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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현 Dec 11. 2021

기록하기, 기억하기

소설 <아우스터리츠>를 읽고 적어 내린 기록들

존재를 상실한 인격의 몰락

 나의 할아버지의 고향은 그어진 선 넘어 어딘가 위치한다. 13살의 나이로, 홀로 남한 땅을 밟은 그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지방을 전전하며 살았던 그의 유년 시절에는 ’ 살아왔다 ‘라는 말보다는 ’ 버티고 생존했다 ‘라는 서술이 더 어울릴지 모른다. 버티고 생존한 삶의 과정이 어떠했을지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자기 자신의 힘으로만 일어서야 했던 그는 본능적인 생존 의지가 강했다. 다행히도 세상은 그에게 가혹한 삶만을 선물하진 않았다. 군인로서의 삶은 안정된 생활을 보장해주었지만, 그것이 내면의 그리움과 서글픔을 완벽히 덮지 못했다. 결국, 기억의 조각을 찾던 중, 그 조각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혈육과 마주한다. 명확히 말하면 육촌지간이었지만, 낯선 곳에서 처음 만난 가족이었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그에게 안정된 삶은 더는 유의미하지 않았다. 어디서도 느낄 수 없었던 진정한 소속감. 그 하나만을 이유로, 가족 곁에서 평생을 일하겠다는 이유만으로, 공장 관리자로서 30년의 세월을 가족의 그늘 아래서 헌신한다.


 만남과 이별은 공존한다. 평생이라는 단어는 가변적이다. 유일한 혈육이었던 이가 먼저 세상을 떠날 것이라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그 이후, 그는 소속감과 동시에 정체성을 잃고 말았다. 이는 남은 가족들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공허와 상실의 깊이는 깊어져만 갔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주던 이가 사라졌다는 공허와 상실이었다. 내 눈에는 누구보다 단단했던 사람 대신, 끝없이 무너져내리는 인간 형상이 자리 잡았다.


 나는 존재성을 상실한 인격의 몰락을 수개월 동안 목격한 것이다.


 ' 시간이란 인간의 모든 발명들 중에서 단연 가장 인위적인 것이며, 자신의 축을 자전하는 행성들과의 연관성에서 보면 어떤 계산보다도 훨씬 더 자의적인 것으로, 우리가 스스로를 맞추는 태양일은 정확한 척도를 제시할 수 없는 까닭에 시간 측정이란 목적을 위해서도 운동 속도가 변하지 않고 회전 궤도에서 적도를 향해 기울어지지 않는 환상적인 평균 태양을 생각해 내야만 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라도, 나무들의 성장과 석회석이 부식되는 기간에서 출발하는 계산만큼이나 자의적이라고 아우스터리츠는 그리니치의 천체 관측실에서 설명했다 ‘ - (출처: <아우스터리츠>, W.G. 제발트, 을유문화사 PG.113)


 이렇듯 아우스터리츠는 길고 긴 문장을 통해 표준시의 중심이 되는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시간의 인위성을 역설한다. 자신이 잃고 살아온 기억, 외면했던 역사, 마주해야 할 진실, 그 모든 것이 뒤엉킨 순간들을 시간이라는 절대적 기준으로 구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했던 그가 헌신한 30년의 세월. 자신의 정체성을 찾은 그 기간 가운데서 30년이라는 수치는 그저 인위적인 문자에 불과할 뿐, 큰 의미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생각의 이면

 고통스러운 기억과 마주하는 것은 어렵다. 회피와 그의 장례식 이후의 일기 작성에는 큰 감정의 소모와 그에 따른 긴 시간이 수반되었으며 여전히 그것을 읽는 행위는 두렵다. 그의 삶과 그 속의 수많은 파편을 알고 이해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의 기억 속에는 장난스럽게 알파벳 문제를 내던, 신문을 좋아하던, 집에 궂은일을 도맡아 하던, 고향의 풍경에 관해 이야기해주던, 끝까지 고통을 숨기려 노력하던 그의 모습이 조각으로 흩어져 남아있을 뿐이다.

 이 글을 쓰는 과정도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꼭 기록을 통해 남기고 싶었다. 그것이 현재의 내가 할 수 있는 행위이다.

 당신의 고통과 감정을 이해하고, 그것을 글로 기록할 수 있을 정도의 단단함을 가지게 되었다고 전하고 싶다.




* 첫 소제목인 ’ 존재를 상실한 인격의 몰락'은 논문 '기억 담론으로서의 자전소설: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와 마론의 『파벨의 편지』, 제여매'에서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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