희는 노크를 한 후,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 앞을 어슬렁거렸다. 몇 번은 들어오라는 소리를 듣지 못해서 비서가 문을 열고 나오기도 했다.
열린 문을 두드리고 선희는 비서실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도 없었다.
선희가 들어서면 비서는 선희를 책상 앞에 세워 두고 자신이 주는 것인 양 생색을 내며 흰 봉투를 건넸다. 그 봉투에는 마스터가 보낸 한 달 치 생활비가 들어 있었다. 그 봉투를 볼 때마다 알마티에서 이반이 건네주던 동전 주머니가 생각났다.
비서 책상 맞은편에 놓인 낮은 의자 위엔 학장을 만나러 온 사람들이 순서를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많을수록 이번 달 생활비라고 말하는 비서의 목소리가 커졌고 돈 봉투를 던지는 손동작도 커졌다. 한 번은 돈 봉투가 바닥에 떨어졌다. 허리를 숙여 돈 봉투를 집는 선희의 머리 위로 비서의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선희는 고개를 들고 비서를 노려보았다. 비서는 허둥거리며 고개를 돌렸고 이만 가보라고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텅 빈 비서실에 들어서고 나서야 오늘은 생활비를 받는 날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슨 일일까?’ 선희는 비서 책상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여기에 앉아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했었는데. 의자에 앉은 선희는 무릎보다 낮아진 엉덩이가 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허리는 저절로 구부러졌고 머리를 세우려니 목이 꺾였다. ‘그래서 여기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초라해 보였구나.’ 교수나 학생이었을 그 사람들은 이 의자 위에서 팔로 무릎을 감싸고 벌서는 아이처럼 앉아 있었다. 작은 의자 하나로 사람들 기선을 제압하는 교묘한 방법 같았다.
‘아! 세르게이’, 이 방에서 마주쳤던 세르게이가 생각났다. 세르게이는 두 다리를 쩍 벌리고 머리를 벽에 기댄 채 반쯤 누워 있었다. 선희가 들어서자 세르게이는 그곳에서 선희를 만난 것이 너무도 반갑다는 듯 눈이 커졌고 손까지 올려 인사를 했다. 세르게이를 못마땅하게 쳐다보고 있던 비서가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면 세르게이는 일어나 선희를 안았을지도 모른다.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선희는 쓸쓸하게 웃었다. 그때, 쿵 소리가 나면서 학장실 문이 열렸다. 문에 뒷머리를 부딪친 남자가 급하게 일어났고 열린 문 틈 사이로 말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러게 잘 감시하라고 했잖아.”
“편지에 별 말이 있어서….”
“너 같으면 연애한다고 아버지한테 떠들고 다니겠느냐?”
멱살을 잡힌 듯 캑캑거리던 남자가 애원을 했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제발.”
“이런, 이런.”
다른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멱살잡이에서 풀려난 듯 남자가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뭘 그렇게 겁을 먹나? 난 가치 있는 인생한테만 관심 있어”
선희는 학장실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어딘지 익숙했다. '혹시?' 비서가 뛰어 들어왔다. 비서는 선희를 발견하고는 멈칫거렸다. 그 뒤로 학장이 쫓아 들어왔다. 학장이 선희를 보고는 헛기침을 했다. 비서는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선희 앞을 지나가더니 열려있는 학장실 문에 노크를 하고 말했다.
“조선희 알렉산드로브나 데니소프 양이 왔습니다.”
선희는 길어진 자신의 이름을 들으며 천천히 일어나 옷을 정리하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한 남자가 흐트러진 머리와 옷을 정리도 하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선희가 들어가자 남자는 힘겹게 일어서더니 선희에게 가볍게 인사를 했다. 남자가 흐리멍덩한 눈으로 학장의 책상 쪽을 바라봤다.
책상 옆에 한 사내가 뒷짐을 진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짙은 검은색 코트 밑으로 마르고 단단한 몸이 드러났다. 윤기 나는 흰색 머리카락과 손가락에서 반짝이고 있는 푸르고 시린 반지. 선희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사내가 몸을 돌려 선희를 쳐다보며 말했다.
“오, 조선… 희. 그동안 잘 지냈느냐?”
선희를 노려보는 눈빛만큼 또렷한 조선어. 마스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