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 4장 1958년 카자흐스탄 알마티
선희는 12 년 전의 기억과 검은 말에 의지해 언덕을 올랐다. 희미한 빛 한줄기가 이반의 방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말에서 내린 선희는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말에게 기댔다.
“오늘 수고했어.”
말이 푸르르 몸을 떨었다. 선희는 힘겹게 돌아서서 마스터의 성을, 아니 성당을 쳐다봤다. 12 년 전, 크고 두렵게만 느껴졌던 성당이 지금은 한없이 초라하게 보였다. 선희는 그날처럼 차갑게 얼어붙은 성당의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끼이익, 그날처럼 문에 새겨진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문이 열렸다. 밤과는 다른 어둠이 흘러나와 선희를 감쌌다. 선희는 어둠을 가르고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때처럼 회당 끝에 마스터가 앉아 있었다. 선희를 바라보고 있던 마스터의 눈빛이 촛불을 따라 이글거렸다. 선희를 살펴보던 마스터가 선희가 자신이 바라던 모습이 아니란 걸 깨닫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오, 조선 희, 잘 다녀왔느냐?”
마스터가 실망스러운 마음을 숨기며 과장되게 말했다. 선희가 원망과 분노가 뒤섞인 눈으로 마스터를 노려봤다.
“선희야.”
마스터가 씩 웃으며 선희를 불렀다. 여태까지 들어 본 적 없는 자상한 목소리였다.
“인생 사냥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아니?”
인생 사냥이란 말에 선희의 가슴이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증오.”
마스터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거기에 죄책감이 더해지면, 완벽하지!”
마스터가 손뼉을 치며 일어섰다.
“선희야, 너도 알고 있었잖니.”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까닥거리며 마스터가 선희에게 다가왔다. 선희의 표정을 살피던 마스터가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아버지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너도 알고 있었잖아? 그러면서도 너는 너의 출세를 위해 아버지를 외면하고…. 더 가증스러운 것은 아버지가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척 편지를 계속 보내?”
마스터가 이빨을 드러내며 비웃었다. 선희가 고개를 저었다. 선희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마스터는 선희의 표정에서 선희가 아버지의 죽음을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마스터가 부들부들 떨면서 소리를 질렀다.
“소피아!”
‘소피아? 레닌그라드 기숙학교의…?’ 선희는 기억을 더듬었다.
“끝내 일을 이렇게 망쳐?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건만…. 그년이 자기가 말하겠다고 나설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마스터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 위로 어디선가 자장가가 들려왔다.
“잘 자라 나의 아름다운 아가. 자장자장.”
‘소피아 선생님?’ 선희는 불현듯 12년 전의 레닌그라드로 빨려 들어갔다.
‘그래, 소피아 선생님이었어.’
그날 밤. 선희 앞에 소피아가 서 있었다. 레닌그라드의 기숙학교. 번개가 내리치고 천둥소리가 건물을 흔들던 밤. 바바야가한테 잡혀갈까 무서워 이불을 끌어안고 잠들지 못했던 밤. 소피아가 선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희는 울지도 못하고 두려움에 몸을 떨며 소피아를 마주 보았다.
손에 들린 호롱불에 소피아의 얼굴이 일렁거렸다. 천둥 번개가 내리쳤다. 아이들이 소리를 질렀고 몇몇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선희를 쳐다보던 소피아가 숨을 크게 내쉬더니 주위를 둘러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얘들아! 어떤 바바야가는 아이들을 잡아먹기도 한다지만 어떤 바바야가는 사람들을 도와준단다. 옛날 옛날에, 아주 아름다운 신부가 있었는데 신랑이 못된 여왕의 마법에 걸려서 떠나버린 거야.”
아이들이 하나둘 얼굴을 내밀고 소피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소피아가 아이들을 돌아보며 한 아이, 아이에게 미소 지었다.
“그 아름다운 신부는 신랑을 찾아 떠났지.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다시 산을 넘다가 바바야가를 만났어. 신부는 무서웠지만 신랑을 찾기 위해 용기를 냈어. 자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러 가야 한다고 바바야가에게 당당하게 말했지. 바바야가는 그 신부에게 신랑의 마법을 풀어줄 방법을 가르쳐 주었단다. 신부는 신랑의 마법을 풀었고 둘은 행복하게 살았지.”
소피아의 목소리가 방 안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갔다. 울던 아이들이 눈물을 닦았고 소피아가 따스하게 웃어주었다.
“얘들아, 너희는 어떤 바바야가를 만나고 싶니? 오늘 밤 너희가 어떤 바바야가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밤새 너희는 바바야가한테 쫓겨 다닐 수도 있고 바바야가의 도움으로 보고 싶었던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어. 어떤 바바야가를 선택할지는 오롯이 너희들한테 달려 있단다.”
말을 마친 소피야가 조용히 자장가를 불렀다.
“잘 자라 내 어여쁜 아가
조용한 달빛이 선명하게
너의 요람을 비추는구나
동화를 들려줄게
노래를 들려줄게
눈을 감고 자거라
자장자장
나는 타향에 떨어진
너를 그리워하고
너는 외로워하겠지
동화를 들려줄게
노래를 들려줄게
잘 자거라
너의 일은 잊은 채로
자장자장
-코사크의 자장가 중에서”
선희는 처음 듣는 노래였지만 거기 있던 아이들 대부분에게는 누군가가 불러주었을 따뜻한 자장가였다. 소피아는 자장가를 다 부르자 호롱불을 내려놓고 선희 옆에 앉았다. 한동안 선희를 바라보던 소피아는 무슨 말인가를 혼자 삼켜버리고는 선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선희야, 너는 소중한 사람이란다. 그것을 잊지 마라.”
소피아 선생의 눈빛은 슬프고 따뜻했다.
‘왜 이제야 기억이 난 것일까? 이렇게 소중한 기억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선희는 다시 마스터의 성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