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n번 읽는 양귀자의 <모순> 그리고 문장 수집 (1)
1. 읽은 계기
도비라의 바로 다음 장마다 긁어다 모으고 싶은 문장들을 찰떡같이 골라 준 이 책의 편집자 덕분에, 그리고 내 나이 스물 다섯에 읽는 스물 다섯 살 안진진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2. 작가의 주제 의식 - 제목이 <모순>인 이유
"세상은 네가 해석하는 것처럼 옳거나 나쁜 것만 있는 게 아냐. 옳으면서도 나쁘고, 나쁘면서도 옳은 것이 더 많은 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야. 네가 하는 박사 공부는 그렇게 단순한지 모르겠지만, 내가 살아보는 삶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어. 나도 아직 잘 모르지만." (176쪽)
온실 속의 화초로 자란 인간의 전형으로 묘사되는 이모의 딸 '주리'에게 '나'(진진)이 한 말이다.
읽자마자 이 대목이 고등학교 교과서나 자습서에 실려 있었다면 밑줄 쫙 긋고 작품의 주제를 나타내는 구절로 소개되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모순>은 철저하게 안진진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고 서술되기 때문에, 사실 독자로서는 주리라는 인물이 어떤 경험을 했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그 구체적인 단면을 볼 기회가 아예 단절되어 있기는 하다. 열아홉 때를 생각하면 - 굳이 과거 한 시점으로 특정하지 않더라도 - 나야말로 주리처럼 누릴 거 다 누리고 받을 거 다 받으면서 자란 쪽이었기 때문에, 온실 속 화초는 화초 나름대로의 고민과 좌절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따뜻한 물 속에 갇혀 천천히 익어가는 개구리는 아닐지라도, 발끝부터 턱밑까지 이불 속에 친친 감겨 있는 것도 때때로 답답하게 느껴지니까.
한 번 더 강조하는 말이지만 이모부는 심심한 사람일지는 몰라도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돌출을 못 견뎌하고 파격을 혐오한다고 해서 비난받아야 한다는 근거가 어디 있는가. 어쩌면 나는 이모의 넘쳐나는 낭만에의 동경을 은근히 비난하는 쪽을 더 쉽게 선택하는 부류의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이모부 같은 사람을 비난하는 것보다는 이모의 낭만성을 나무라는 것이 내게는 훨씬 쉽다. 그러나 내 어머니보다 이모를 더 사랑하는 이유도 바로 그 낭만성에 있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랑을 시작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미워하게 된다는, 인간이란 존재의 한없는 모순...... (232쪽)
이 대목에서는 아예 작품의 제목이 직접적으로 등장한다. 다시 고등학교 자습서에 빙의하면 빨간 동그라미 팽팽 그었을 것 같은 부분이다.
아주 라이트하게 이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이모의 mbti는 앞으로 봐도 뒤로 봐도 인프피(INFP)이다. 다른 인물은 좀더 생각해보더라도 일단 이모는 빼박이다... (같은 인프피로서 감지 가능)
2. 문장 수집
어느 날 아침 문득, 정말이지 맹세코 아무런 계시나 암시도 없었는데 불현듯,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나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그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 꼭 그래야만 해!" (9쪽)
HOT의 '캔디' 노래 도입부 가사가 떠오른다. '어렵게 맘 정한 거라 네게 말할 거지만 사실 오늘 아침에 그냥 나 생각한 거야'.
고민을 하는 시간이 그것의 깊이와 그닥 그럴싸한 비례 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생각이 요즘 든다. 외려 짧은 시간에 압축적으로 생각을 마치는 것이, 내가 내린 결정의 신선도를 더 높여주기도 하는 것 같다.
얼마 전 집앞 골목에 있는 작은 동네서점에 잠깐 들렀는데, 그곳에서 구경한 독립출판물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사랑과 연애에 관한 수필집이었고, 선뜻 고한 이별이 뜻밖에도 관계의 매듭을 비교적 매끄럽게 지어주었다는 이야기로 기억이 난다. 이 수필집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또 쓰고 싶다.
진짜 내리기 어려운 결정이 눈앞에 있으면 일단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거나 자는 척 눈을 내리깔고 보는 내게 정말로 필요한 덕목이다. 어느 한 쪽의 경향성이 반드시 정답이 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해도, 내 안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반대쪽 고무줄을 늘려줘야 한다. 한쪽으로만 늘어난 고무줄은 진짜 못생겼으니까.
고등학교 때의 가출은 두 번 다 친구들의 요청에 의해서였다. (중략) 결코 영원히 돌아오지 않겠다는 다짐 따위는 해 본 적이 없었다. 집이 다소 지겹긴 했어도 인생만큼 지겨운 것은 아니었다. (11쪽)
사실 마지막 문장에만 밑줄 그어져 있었다. 지겨운 인생. 아무리 지치고 피로해도 로그아웃이 안 되고 리셋도 안 된다는 사실이 때때로 놀랍고 자주 징글징글하다. 무엇보다 나에게 맞는 충전 단자를 찾아 나서는 일의 피로함과 막막함. 그 일이 기약없이, 어쩌면 평생 계속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 절망스럽기도 하다. 그게 사람이든, 일이든, 취미든 간에.
그렇다고 헐겁거나 꽉 조이는 충전 단자에 나를 맞추고 참는 삶을 잘 참는 것도 아니면서.
드라마 <로맨스가 필요해 2>의 나레이션이 떠오른다. 동시에 홍진경 씨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쓰여 있었다고 알려진 어떤 글 하나도. 한동안 빨리 노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다들 너무 좋은 때라고 하는데, 주위에서 다들 내 나이를 부러워하는데 막상 나는 그 '좋다(고들 하)는 것'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어서. 차라리 받은 적 없는 셈 치면 내가 놓치게 되는 것도 없을 테니까. 내가 나의 어리석음을 두고두고 후회하고 비난하는 일도 사라질 테니까 말이다.
황인찬이 쓰고 서수연이 그린 <백 살이 되면> 그림책을 보자마자 사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비슷한 생각과 연결되어서였던 것 같다.
그렇지만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아닌,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무언가로 인한 두려움은 대체로 두 가지 때문인 것 같았다. 앞으로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차고 넘치거나, 혹은 내가 그것에 이미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붓고 애정을 저당 잡혔거나. 전자는 주로 사람이나 나의 청춘에 관한 것이고, 후자는 내가 아끼는 물건에 대해 생각하거나 입시의 종착지가 다가오던 고등학생 때 주로 느낀 감정이다. 어느 쪽이든 간에 그 무언가가 너무 소중하게 느껴질 때면 내가 망치거나 잃어버릴까봐 덜컥 겁이 나는, 그리 달갑지 않은 습관이 있다.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은 사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뜻이라고 어디선가 주워 들은 적이 있고 100%는 아니지만 거의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안 되는 예외는,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버거워 캥거루 뱃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하던 시기 때문에 고려하게 되었다.) 내가 사랑하는 드라마 <멜로가 체질> 1화에서는 이것을 삶이 아닌 사랑에 관한 명제로 바꿔 놓았다. '사랑하지 않겠다는 말은 사랑을 잘하고 싶다는 말과도 같지'. 그리고 사랑에 관해서라면, 작은 예외 없이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울고 있지만 이 눈물은 머지않아 마를 것이고, 어쩌면 우린 또 다른 사랑을 시작할지도 모른다.
다시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이라는 꿈을 꾸고 사소한 일로 다투고 헤어지다 보면 이 미치겠는 청춘도 끝장이 날 것이다.
- <로맨스가 필요해 2> 중에서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오랜 시간을 들여 결정한 일도 오 분 뒤에 새로운 진지함에 사로잡혀 뒤집을 수 있는 아버지. (12쪽)
사람들이 처음부터 마음 먹고 하게 되는 거짓말의 수는 얼마나 될까? 적어도 연인 관계에서의 거짓말은,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고 싶어서라기보다 나중에 본인도 의도치 않게 거짓말이 되어 버린 경우가 적지 않을을 테다. 말하는 순간에는 진심이지만 그 마음이 영구적이지 않은 탓에 거짓말이 되어버린, 이제는 텅 비어버린 약속들. 그 수많은 약속들. 따뜻한 차나 시원한 얼음물이 언젠가는 미적지근해지듯이. 처음부터 투박한 보냉병을 쓸 수도 있겠으나 귀한 손님에게 내어줄 때에는 예쁜 컵에 담아 드리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니까.
안진진의 아버지도 오분 전만 해도, 그러니까 새로운 진지함에 사로잡히기 전까지만 해도, 이제는 헌 것이 되어버린 진지함도 조금 전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새 것이었을 것이다. 새 것을 집어들면서부터 그것의 낡은 미래를 생각하는 경우는 드물다. 아주 커다랗고, 점점 거대해지는 상처가 그 사람의 시야를 아주 먼 과거나 아주 먼 미래로 가두지 않는 이상은 그럴 것이다. 누구나 그 순간에는 그 결정이 옳다고 믿으니까. 믿지 않고서야 견딜 수 있는 방도가 따로 없으니까.
그래서인지 가끔은 내가 아무리 고민하고 고심해서 어떤 결정이나 판단을 내려도, 미래의 내가 현 시점의 나를 돌이켜 봤을 땐 부족하고 아쉬운 지점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면 과연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 자체가 가능한 일인가? 라는 생각을 하던 때도 있었다. 20대 중반인 지금도 그렇지만 특히나 청소년기에는 한해 한해 몸도 마음도 성장하는 폭이 훨씬 더 컸어서 과거의 나를 향해 더 자주 으휴, 하고 꾸중을 줬던 것 같다. 현재의 시간과 몸 안에 갇혀 있는 이상 별달리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일지라도.
그런데 이런 꾸중은 나만 아는 것이다. 나만 아는 내 모습을 보고 내가 나를 조용히 불러내 한소리 하는 것이다. 4학년 1학기 한창 교육학 강의를 많이 듣던 무렵, 과정 중심 평가와 결과 중심 평가라는 개념을 비교하며 설명하는 부분을 보고 우리가 자아와 타인을 대하는 가장 큰 차이이자 구별법이라고 생각했다. 설령 내가 타인을 배려하고 친절하게 대할지라도 그 겉모습이 만들어지기까지의 모든 부산물을 나는 이미 목격해버렸다. 찰나의 망설임과 아무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이기심과 순식간에 극복되었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게으름까지 모두 내가 나에게는 숨길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나친 자기검열은 내가 내 삶을 피로하게 만드는 주범이다. 그렇지만 나를 향한 나의 꾸지람이 전혀 들리지 않는 안락함 따위를 나는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때때로 어떤 거래나 협상의 자리에서 아주 진지한 얼굴로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을 나는 절대 믿지 않는다. 그런 말은 기교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결국 돈이라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14쪽)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많이 떠들어댄 것 같아서...
마지막은 나의 회사생활을 자주 대변해주는 명수옹의 사진으로 마무리해야지 ♪
거의 다 써놓고, 도쿄 여행 다녀오자마자 조금만 수정해서 바로 올려야지! 했다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ㅋㅋㅋ 돈 버느라 바빠 브런치에 신경을 바로 쓸 수가 없었다...
다시 또 부지런히 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