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 살다 보면 외식 메뉴가 참 한정적이다. 내 음식 취향을 먼저 밝혀두자면, 나는 몸에 안 좋은 음식은 다 잘 먹는다.된장찌개, 멸치칼국수, 콩국수보다는 피자, 치킨, 분식 같은 것을 선호한다. 그러나 우리 동네에는 주로 전자의 음식이 흔하다. 그래서 나는 후자의 것들을 '속세의 음식'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시골에서 속세의 음식을 먹을 방법은 두 가지다. 차를 타고 멀리 나가서 먹고 오거나, 차를 타고 가서 포장해 오는 것이다.
물론 속세를 떠나 시골에 살아야만 먹을 수 있는 것들도 있다. 마당에서 갓따낸 보리수 열매 같은 것. 개복숭아와 매실, 모과는 청으로 만들어 보관하기도 한다. 가끔 운이 좋으면 동네를 어슬렁거리다 산속에서 마구 자란 오디를 따먹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신선한 유기농 열매들로는 속세의 음식을 향한 나의 갈증을 달랠 수 없었다. 마당에서 두릅을 따올 수는 있어도 텃밭에서 피자를 기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현관문을 열고 말했다. "치킨 사 왔다!" 버스 종점 근처의 치킨집에서 후라이드 치킨을 포장해 왔다고 했다. 거기에 치킨집이 있었다고? 이 동네에서 피자나 치킨 같은 건 사치인 줄 알았는데! 나는 신나서 달려 나갔다. 그리고 이내 잔뜩 실망한 채 이렇게 말했다.
"아빠... 이건 치킨 아냐..."
보기만 해도 바삭한, 자글자글한 튀김옷은 어디 간 걸까? 내 머릿속의 치킨은 BBQ 황금올리브나 교촌 허니콤보 같은 거였다. 특히 후라이드 치킨이라 함은, 잘못하다가는 바삭한 튀김옷에 입천장을 긁힐 것만 같은 그런 게 미덕 아니던가. 그러나 내 눈에 보이는 건 바삭한 튀김옷 없이 통째로 튀겨진 옛날통닭이었다. 나에게 있어 치킨과 통닭은 엄연히 다른 음식이었다.그러나 이 동네에서는 이게 주류였다. 로마에선 로마 법을 따라야 했다.
버거보단 백반이 잘 팔리는 동네
"우리 동네에... 롯데리아 생긴대!"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양평군청이 있는 읍내에는 프랜차이즈 매장이 있지만, 군청과 30km 떨어진 곳에 사는 우리 가족과는 무관한 얘기다. 이런 시골에 롯데리아가 생긴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거였다. 물론 엄밀히 따지자면, 롯데리아가 들어설 자리는 우리 집에서 걸어서 2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가장 가까운 읍내정도로 부르는 편이 정확하다. 하지만 이렇게 깊은 산속에 살다 보면 10km 거리쯤은 다 '우리 동네'라고 부르고, 차로 20분 이내 거리에 살면 대충 동네 사람이라고 부르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웃사람보다 이웃고라니가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롯데리아가 자리 잡은 곳은 이 일대에서 최대의 번화가로 꼽히는 곳이었다. 무려 시장 바로 옆자리를 꿰찬 것이다. 낡은 벽돌 건물에 '롯데리아 OPEN 예정'이라는 현수막이 붙어있었다. 나는 롯데리아가 영업을 시작할 때까지 그 말을 믿지 못했다. 언제든 오픈 계획을 철회한다 해도 이해할 수 있었다.
장사가 잘 될 리 없다는 생각에 얼굴도 모르는 사장님이 안타까워지기 시작했다.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예상대로 롯데리아는 매우 빠르게 망했다. 나는 프랜차이즈 버거집이 다시 들어오기를 기대하느니, 직접 모닝빵을 사다가 사이에 달걀과 베이컨을 끼워먹는 것을 택하기로 했다.
상회 VS 하나로마트
그러나 재료 수급도 그렇게 쉽지는 않다. 코스트코, 이마트, 홈플러스... 그런 대형마트는 도시에나 있는 거였다. 자고로 시골이라면 마트는 무조건 농협 하나로마트로 통일이다. 이곳에 다른 선택지 같은 것은 없다. 온 가족이 함께 차를 타고 하나로마트에 가는 게 정답이다.
도시와 시골의 마트 생태계는 얼마나 다른가? 그 차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가 있다. 한창 '허니버터칩 대란'이 일어 도시 사람들이 한 봉지라도 구하기 위해 뛰어다닐 때 우리 동네 하나로마트에서는 아주 편안하게 허니버터칩을 구할 수 있었다. 앞서 이야기했듯, 이 동네에는 유행도 유흥도 없으니까!
코스트코에서 사 온 크루아상이 맛있다며 자랑하는 친구에게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우리 동네 마트엔 노루궁둥이버섯은 있어도 크루아상은 없어." 크루아상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식빵조차 없을 때가 태반이니까. 그러나 나는 언제나 하나로마트의 번영을 빌었다. 하나로마트까지 갈 수 없는 날에는,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 먹기 위해 30분을 걸어 상회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상회의 가장 큰 단점은 이 아이스크림이 언제 입고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는데, 어떤 제품을 집든지 늘 먼지가 뿌옇게 쌓여있었다. 가끔 운이 나쁘면 유통기한이 몇 달 지난 과자 같은 것을 집을 때도 있다. 과자의 유통기한이 굉장히 길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나는 하나로마트에 충성하게 되었다.
요리가 늘었어, 도시와 헤어지고 나서
먹고 싶은 게 있는 자, 직접 만들어라! 그게 이 동네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동안 나는 수많은 레시피에 도전했다. 오븐으로 굽네치킨맛 나는 닭구이 만들기, 돌침대 이불속에 반죽 발효시켜서 빵 만들기, 냉동 블루베리와 우유를 갈아서 아이스크림 비슷한 것 만들기 등... 속세의 맛을 느끼기 위한 발악이었다. 가족들이 "그렇게까지 해서 먹어야 해?"라고 물을 만큼 수없이 도전한 끝에, 요리 실력이 늘었다.
이 동네로 이사 오고 난 뒤부터 밥은 가족이 다 함께 먹는 것이 기본값이 되었다. "나는 이따 나가는 길에 김밥 사 먹을게."나 "오는 길에 핫도그를 먹어서 배가 안 고프네." 같은 일이 없기 때문이다. 산꼭대기 전원주택에 살면서, 온 가족이 모이는 시간이 오히려 늘어났다.
가끔 서울에서 퇴근하는 언니가 케이크나 빵 같은 걸 사 오면 이렇게 온 가족이 모여 파티를 연다. 기껏해야 CJ 호떡믹스로 직접 만든 호떡이나 냉동 빵을 먹다가, 이런 속세의 케이크나 빵맛을 보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아무것도 없는 시골마을에 들어온 덕분에 먹는 즐거움을 더 생생하게 느끼게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