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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제 Jul 20. 2021

입장 바뀐 학생이 바라보는 교사들의 태도

시선과 관심의 공정한 배분은 생각보다 더 중요할지도 몰라

선생님의 신뢰하는 눈빛, 칭찬의 말, 대견해하는 표정이 생각난다. 그게 너무 좋아서 다른 아이들보다 더 많이 받고 느끼고 싶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칭찬받고 싶어서 학생으로서의 본분이라고 할 수 있는, 선생님의 눈에 띄기 가장 확실한 방법인 높은 성적을 얻었고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성취감이 인생의 최우선 가치인 줄 알았던 때였고 선생님들의 관심은 내게 좋은 자극이자 동기부여가 되었다.     


그런데 내 옆에 있는 아이는 어땠을까.     


고1때 한국사 수업 과제로 역사 UCC 만들기 활동이 있었다. 필수는 아니고, 어떤 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영상을 만들어서 내면 일단 대회 수상 여부와 무관하게 생기부 과목별 특기사항으로 한 줄 적히는 활동이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인문계 일반고등학교였는데 그 동네 다른 학교들에 비해 대학 진학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 쉽게 말해 중학교 때 공부를 잘했거나 고등학교 때 열심히 할 생각을 가진 학생이 가는 곳으로 알려진 학교였다. 나는 중3때 특목고 입시에서 떨어지고 집에서의 거리와 학교에 대한 평판 두 가지 측면에서 가장 적당한 곳을 골라 진학했다. 아무튼 간에 그런 학교였던 만큼 1학년 때부터 생기부 한 줄을 위해 무언가 과제를 자원해서 할 만한 친구를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는 소리다.


친구네 집에서 밤늦게까지 씨름하며 만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는 지금처럼 유튜브 전성시대가 오기 전이었고, 우리가 다룰 줄 아는 건 윈도우에 기본 프로그램으로 깔려 있는 무비메이커였다.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자료조사를 해서 내용을 정리하고, 하단에 워터마크가 새겨져 있지 않고 화질도 봐줄만한 정도의 이미지 자료를 고르고 마지막엔 배경음악을 삽입하며 완성했다. 지금 같으면 유튜브 브이로그에서 많이들 사용하는 무료 음원을 다운받아 썼을 것 같은데, 말했다시피 그때는 유튜브가 지금처럼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고 우리는 벅스에 들어가서 영화 OST로 쓰인 가사 없는 배경음악을 몇 백원 주고 다운받아 사용했다. 영상의 주제가 연평도 포격사건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현우 배우가 나온 영화 <연평해전>의 테마곡 중에서 진지한 분위기에 맞는 것으로 골랐다. 하나 골라서 다 만든 영상에 삽입해봤는데, 우리가 영상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 마치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김상중 씨가 “그런데 말입니다”라고 말할 때처럼 - 분위기 환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에서, 배경음악의 노래도 잠시 조용해졌다가 웅장해지는 소리를 냈다. 내용과 음악이 우연치 않게 너무 잘 맞아떨어져서 영상을 완벽하게 잘 만들어냈다는 뿌듯함에 친구와 얼굴을 마주보며 신나했었던 것 같다.


제출을 하고 나서, 한국사 시간에 수업이 끝나고 잠깐 남는 시간이었던가, 선생님께서 교탁에서 우리에게 영상에 대해 말씀하셨다. 일단 맨 처음 접한 소식은 아쉬운 소식이었는데, 기본적으로 ‘역사’로 다뤄지기 위해서는 어떤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 50여 년 정도는 지나고 나서야 어느 정도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해지기 때문에 우리가 만든 연평해전을 주제로 한 영상은 대회에서 심사 대상이 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우리에게 미리 그 부분에 대해 안내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심심한 사과와 함께, 영상을 만드느라 고생했을 우리를 칭찬하고 위로해주시는 말씀을 건네셨는데, 그 칭찬하는 포인트 중 하나가 다름 아닌 배경음악이었다. “음악도 영상이랑 맞게 하느라 고생했을 텐데”라고 말씀하시며 선생님은 나와 눈을 마주치셨다.


  동시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 우리 생각보다 고생  했는데, 그냥 얻어 걸린 거였는데. 음악이 영상이랑 타이밍이 기가 막히긴 했지. 물론 영상을 만드느라 고생한  맞지만 음악의 타이밍은 그저 우연이었다. 어찌됐건  순간 음악 재생 시간이 영상 재생 시간과  맞은 것에 대해 다시   기뻐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선생님의 시선이 순간 내게 쏠린 것으로 인한 생각이었다. 선생님이 정확하게  눈을 바라보고 있을  , 자기가 아닌 다른 학생에게 쏠린 선생님의 눈을 바라보고 있을 친구의 모습을 상상했다. 무표정한 친구의 모습을 상상했다. 내가   앞쪽에 앉아 있었고 분단도 친구랑  멀리 떨어져 있던 걸로 기억한다. 선생님이 눈동자를 좌우로 동시에 뻗어나가게   있는 능력자가 아닌 이상 그렇게 짧은 말을 하면서  사람 모두에게 눈빛을 배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기억은 과거의 것이지만 기억을 소환하는 나는 현재에 있다.

현재의 나에 따라 과거의 기억을 해석하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소리다.     


교사가 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던 중고등학생 때보다, 임용고시를 계획하고 있는 지금 전공수업을 하는 교수들의 모습을 보면서 교수자로서의 내가 지녀야 할 자질이나 태도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어떤 교수님은 수업을 들을 때마다 이런 교수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드는가 하면, 어떤 교수님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모습을 숱하게 보여주는 분도 있다. 그리고 어쩌다 그런 교수님으로 인해 마음에 작은 상처라도 입게 되는 날이면, 즐겁고 행복한 순간보다 슬프고 괴로운 순간이 마음에 더 깊은 자국을 내는 이유로 비난하고 힐책하고 싶은 교수님의 모습을 더 자주, 오래 곱씹게 된다.


사실 ‘교수님’한테 성인 학습자인 대학생이 ‘상처’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 좀 웃기다. 그만큼 내가 그 교수님을 좋아하거나, 수업에서 잘 하고 싶은 열의가 더 크다는 뜻일 텐데 둘 중 무엇이 더 답에 근접할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간에 내가 싫어하는, 가르치는 장면에서의 그 교수님의 단점은 학생 편애가 심하다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피드백을 해 줄 때 비춰지는 성의에서, 관심과 애정의 크기가 다르다는 게 너무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별은 차별로 인해 특혜를 받는 사람보다 그것으로 인해 피해를 받는 사람이 차별의 존재를 명확히 인지하고 문제 삼는 것과 마찬가지로 --- 맞다. 나는 교수님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학생에 속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늘 최우수 성적만 받아오다가 대학에 오고 나서 내가 학습부진에 해당하는 것인지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정도로 학습의 영역에서 내가 가지고 있던 자아 정체성이 많이 흔들리는 경험을 했다. 저학년일 때는 애초에 학습에 참여를 할 의지가 부족하거나 결여된 상태로 인해 결과가 나빴다면 3학년이 되고난 후 다행히 제대로 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겨 대부분은 극복이 되었지만 몇몇 과목에서 스스로의 역량이 형편없음을 느끼는 일이 다분히 일어난다. 이번 학기에서는 지금 이야기 하고 있는 이 과목이 가장 그렇다. 애초에 내가 가장 잘 못한다고 생각하는 말하기와 발표에 관련된 수업이기 때문에 더 그렇기도 하다. 어쨌거나 태어나서 거의 처음으로 하위권 학생의 마음, 선생님으로부터 관심 받지 못하는 학생의 마음을 경험하고 헤아려보고 있다. 이것이 나중에 교사로서 일하는 데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은, 자기비하 자기혐오에서 벗어나기 위한 지나친 자기합리화의 결과인 것 같지만, 아무튼. (뭐가?)      


우리나라에서 교사가 되는 사람들 보면 대부분 학창 시절 때부터 큰 문제나 사고 일으키지 않고 공부 잘해서 선생님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과연 공부를 잘 하기만 했던 학생이 자라 나중에 선생님이 돼서 공부 못 하는 아이를 이해할 수 있을까?     


고2때 사회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던진 말이다. 1년쯤 후에 자기소개서를 쓸 때 교육에 관한 내 생각을 정리할 때 나름대로 답을 구하기 위해 머리를 열심히 굴려보았던 질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어려운 질문이다. 뒤늦은 생각이지만 그 당시 사회 선생님이 대학원을 다니시면서 가졌던 아이디어를 수업 시간에 우리에게 잠깐 푼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고등학교 때 저 질문을 봤을 때는 ‘뭐야, 그럼 성적이 낮거나 뭔가 문제를 겪었던 경험이 꼭 필요하다는 건가? 인하대가 좋아하는(사실 무근이다) 성적 상승 곡선 그래프를 가진 학생이어야 한다는 건가’하는 생각을 하며 ‘하기 싫음을 느끼는 것은 모두가 그러하지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나름의 답을 내렸었는데, 지금 더 나은 답을 내보라 하면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내가 이 새벽에 떠올리는 일련의 사건들 - 고등학교 한국사 선생님의 (의도와 상관없이) 공부 잘 하는 학생에게만 배분된 신뢰와 칭찬의 눈빛, 대학생이 되고 나서 공부를 잘 못하고 선생님의 관심 밖에 서게 된 지금 나의 처지, 고등학교 사회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교사에 관한 질문 - 이 이렇게 한꺼번에 떠오르는 것은 서로 연관성이 있다는 걸 내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글의 마무리는 <행복한 교육> 10월호에 실린 교사의 글을 인용하면서 하고자 한다.

“...또 칭찬 한마디를 가볍게 하지 못하였다. 혹여 내가 누구누구만 예뻐한다고 오해하여 다른 친구를 질투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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