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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려 Oct 05. 2024

사냥

제5부 3장 1958년 카자흐스탄 알마티

  전주 댁이었다.

  “아줌마.”  

  “아이고 선희야.”

  전주 댁이 달려오자 방 안에 있던 남자는 헛기침을 하고 문을 닫았다. 전주 댁이 선희를 안고는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선희, 우리 선희, 맞구마잉.”

  전주 댁이 선희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전주 댁의 장갑에 붙어 있던 눈들이 부슬부슬 떨어져 나갔다.

  “선희야, 아이고. 선희야.”

   전주 댁이 선희의 얼굴을 보다가 선희를 끌어안았다.

  “아이고, 선희야. 이 멀쩡한 걸 왜 죽었다고 했을까잉?”

  “죽었다고요?”

  “그놈의 이바노무새끼가 돌아와서는 니가 기차에 깔려 죽었다고잉….”

  선희가 전주 댁의 품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흔들었다.

  “좋다고 달리다가 넘어져서 손 쓸 새도 없었다고 얼마나 자세하게 얘기하던지….”

  눈물을 글썽이던 전주 댁이 일어나 선희의 손을 잡아끌었다.

  “추우니께, 우리 집에 가서 이야기하자.”

  “아버지는요? 아버지는 어디 계세요?”

  전주 댁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아직 모르냐?”

  “뭘요? 뭘요?”

  선희의 소리가 하늘에 가득 퍼졌다. 개들이 더 크게 짖어댔다. 전주 댁이 돌아서서 선희를 바라보았다. 전주 댁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너 죽었다는 말 듣고 며칠 있다 돌아가셨스야.”

  선희가 머리를 흔들었다. 선희의 털모자가 벗겨져 눈 위에서 뒹굴었다.

  “아니에요. 그럴 리 없어요.”

  전주 댁이 선희를 안았다.

  “우짜슬까잉.”

  “그럴 리 없어요. 내가 잘 있다고 편지 썼는데? 나 잘 살아있다고 계속 편지 썼는데?”

  “편지? 무슨 편지?”

  전주 댁이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아버지한테도 쓰고…. 어, 그래요. 최 선생님, 최 선생님한테도 쓰고.”

  선희의 눈이 전주 댁에게 물었다. 전주 댁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선희가 일어나 말고삐를 잡았다.

  “이 눈보라에 어딜 갈라고잉?

  “최 선생님한테. 최 선생.”

  선희가 전주 댁의 손을 뿌리치고 말에 올라탔다.

  “최 선생, 시내로 이사 갔어야.”

  전주 댁이 선희 뒤에서 소리를 질렀다.     

  시내로 들어선 선희는 굳게 닫힌 관공서 문을 부서지게 두드렸다. 수위가 나왔고 선희는 자신의 길어진 이름을 또박또박 불러줬다. 선희의 서슬에 놀란 수위가 담당 직원에게 전화를 했고 달려온 직원은 한참 서류를 찾다가 선희를 최 선생 집 앞에 데려다주었다.

  새로 지은 3층짜리 아파트 계단을 올라갔다. 한 층 한 층, 올라서며 선희의 분노도 커져갔다. 벨을 누르자 최 선생의 아내 남천 댁이 '누구세요? '하며 문을 열었다. 선희를 본 남천 댁이 뒤로 넘어지며 중얼거렸다.

  “선희야.”

  “누구라고?”

  최 선생이 방 안에서 나왔다. 선희를 본 최 선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선, 선희야. 온다는 소리 못 들었는데….”

  최 선생의 말을 듣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말을 달려오면서 마지막으로 붙잡고 있던 믿음이 검게 타버렸다. 선희가 최 선생을 노려보며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최 선생은 선희의 눈을 마주하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이바노비치가 시켰다. 이바노비치가.”

  엎드려 있던 남천 댁이 중얼거렸다.

  이반. 기차역에서 뒤뚱거리며 걷던 이반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가치 없는 인생이란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선희는 쓴웃음을 흘리며 최 선생을 노려보았다. 최 선생이 뒤로 넘어지며 주저앉았다.

  “너한테 편지가 왔을 땐 이미 네 아버지는 죽었어.”

  최 선생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선희는 최 선생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았다.

  “정말이다, 선희야, 정말이야.”

  남천 댁이 고개도 못 들고 양손을 부여잡은 채 몸을 앞, 뒤로 흔들며 말했다.

  ‘이런 인간들, 정말 싫어.’ 선희가 그들을 보며 비웃었다. 자신이 가진 조그마한 힘으로 그것마저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 커다란 구더기에 붙어사는 버러지만도 못한 인간들. 선희가 허리를 숙여 주저앉은 최 선생을 보며 말했다.

  “가치 없는 인생이란 게 있구나.”

  최 선생의 눈에 공포가 차올랐다. 선희는 그 눈을 바라보며 솟아오르는 희열을 느꼈다. 온몸을 짜릿하게 파고드는…, 쾌락!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힘이 선희를 타고 흘렀다. 짜릿한 웃음이 흘렀다.

  “선희야, 선희….”

  선희의 눈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최 선생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대로 얼어버렸다. 선희의 얼굴이 추하게 일그러졌고 최 선생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사라져 갔다. 선희와 남편을 번갈아 가며 보던 남천 댁이 소리를 질렀다.

  “마스터가 시켰다. 마스터가 시켰다고.”

  선희가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마스터, 마스터. 그놈의 마스터면 다 되는 줄 알아!”

  선희 뒤로 방문이 열렸다. 선희가 뒤 돌아보자 남천 댁도 선희의 시선을 따라갔다. 10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가 열린 문 틈 사이로 선희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남천 댁이 힘들게 말을 뱉었다.

  “선영아, 괜찮아. 들어가 있어.”

  “그래, 선영아. 얼른 문 닫고 들어가.”

  최 선생이 정신을 수습하며 애원했다.

  “제발, 선영아…. 들어가 있어.”

  남천 댁이 선영을 노려보고 있는 선희를 보며 울먹였다. 선영의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반짝였다. 동시에 방 문 옆 벽에 걸려 있던 거울이 반짝거렸다.     

  “선희야, 마법사가 처음부터 마법사였을까?”

  선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들 자기 자신이 마법에 걸린 백조라고 생각하지.”

  모스크바 강의 검은 심장이 출렁거리며 선희 앞에 나타났다.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창백한 얼굴, 그리고 초점 없는 눈동자.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선희는 한동안 노려보았다. 다시 선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속에 비친 악마가 나라는 걸 알았을 때….”

  선희는 탁자 위를 더듬었다. 손에 잡히는 물건을 아무거나 집어 들어 거울에 던졌다. 거울 속의 선희가 산산조각 났다. 선영이가 뛰어나와 엄마의 품에 안기며 울었다. 남천 댁은 선영을 안고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이 아이는 죄가 없다. 아무 죄가 없다. 정말이야.”

  최 선생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내가 잘못했다. 선희야. 내가 잘못했어.”     

  선희는 집 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때 나는 악마였어.”

  선호의 목소리가 선희 뒤를 쫓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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