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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혜교 Jul 06. 2023

유럽의 소도시 대신 한국의 시골마을에 삽니다

20대 집순이의 집콕일지


시골에 산지 10년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어휴, 그래도 20대에 서울에서 살아야 경험의 폭이 넓어지지!"라며 핀잔을 주는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자연은 최고의 스승이라는 말로 응수하곤 한다. 내게 원할 때마다 영화관이나 마트에 갈 수 있는 것보다 중요한 건 원할 때마다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밤 11시에 택배를 시키면 다음날 아침 7시에 문 앞에서 받아볼 수 있다거나, 아무 때나 뮤지컬을 보러 갈 수 있는 삶을 포기했다. 대신 사람보다 나무가 훨씬 많은 곳에서 유유자적 거닐 수 있고, 어디로 눈을 돌려도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곳에서 사는 삶을 택했다.


우울감과 무기력함이 요즘 청춘의 기본값이라는 말은 이제 너무 유명해졌다. 나 역시 잠시나마 도시에 살 때 그 우울의 정서를 있는 대로 죄다 흡수하고 골골댔었다. 나에게는 도시의 편리함보다 삭막함이 더 크게 와닿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왜 깡시골에 틀어박혀 젊음을 허비하냐고 묻는다면, '행복이 기본값인' 청춘으로 살고 싶어서라고 답하겠다.




제 커피는 진짜입니다


친구로부터 '진짜 커피와 가짜 커피'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회사에 출근한 날, 생존을 위해 카페인을 수혈하듯 급하게 빨아 마시는 커피는 가짜 커피다. 반면 주말이나 휴일에 멋진 잔에 담아 느긋하게 향과 맛을 음미하며, 2시간에 걸쳐 마실 수 있는 커피는 진짜 커피다. 똑같은 커피 한 잔이더라도 내가 원하는 공간에서, 원하는 시간을 보내며 마실 수 있어야만 비로소 진짜가 되는 셈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다짐했다. 언제든 진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삶을 살겠다고.  비록 큰돈을 벌거나 으리으리한 집을 짓지는 못하더라도, 차 한 잔 끓여 느긋하게 마당을 거니는 여유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걸 목표로 삼겠다고.



날이 좋을 때면 가족들과 함께 마당에 나가 커피나 차, 간단한 디저트를 나눠 먹는다. 이때는 강아지들도 함께 나와 마당을 산책하는데, 잔디 사이사이에 뿌려둔 간식을 찾아먹는 노즈워킹 시간이기도 하다. 요즘에는 마당에 넘치도록 핀 꽃 몇 줄기를 잘라 화병에 꽂아두는 엄마 덕분에 눈이 더 즐겁다. 음악을 틀지 않아도 새소리가 들리고, TV를 켜지 않아도 멋진 풍경이 보이는 마당에서 차를 마시고 있자면 시골에 살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마당이 주는 기쁨


마당은 탁 트인 외부에 위치하면서도 그 어느 곳보다도 사적인 나만의 공간이다. 자연과 사유의 장점이 뒤섞인 푸른 공간은 언제나 여유와 기쁨을 준다. 널리고 널린 것이 풀밭에 나무 그늘이라지만, 공원이 아닌 마당에서 느끼는 풀의 촉감과 그늘의 시원함은 왠지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법이다.


마당이 주는 기쁨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시골에 살기 전까지는 내가 먹어본 청이라곤 기껏해야 매실청이나 모과청, 레몬청, 자몽청 정도였다.  하지만 마당에서 다양한 과실수가 자라나면서, 내가 가진 '청의 세계'도 넓어졌다. 며칠 전에는 앵두나무에서 앵두를 잔뜩 따다가 청을 담갔다.



손가락에 힘을 너무 많이 주면 앵두가 톡 하고 터져버린다. 대충 쓸어 담았다가는 상한 열매나 벌레까지도 같이 담게 된다. 하나씩 조심스럽게 열매를 모으고, 깨끗하게 씻고, 씨를 발라내고, 설탕에 충분히 절여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앵두청을 맛볼 수 있다. 이런 번거로운 작업 때문인지 앵두청을 파는 곳은 매우 드물다. 자연이 전해주는 '고생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인 셈이다.




'아름다운 동네'에 산다는 사치


누군가 양평에 놀러 오겠다고 말하면 나는 이렇게 답한다. "에이, 진짜 할 거 없는데!" 이 말은 사실이다. 우리 동네에는 관광객이 할만한 게 거의 없다. 기껏해야 드라이브를 하거나 한강을 구경하는 것 정도니까. 하지만 팔불출 같은 마음을 참지 못하고 기어이 이런 말을 이어 붙이고 만다. "그래도 예뻐요, 고즈넉하고."


'우리 동네'라는 말이 얼마나 막연하고 따뜻한지에 관해 생각해 본다. 동네라는 건 참 넓은 영역이고 그 안에 수백 수천 명이 살 텐데도, 사람들은 동네 앞에 '우리'라는 관형어를 써서 친근감 있게 표현한다. 동네까지도 '우리'의 영역으로 집어넣으며 살갑게 표현하는 것은 어쩌면 집을 넘어 동네를 사랑하는 일의 첫걸음일지도 모른다.



우리 동네에는 곳곳에 아름다운 산책로가 있다. 워낙 사람이 없어서 갈 때마다 자연을 통째로 빌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길들이다. 10년을 매일같이 본 동네인데도 나무 그늘 아래서 걷고 있으면 멋지다는 탄식이 흘러나온다. 길게 늘어진 나무와 강물에 비치는 맑은 하늘, 눈처럼 날리는 꽃잎들까지.


이런 풍경은 100년이 흐른다 해도 절대 질리지 않겠지. 언젠가 유럽의 소도시를 여행할 때도 꼭 이런 생각을 했었다. 작고 아름다운 마을에서 자연과 어우러져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래서 친구들이 놀러 올 때면 우리 동네도 여느 유럽 소도시 못지않게 멋지고 아름답지 않냐며 자랑하곤 한다.



어쩌면 아름다운 동네에 산다는 건 정말 사치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많은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그 풍경 속에 사는 것'이 나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라는 생각을 한다. 멋진 풍경을 보며 감탄하는 순간들을 여행이 아닌 일상의 몫으로 가져왔으니까. 그로 인해 내 삶은 평일에도, 주말에도, 어떤 계절 속에서도 언제나 여행이 되었으니까.


 얼마 전 친구로부터 "살면서 꼭 이루고 싶었는데, 이루지 못한 게 뭐야?"라는 질문을 받았다.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없는데?"라고 답했다. 이보다 행복하게 살 수는 없는 거였다. 꼭 지금처럼만 살면서, 이 시골 마을에서 자연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렇게 <20대지만 깡시골에 삽니다>를 이어 2부 <시골집에 살고 출근은 안 합니다>까지 이어진 시골살이 시리즈의 막을 내린다. 어쩌면 이 글은 나를 둘러싼 자연을, 그 자연을 품은 이 시골동네를 향한 몇 차례의 러브레터였는지도 모른다.


이 글이 '불편하고 아름다운 동네에 사는 사치'결심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모두가 '행복이 기본값'인 삶을 이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리즈의 막을 내린다.


지금까지 시골살이 시리즈를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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