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없다. 그냥 우는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없다. 겨우 2만 원씩 넣던 주택청약 납부도 멈춘 지 오래되었다.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꼬박꼬박 월급을 받던 시절을 뒤로하고 글 써서 먹고살겠다고 고집을 부린 탓이다. 근로장려금을 수령함으로써, 나는 국세청으로부터 인정받은 저소득자가 되었다. 매일 10시간은 족히 근로하는데 국가로부터 근로를 장려받다니! 글로소득자의 삶이란 이토록 슬픈 것이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나는 '가성비 인간'이다. 내게는 덕질,영화나 뮤지컬 N차 관람, 게임을 하는 취미가 없다. 택시도 타지 않는다. 태어나 카카오택시를 불러본 적이 한 번도 없을 정도다. 커피도 거의 사 먹지 않는다. 요즘 애들이라면 다 하나씩 가지고 있다는 스타벅스 멤버십조차 없다. 얼핏 들으면 서글픈 이야기겠지만, 쓰고 싶은 글을 마음껏 쓰는 삶을 누리고 있으니 만족한다.
가성비 글로소득형 인간으로서 내게는 한 가지 원칙이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글이든 쓸 것. 가장 빈번한 일거리는 아무래도 공모전에 낼 작품을 쓰는 일이다. 안정적인 수입이 아니라는 점은 아쉽지만, 타율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하나만 걸려라'라는 마음으로 하루에 3개 이상의 공모전에 글을 출품하는 집념을 보인 덕분에 지금까지 받은 상금이 수백만 원에 달한다.
이 별을 여행하는 글로소득자
이런 가성비 일상 속에서도 내가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게 있다. 세계여행. 나는 커피값과 택시비를 아껴서 여행을 떠난다. 글을 써서 번 작고 소박한 수입을 고이고이 모아, 이 별을 돌아보는 일에 몽땅 쏟는다. 그렇게 지금까지 14개국을 여행했다. 여행자는 내게 작가만큼이나 중요한 정체성이다.
지난가을에는 프랑스에서 한 달간 살았다. 물가도 숙박비도 최고로 비싸기로 유명한 바로 그 파리에서. 글로소득자 주제에 어떻게 그게 가능했냐고 묻는다면, 돈은 없지만 깡은 있었다고 답하겠다. 에어비앤비를 예약하는 대신 현지인이 살던 아파트를 수소문해 빌렸고, 거의 모든 끼니를 직접 해 먹으며 식비를 아꼈다. 1유로짜리 바게트와 5유로짜리 와인이 나의 주된 만찬이었다. 이 눈물겨운 여행기는 브런치북 <청춘을 기록하는 도시에서>에 자세히 담겨 있다.
수많은 선택지 중 파리를 고른 건, 이미 알고 있는 도시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도시에서 한 달을 지내는 건 너무 위험 부담이 크니까. 나는 파리에 두 번 가본 적 있었고, 한창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니 한 달 동안 살아보기에 파리만큼 적합한 곳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한 달 살기는 처음이라
파리에 도착한 뒤에야 내 예상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지난 여행은 호텔에 묵으며 매 끼니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사 먹고, 에펠탑과 개선문, 라파예트를 둘러보는 날의 연속이었다. '유럽여행자'로서 스치듯 방문했던 파리와, 내가 새롭게 만난 파리는 전혀 달랐다. 이제 와 말해보건대, 파리에 가서 에펠탑과 개선문만 보고 오는 건 외국인 관광객이 서울에 와서 명동과 N서울타워만 보고 돌아가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진짜 파리는 도시 곳곳에 난 좁은 골목에, 모두가 쉬어가는 작은 공원에, 신선한 식재료가 가득한 시장에, 영어가 잘 통하지 않는 작은 동네 상점에 숨어있었다. 내게 주어진 한 달 동안 나는 자전거를 타고 자정의 파리를 누비면서, 마트 직원과 인사를 나누면서, 프랑스인 친구를 사귀면서 익숙하고도 낯선 도시를 만끽했다.
이후로는 "이도시는 2박 3일이면 충분하고, 저 도시는 3박 4일이면 차고넘치죠!"라는 식의 말을 믿지 않게 되었다. '며칠이면 충분히볼수 있는 도시' 같은 건없다는 걸 파리가 내게 알려주었으니까.그렇게 나는 짧은 여행이 아닌 한 달 살기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됐다.
미국 가고 싶어요, 공짜로요
사실 나의 가장 오랜 꿈은 미국에 가는 거였다. 어릴 적부터 디즈니 채널과 미국 시트콤을 섭렵하며 그 꿈을 쑥쑥 키워왔다. 친구들이 짱구나 이누야샤, 코난, 원피스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에 빠져 있을 때, 나는 하이스쿨뮤지컬과 풀하우스와 디즈니 오리지널 작품들을 수도 없이 돌려 봤다.
물론 이러한 염원이 무색하게도 아직 미국은커녕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디뎌본 적도 없다. 미국에 가는 건 유럽에 가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비싸기 때문이다. 파리에서 돌아오자마자 '미국 한 달 살기'에 드는 예산을 가늠해 보았다. 한 달 집세는 어느 정도인지, 물가는 어떤지, 오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어느 정도인지.
모든 예산을 고려해 보니 천만 원은 족히 들 거라는 계산이 섰다. 그렇게 나는 미국 한 달 살기의 꿈을 가슴 한편에 묻어두기로 했다. 미국에 가보고 싶어, 라는 건 '언젠가 우주여행을 해보고 싶어'라는 말만큼이나 아득한 목표였다.
그러던 어느 봄날, 예측하지 못했던 희망이 성큼성큼 나를 찾아왔다. 내 방문을, 내 마음을 쿵쿵 두드려대면서. 내 눈앞에 이런 글이 펼쳐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