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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려 Oct 05. 2024

눈보라

제5부 2장 1958년 카자흐스탄 알마티

  이반이 기차에서 내리는 선희를 보고 달려왔다. 꾸벅 인사를 하고는 선희의 가방을 낚아챘다.

  “이반 이바노비치.”

  무심결에 뱉은 소리가 인사를 대신했다.

  “이반이라고 부르십시오.”

  이반이 돌아섰다.

  “셀레나.”

  다시 무의식적으로 셀레나라는 이름이 선희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반이 그대로 멈춰 섰다. 선희는 숨을 크게 내쉬고 생각을 정리하며 말했다.

  “셀레나가 찾아왔었어요.”

  이반의 등이 딱딱하게 굳었다.

  “잘…, 잘 지내고 있다고 했어요.”

  눈보라가 세차게 내리쳤다.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선희와 이반의 옆을 서둘러 지나갔다.

  “다행이라고 하시면서…,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셀레나가 입으로 말하지는 못했지만 선희는 분명히 보았고 들었다. 셀레나의 눈동자에 가득 차오르던 그 두 마디를…. 그제야 선희는 셀레나가 건네주었던 사과 두 알을 이반에게 건넸다. 한참을 그대로 서 있던 이반이 말을 뱉었다.

  “마스터께서 기다리십니다.”

  이반이 뒤뚱거리며 역을 빠져나갔다.

  11년 전 어린 선희가 주름이라고 생각했던 이반의 상처는 더욱 깊어져 있었고 누군가에게서 뺏었다던 가죽조끼는 더욱 끈끈하게 이반의 몸에 들러붙어 있었다. 이반이 발을 내디딜 때마다 손에 들린 가방이 땅에 끌렸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이반의 뒷모습을 보면서 선희가 중얼거렸다.

  ‘가치 없는 인생이란 것도 있을까? 그럼 그 가치는 누가 정하는 것일까?’

  선희의 질문에 셀레나가 눈물을 글썽이며 선희 앞을 가로막았다. 셀레나의 눈물은 눈발이 되어 거세게 내리쳤다.     

  마차 옆에 이반이 서 있었다. 알마티를 떠날 때와는 달리 지붕이 덥힌 마차 브리츠카였다. 트로이카를 선두에서 끌 가운데 말이 발을 가볍게 굴렸다. 이반이 마차 문을 열고 가방을 넣었다. 두 손을 받친 이반이 선희에게 타라는 몸짓을 했다.

  “먼저 아버지한테 가겠어요.”

  선희가 마차 앞에 서서 말했다. 무표정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던 이반의 입이 잠시 실룩거렸다. 얼굴의 흉터가 심하게 일그러졌다.

  “말 한 필만 부탁할게요.”

  선희가 말했다.  

  “마스터께서 기다리십니다.”

  오직 그 말만을 허락받은 듯 이반이 같은 소리를 했다.  

  “이바안!”

  선희가 이반을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선희의 성난 목소리에 이반이 흠칫 놀라며 눈을 가늘게 뜨더니 굽신거렸다. 선희는 말을 뱉는 순간, 그 소리가 11년 전 마스터가 이반을 부르던 소리와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반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화가 났다. 

  이반이 마차 앞으로 뛰어가 세 마리 말 중 가운데 검은 말의 고삐를 풀어 선희 앞으로 끌고 왔다. 선희가 이반의 손에서 고삐를 낚아챘다. 선희는 한숨을 쉬고 말을 쓰다듬었다.

  “자, 이제 아버지한테 가자.”

  말에 오른 선희가 눈보라를 헤치며 달려 나갔다. 이반은 선희의 모습이 사라진 후에도 한참을 그대로 눈보라 속에 서 있었다.     


  눈보라가 마을을 휘감았다. 어두워진 하늘 위로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눈보라가 뒤엉켰다. 선희의 집은 그대로 그곳에 있었다. 말에서 내린 선희는 마당에 들어서지도 못하고 방문을 바라보았다.

  “아, 아버지.”

  눈물을 삼켰다. 12년 만이었다. 아버지도 많이 늙으셨겠지. 방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놀라 뛰어나오시겠지. 하지만 선희는 꿈을 꾸는 것처럼 목이 메어 아버지를 부르지도 못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개들이 요란하게 짖었다. 하늘을 휘감아 돌던 눈보라가 선희를 내리쳤다. 개들 짖는 소리가 멈추지 않자 방문이 열렸다. 한 남자가 “누구요?” 물었다. 아버지가 아니었다. 선희가 놀라 다가서는데 뒤에서 누군가 선희를 불렀다.

  “거기 혹시? 선희? 너? 혹시 선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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