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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려 Oct 05. 2024

알마티

제5부 1장 1958년 카자흐스탄 알마티

  마스터가 건네준 통행증은 강력했다. 하지만 선희는 누군가가 자신을 다시 레닌그라드나 모스크바로 쫓아버릴 것 같았다. 기차를 갈아탈 때마다, 경찰이나 군인의 검문을 받을 때마다 선희는 떨리는 모습을 숨기느라 애를 썼다. 그리고 걱정하던 일이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일어났다.

  기차가 연착을 했다. 선희는 알마티로 가는 열차로 갈아타기 위해 뛰어야 했다. 열차 문 앞에서 숨을 돌리고 있는데 병사 하나가 통행증을 요구했다. 급하게 주머니에서 통행증을 꺼낼 때였다. 젊은 대위 하나가 어슬렁거리면서 다가왔다.

  “카레이스키?”

  대위는 병사와 선희를 번갈아 보며 입 꼬리를 올렸다. 삐딱하게 눌러쓴 군모 사이로 대위의 떡 진 금발머리가 보였다.

  “이렇게 곱게 차려입고 어딜 다녀오시나? 어떤 높은 분, 첩이라도 되시나?”

  대위는 떡 진 머리처럼 기름기 흐르는 눈빛으로 선희의 몸을 훑었다. 선희는 주머니에서 손을 떼고 허리를 폈다. 그리고 대위를 노려보며 대놓고 비웃었다. 대위가 잠시 움찔하더니 입을 삐죽거렸다. '이 년이…?'라는 말이 대위의 이 사이로 새어 나왔다. 기차가 기적을 울리고 바퀴를 굴리기 시작했다.

  “내 이름은 조선희 알렉산드로브나 데니소프.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 데니소프의 양녀다. 내가 이 기차를 타지 못하면 당신은 많이 힘들어질 텐데?”

  대위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선희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얼굴빛이 하얘지기 시작한 대위가 병사에게 손짓을 했다. 병사가 기관차 쪽으로 뛰어갔다. 선희에게서 통행증을 받아 펼친 대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런 얼굴 어디서 봤더라?’ 선희가 기억을 더듬는 사이 기차가 쉬익, 김 빠지는 소리를 내더니 막 굴리기 시작한 바퀴를 멈췄다. 기차 안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며 하나둘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대위가 허리를 펴고 경례를 했다.

  “이름? 소속?”

  통행증을 돌려받으며 선희가 물었다.

  “니콜라이 일리치….”

  선희가 손을 저으며 대위의 말을 끊었다. 뛰어 돌아오던 병사가 선희 옆에 차렷 자세로 멈춰 섰다. 선희가 둘 사이를 걸어 나갔다.

  “아, 니콜라이.”

  선희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며 대위에게  말했다.

  “괜한 병사 붙잡고 괴롭히지 마.”

  대위의 눈을 노려보며 선희가 다시 비웃었다. 

  “다 네가 잘못한 거니까.”

  선희는 무심하게 한마디를 던지고 기차에 올라탔다.

  객실에 들어서자 승객들이 선희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어색하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굴었다. 선희가 자신을 쳐다보지 않기를 바라는 표정들이 역력했다. 자리를 잡고 앉자, 긴장이 풀리면서 화가 치밀었다. 마스터가 손뼉을 치면서 웃을 것 같았다. 파란 눈을 반짝거리며 선희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것 봐라, 조선희. 권력이란 그런 거야. 달콤하지 않으냐?”

  눈을 꼭 감고 생각을 지웠다. 허리를 펴고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여행을 자주 하는 사람처럼 보여야 한다. 가장 좋은 옷을 골라 입고 항상 강하고 단정한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모스크바를 떠나오기 전 은영이 가르쳐 준 것들이었다.

 “틈만 보이면 파고들려는 버러지 같은 놈들이 많아서 말이지.”

  말하며 웃던 은영이 생각났다. 은영은 영하 20도가 넘는 날씨에 벤치에 앉아 책을 펴고 선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능하다면 선호에게 소식을 전해주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선희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선호의 이름이 새겨진 만년필을 쥐었다.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통로 건너편에 앉아 있던 카자흐 여자 아이 하나가 선희를 빤히 보고 있었다. 선희가 눈을 맞추며 웃어주었다. 아이가 마주 웃었다. 선희를 의식한 아이의 아버지가 딸을 돌려 안았다. 아버지의 얼굴은 떨렸지만 강해 보였다.

  ‘저 아버지는 자신의 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지?’

  그 무슨 일에 아버지의 양심이 시험당하지 않기를…, 그리고 아버지와 딸이 헤어지지 않기를…, 선희는 바랐다.     

  가방 속에서 사진 한 장과 쇳조각을 꺼내 가방 위에 올려놓았다. 사진 속 어머니가 어느덧 자신보다 어려 보였다. 뿌연 사진 속에서 어머니의 얼굴을 새겨보았다. 아버지는 선희가 엄마를 닮았다고 했다. 아버지가 건네준 쇳조각을 쓸쓸하게 쓰다듬었다.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선희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12년 전, 기차가 역에 멈출 때마다 어린 선희는 뛰어 나가 주위를 둘러보곤 했다. 자신이 가보지 못한 어딘가에 어머니가 묻혀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레닌그라드에 도착한 지 3년이 지난 후였다.

  수업시간, 지리 선생이 펼친 지도에 광활한 소련 땅이 나타났다. 지도를 한참 더듬고 나서야 아버지가 떠나온 블라디보스토크는 동쪽 끝이고 어린 선희가 있는 레닌그라드는 북쪽 끝, 그리고 카자흐스탄은 서쪽 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상의 끝과 끝, 그 사이에서 갈라진 또 다른 길의 끝 어딘가에 어머니가 묻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린 선희는 마음이 시렸다.

 선희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세상 끝에 놓여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리고 선호도….

  덜컹거리는 기차 창밖으로 눈이 날리기 시작했다. 알마티에 다가갈수록 눈발이 거세졌다. 눈보라가 해를 삼켰다. 레닌그라드의 겨울처럼 한 낮인데도 어두웠다. 아버지를 떠나오던 날, 얼굴을 할퀴던 눈보라가 생각났다. 호롱불에 일렁거리던 검은 그림자. 문을 열어 놓고 선희를 쳐다보던 아버지의 실루엣이 가슴속을 저며 왔다. ‘눈보라가 아버지를 할퀴지 말았어야 하는데….’ 기적 소리가 선희의 가슴을 찢을 듯이 울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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