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길'만 걷는 98년생의 연구기
Q.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단, 소속 없이 자신을 설명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98년생 이혜진입니다. 저는 자신을 불'꽃길'을 걷는 사람이라 소개하곤 해요. 제가 추구하는 가치를 좇다 보면, 자신을 한계에 몰아붙이게 되더라고요. 그 때문일까요? ‘혜진이의 선택 반대로만 가면 반은 간다’라거나, ‘혜진이는 무인도에 던져둬도 잘 살 것 같다’라는 말을 종종 듣곤 합니다.
현재 미국으로 박사 과정 진학을 앞두고 있어요. 학부에서는 전자공학을, 석사 과정에서는 정보보호를 전공했습니다. 박사 과정은 전자 컴퓨터 공학부 내 컴퓨터 공학을 전공할 예정이에요. 세 전공이 얼핏 비슷하면서도 달라 보이죠? 향후 저의 박사 과정 연구 주제인 '증가상현실 보안'과 아주 긴밀하게 연결된 전공들입니다.
저는 산업 현장과 학계에서 전문가적 역량을 펼칠 날을 꿈꿔요. 언젠가 제 품 안의 사람들이 제가 넓힌 공간에서 평안하길 바라며 나아가는 중입니다. MZ 인터뷰의 일원으로 참여하게 되어 기쁘네요!
Q. '혜진이와 반대로 가면 절반은 간다'라니, 여러모로 순탄하지 않은 길을 걸어왔다는 말로 들려요. 그간 어떤 어려움을 마주했는지 들어보고 싶은데요.
아무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아버지의 상경 반대예요. 저는 부산 사람이거든요. 경상도에는 부산대, 부경대, 경상대, 경북대와 같은 국립대가 있어요. 부모님은 제가 경상도 내의 국립대에 가기를 원하셨어요. 사립대에 비해 절반 정도로 낮은 등록금에, 집에서 통학할 수 있고, 제가 부모님의 가시권에 머무니까요.
하지만 저는 서울로 가고 싶었어요. 학업적으로 주도적이고 뛰어난 친구들이 전국 각지에서 서울로 모인다는 점이 제게 큰 동기 부여가 될 것 같았어요. 문화 예술이 발달한 서울에서 누리고 싶은 일상도 있었고요. 결정적으로, 저는 젊을 때 사서 고생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체력이 따라 줄 때 최대한의 성장을 이루고 싶어요. 그래서 아버지의 반대에도 상경을 고집했죠.
대가는 혹독했어요. 상경하면 경제적으로 지원해 주지 않겠다고 이야기하셨는데, 정말로 그렇게 하셨거든요. 그래서 학기 동안 3개 정도의 일을 병행했어요. 새벽에는 호텔 조식 준비 및 서빙 아르바이트, 오후에는 과외, 저녁에는 식당 혹은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했죠.
그렇게 학기 내내 열심히 벌어두면, 방학 때는 대외 활동 준비에 매진할 수 있었어요. 보통 5월에 시작해서 10월에 끝나는 대회 준비를 위해 하루 20시간 이상을 갈아 넣어야 했죠. 대신 장관상과 시장상을 탈 정도로 성과는 훌륭했어요.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어머니가 아버지를 간절히 설득하셨어요. 이제는 딸을 인정해 주자고요. 덕분에 매달 생활비 일부를 지원받았어요. 하지만 이제는 습관이 된 건지, 아르바이트하는 게 더 편해요. 일상에 공백이 생기면 자격증 준비나 교육, 운동 등으로 채워야만 속이 후련하고요. 일종의 강박이겠죠.
Q. '내가 넓힌 공간에서 사람들이 평안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라고 이야기하셨죠. 증˙가상현실이라는 개념이 낯선 독자분들도 있을 텐데요. 어떤 일을 하시는지 소개해 주신다면?
증˙가상현실이 생각만큼 낯선 개념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닌텐도 Wii, 포켓몬 Go 등의 게임으로 일상에서도 접할 수 있거든요. 메타 글래스, 애플 비전 프로 같은 웨어러블 기기를 사용해 본 경험이 있다면 이해가 더욱 쉬울 것 같아요.
가상 현실이 현실을 완전히 차단한 가상 환경을 의미한다면, 증강 현실은 현실 세계에 디지털 정보가 입혀진 형태예요. 혼합 현실은 이 두 가지가 상호작용하며 공존하는 형태를 뜻합니다. 저의 주요 연구 주제는 혼합 현실을 넘어, 확장 현실에 대한 보안이에요.
최근 Chat GPT와 음성으로 대화하며 영어 회화를 연습하는 유튜버의 영상을 본 적이 있어요. 앞으로는 이처럼 인간과 컴퓨터 사이의 상호작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갈 거예요. 이때 기록되는 개인정보를 기업이 부적절하게 사용할 수 없도록 비식별화 처리하는 등,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Q. 학자의 길을 걷는다는 건 참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대학원 생활에 대해 살짝 공유해 주신다면?
진리의 ‘사람 by 사람’인지라 다소 조심스럽지만, 저에게는 ‘성장통’이라는 말이 적합한 것 같아요. 대학원생이라면 보통 주도적인 학습 의지와 청춘을 바칠 만큼의 성장 동력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해요. 하지만 체계의 부조리함이나 상응하지 않는 보상 등으로 에너지를 소모하는 사례도 많죠. 혹은 뛰어난 동료 연구자들을 보며, 자신의 부족함에 좌절할 수도 있고요.
저는 학부와 조금 다른 분야로 진출하면서 스스로 부족함을 많이 느꼈어요. 연구를 위한 기초 지식은 배워갈 수 있지만, 연구 주제는 스스로 찾아야 하기 때문에 더 어려웠죠. 주제를 찾고, 논리를 쌓고, 그 논리가 다시 무너지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며 성장했습니다. 갈피를 못 잡으며 잠 못 이루는 날도 많았죠. 밤을 새우는 날이 이어지니 체력적으로 힘들었어요.
그래도 저는 아주 운이 좋은 연구자였어요. 소위 말하는 '유니콘' 연구실에 속해 있었거든요. 자원이 풍족했고, 감수성과 능력 모두 훌륭한 지도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제가 잠을 못 자는 날에는 함께 작업하는 논문 지도 교수님도 못 주무셨어요. 교수님이 너무 열심히 지도해 주시니까 부담감이 상당했죠. 능동적으로 잘 해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결과적으로 보면, 스스로 만들어낸 괴로움이 많아요. 석사 과정이라는 짧은 시간 내 성과를 보이고 싶다는 조바심과 중압감이 있었어요. 퀄리티 높은 연구로 나아가고자 했던 욕심도 컸고요. 제가 석사 과정에서 연구한 것은 정보보호였는데, 동료들은 대부분 수학과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어요. 그 속에서 저는 순수 수학 이해가 부족한 일종의 열등생이었죠.
더 나은 연구를 위해 논문을 수없이 읽고, 교육도 받으며 나름대로 발버둥 쳤어요. 고민을 나누고, 조언을 구하고, 논리를 들어 설득하고, 피드백을 반영해 다시 도전했죠. 다행히 좋은 사람들을 만나 연구에 집중할 수 있었고, 훌륭한 시니어 연구자로부터 양질의 피드백을 받아 많이 성장했습니다. 덕분에 SCIE에 논문을 게재하고 우수 논문상도 받을 수 있었어요.
Q. 앞서 자기 계발이 곧 습관이자 삶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어요. 그간 어떤 것들을 쌓아오셨는지 궁금합니다.
능력과 관계를 두루 쌓으려 노력해 왔어요. 여전히 노력하고 있죠. 아무래도 이 중 가장 단순한 건 직업적 능력이에요. 대외 활동이나 자격증, 인턴, 교육 등을 통해 사고를 확장하고, 단기적인 성취감을 쌓으려 해요. 아무래도 연구는 장기적인 영역인지라, 당장 눈앞의 성취감이 없어 괴로울 때가 생기거든요.
경제력을 향한 갈망은 인정 욕구에서 왔어요. 처음 서울로 진학했을 때 아버지께서 제 결정을 지지해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반드시 성공해 보이겠다고 다짐했어요. 독립적이고 떳떳한 존재가 되는 게 목표였죠. 그래서 스무 살 때부터 아르바이트와 경제 공부를 해 왔어요. 계속 통장 잔고를 쌓아가고 있죠.
관계를 자기 계발의 영역에 포함하는 것이 조금 어색한가 싶기도 한데요. 저에게는 중요한 노력의 일부예요. 좋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려 노력해요. 그럴 기회가 있다면 부러 참여하죠. 닮고 싶은 면모를 가진 사람들과 깊이 있게 소통하면서 저도 조금씩 변화하는 걸 느껴요. 이전에 누군가 '혜진이는 만날 때마다 더 좋은 방향으로 달라져 있다'라는 이야기를 해 준 적 있는데요. 아주 보람되더라고요.
Q. 건강 관리에 특히나 많은 관심을 기울이신다고요?
건강이 모든 발전의 토대라고 생각해요. 꾸준히 운동하면 아침에 눈을 떴을 때의 컨디션도, 심적인 여유도, 업무의 집중도도 월등하게 좋아져요. 이걸 실제로 느끼다 보니, 한때 운동에 중독된 적도 있어요. 23살 때까지는 하루에 4시간만 자는 한이 있더라도 순수 운동 시간을 2시간 확보했어요. 새벽 6시까지 밤새 대회를 준비한 다음, 바로 집으로 돌아가 자는 게 아니라 헬스장에 들렀어요. 말 그대로 운동이 미쳐있었던 거죠!
코로나 시기에는 헬스장에 가지 못하니 무력감이 컸어요. 상황이 좋아진 이후 다시 운동을 시작했는데, 한동안 쉬다가 다시 운동하려니 힘들기도 했죠. 그래서 흥미를 느낄 수 있는 테니스, 수영, 스쿼시 등에 도전했어요. 지금은 다시 운동하는 습관이 삶에 자리 잡았어요.
제가 지금껏 쌓아온 모든 조각 중 가장 아끼는 것을 고르라면 단연 건강을 위해 힘썼던 시간이에요. 직접 체득한 감각은 오래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언제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고, 해낼 수 있다는 느낌. 그게 제 삶의 원동력이기도 해요.
Q. 그렇다면, 느긋함을 즐기고 싶을 때는 무엇을 하는지도 궁금해요. 치열한 일상 속 쉼표가 있나요?
사랑이 저만의 쉼표예요. 직접 음식을 만들어서 사랑하는 사람과 나눠 먹을 때면 정말 행복해요. 특히, 제 음식으로 인해 편식하던 식재료를 즐길 수 있게 되는 상대방을 보면 정말 뿌듯해요. 그런 행복한 순간이 삶을 온전하게 만들어요. 요리는 제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에요. 재료를 고르고, 손질하고, 요리하고, 차려내기까지 그 사람을 생각하고 위해야 하잖아요.
한때 어머니가 전업주부셨는데, 매일 새로운 반찬을 내어줄 만큼 정성을 쏟으셨어요. 덕분에 요리하는 모습을 곁에서 보며 자랐죠. 왠지 저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해 보고 싶었어요. 처음엔 위험하다며 칼자루를 안 주시다가, 제가 계속 조르니 써는 방법부터 레시피까지 차근차근 알려주셨어요.
어릴 적 친할머니께서 골절 수술을 받고 저희 집에 몇 달 머무셨어요. 하루는 어머니가 아파서 식사 준비를 못 하셨는데, 제가 의자를 밟고 올라가서 대신 밥을 차렸어요. 할머니 댁에서 자주 먹던 음식 위주로요. 콩알만 한 손으로 어찌 이런 걸 했냐는 칭찬이 저를 춤추게 했죠. 신이 나서 다른 요리도 보여드린 기억이 있어요.
최근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는데요. 떠나시기 전에 속이 안 좋다고 하셨어요. 신세계백화점에서 제일 비싼 민어와 전복을 사서 할머니 댁으로 내려갔죠. 민어탕과 전복죽을 푹 고아서 드렸는데, 할머니가 그 마음을 예뻐해 주셨어요.
Q. 요리와 미식을 향한 사랑이 남달라 보이는데요?
요리하는 행위 자체를 즐겨요. 어머니께 배운 이후로 쭉 요리를 해왔어요. 특히 스무 살에 자취를 시작하면서 취미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어요. 본가에서는 주방의 권한이 어머니께 있으니 도전적인 요리를 하기 쉽지 않았거든요. 아르바이트하며 번 돈으로 요리 서적에 나오는 특이한 식재료를 사들였어요. 이것저것 도전하면서 요리의 폭을 넓히기 시작한 거죠. 제가 했던 요리나, 만들어 보고 싶은 요리를 파는 맛집을 찾아다니기도 했어요.
미식에 지대한 관심을 게 된 것도 그 때문이죠.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미식을 취미로 삼았어요. 음식을 즐기다 보니 자연스레 페어링이라는 개념을 알게 됐고, 와인과 위스키, 사케 등 주류에 관심을 두게 되었죠. 이 과정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고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어요.
지금은 취미 비용까지 직업에 투자하고 있다 보니 미식을 즐기는 빈도가 낮아졌지만, 여전히 식문화와 관련된 다큐멘터리나 서바이벌 요리 프로그램을 즐겨봐요. <헬스키친>, <마스터 셰프 아메리카>, <아이언셰프> 같은 것들이요. <흑백 요리사>, <마스터 셰프 코리아>, <한식대첩>, <냉장고를 부탁해> 같은 한국 요리 프로그램들도 정말 재미있게 봤어요!
Q. 곧 박사 과정을 밟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시잖아요. 쉽지 않은 길이라고 생각해요. 지구 반대편으로 향하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정말 어려운 결정이었어요. 스무 살부터 서울에서 생활하며 많은 걸 쌓았거든요. 입학이 결정된 이후로도 비자를 위한 많은 과정을 거쳐야 했어요. 일부는 여전히 진행 중이고요. 직접 경험해 보니, 유학 준비에는 분명한 동기가 필요한 것 같아요. 안정된 생활을 포기하고 경제 활동에 제약이 있는 비자로 타국에 가는 것이니까요.
제 동기는 성장과 기회였어요. 아직 20대인데도 이렇게 두려운데, 더 많은 것을 쌓은 나이가 된다면 어떨지 생각해 봤어요. 그 모든 생활을 포기하는 게 더 쉽지 않으리라 생각해요. 지금이라서 내릴 수 있는 결정도 있는 거죠.
또 제 분야에서 빨리 성장해 시장의 일부분을 선점하고 싶었어요. 네트워킹의 범위를 전 세계로 넓힐 수 있다면, 당연히 기회를 잡아야겠다 싶었죠. 특히 지금이 마음껏 배울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박사 과정까지는 학생이지만, 그 이후로는 취업과 같은 개념이거든요. 성장이나 배움 이상의 몫을 해내야 하는 거죠.
해외 대학원을 준비하면서 해외 경험이 있는 교수님과 박사님들께 조언을 많이 구했어요. 미국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고 나면, 반대로 제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정말 실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해외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는 사례를 여럿 봤거든요. 기회를 제공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다는 게 가장 큰 꿈입니다. 그 꿈을 위해 제 직업적 능력을 향상하고, 네트워킹을 확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Q. 보통 미국 대학원 진학을 준비할 때 유학원의 도움을 받는 사례가 흔한데, 모든 과정을 혼자 해냈다고요?
네. 저는 2024년 가을 학기 석사 과정을 마쳤고, 2025 가을학기 입학을 앞두고 있어요. 미국 대학원 진학 준비는 일 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는 긴 과정이에요. 굳은 결심으로 시작하더라도 심리적으로 흔들리기 쉽죠. 토플 외에는 절대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에 해도 해도 부족한 것만 같거든요.
정식으로 지원 웹 사이트가 열리는 것은 매년 9월에서 12월이에요. 보통 어학성적과 SOP, CV, 3장 이상의 추천서가 필수예요. 학교에 따라 에세이나 PS, Sample of Writing, List of Publications 등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어요. 준비할 게 이렇게 많다 보니, 미리 움직이는 것이 좋아요. 특히 서류는 첨삭하면 할수록 좋아지니까요.
저는 1~2월 중에 어학 성적을 준비하고, 3월부터 서류 준비를 시작했어요. 미국과 유럽 대학원을 다 고려했는데, 모두 추천서를 3장 이상 받는 것이 필수였어요. 교수님과 면담할 시간도 고려해야 한다는 거죠. 지원 시기가 임박했을 때 추천서를 부탁드리는 건 결례이기도 하고, 또 지원 준비를 성실히 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거든요.
어디로 가고 싶은지 결정했다면, 5월부터 학교에 연락을 돌리는 것이 좋아요. 이미 충원을 마친 연구실에 지원하는 건 시간 낭비니까요. 학교마다, 교수님마다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많은 정성이 필요한 과정입니다. 한 번 상상해 보세요. 모르는 사람이 대뜸 '채용 계획 있나요?'라고 물으면 그리 반갑지 않을 거예요. 반면 '이런 이유로 당신의 연구가 인상 깊었고, 그것과 관련한 어떤 아이디어가 있어요. 이 부분에 제가 기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저는 이런 연구 역량은 갖추고 있거든요.'와 같이 소개한다면 전자보다 분명히 매력적이겠죠. 이런 과정을 8월 안에 끝마쳐야 해요.
Q. 지원서를 넣기도 전에 지치기 쉽겠어요. 해외 대학원을 준비한다는 게 정말 쉽지 않네요.
맞아요. 지원은 9월부터 시작돼요. 일찍 지원하면 메리트가 있어요. 서류 완성도가 높다는 전제가 붙지만, 준비가 잘 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니까요. 또 지원 직후 교수님들로부터 차근차근 인터뷰 요청 메일이 오는데, 순차적으로 인터뷰를 진행할 테니 선점 효과가 있어요. 물론 지원서를 냈는데도 인터뷰 요청이 안 오기도 해요. 이런 불확실성 탓에 이 시기를 버티기가 힘들죠.
하지만 예기치 못한 기회가 생길 수도 있어요. 저는 사전 컨택했던 교수님이 아닌 다른 교수님에게서 연락을 받기도 했습니다. 제가 미처 알지 못했던 초임 교수님이 계셨다거나, 저와 연구 적합성이 더 높은 경우였죠. 이렇게 인터뷰가 몰리면 선택과 집중은 오롯이 본인의 몫이 돼요. 어쨌거나 하나의 학교를 택해 진학하는 것이기 때문에 너무 욕심을 내기보다는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인터뷰 연습도 많이 했고요.
1월 전후로 모든 과정이 끝나요. 기다리다 보면 서서히 메일이 도착하죠. 너무 오래 답을 주지 않으면 자리가 사라질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해요. 이 지난한 과정을 혼자 견디기 힘들다면, 커뮤니티를 활용하는 것이 좋아요. 스레드, 링크드인, 오픈채팅방 등 다양해요. 저도 스레드를 통해 제가 줄 수 있는 조언을 올리고 있어요. 셀프 준비 유학생은 정보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거든요. 체력이 닿는 선에선 언제나 열어둘 거예요.
Q. 늘 쉴 틈 없이 달려오신 것 같아요. 10년 전의 나와 10년 후의 내 모습을 그려본다면?
10년 전의 저는 그저 착실한 고등학생이었어요. 매일 야간 자율학습하고, 시험 성적에 연연하고, 때때로 학교 운동장을 10바퀴씩 돌며 수다 떠는 게 일상이었죠. 그때는 그저 막연히 미래를 꿈꾸면서, 진정한 내가 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10년 후의 저는 진정한 내 모습을 찾은 상태였으면 좋겠네요. 열심히 달려왔으니 단단하게 자리 잡고 싶다는 게 최우선 과제예요. 긍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주변 사람들과 시너지를 내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치열하면서 조화로운 삶을 그려봅니다.
Q. 보통 'MZ하다'라고 표현하는 특성들이 있잖아요. 스스로 MZ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오, 사실 MZ하다는 표현을 아주 싫어해요. MZ세대의 범위가 상당히 광범위한데도 불구하고, 20~30대의 일부를 저격하는 언어로 사용된다는 점에서요. 어떤 뉘앙스인지는 알고 있지만, 서로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만약 누군가에게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또 그런 모습을 보인 것이 처음이라면 한 번쯤은 관대함을 보여주면 좋을 것 같아요. 본인이 속한 그룹의 문화를 알려주면서요. 살아가며 평생 누군가를 단순한 언어로 규정하거나, 비난만 지속할 수는 없잖아요.
다시 질문으로 돌아와서, 제가 MZ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지 떠올려본다면…. 동감하는 부분도, 아닌 부분도 있어요. '세대를 막론하고 사람 대 사람으로서 할 말은 한다'라는 점에서는 제가 MZ하다고 생각해요. 반대로, 무례한 행동을 일컫는 MZ함의 측면에서는 저와 전혀 결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삶에 엄격한 기준을 갖고 있어요. 속된 말로 '젊은 꼰대'랄까요. 타인과의 관계에서 제 언행이나 태도를 늘 돌이켜보는 편이기도 하고요.
Q.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스스로 되새기고, 또 주변인들에게도 자주 하는 말이 있어요.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께도 힘이 되었으면 해서, 이 말을 남기고자 합니다.
첫째로, 현재 우울하다면 그건 당신이 나약해서가 아닙니다. 누구보다 살고 싶은 의지가 강해서일 거예요. 그러니 삶을 놓지 말고, 내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아주 조금씩 좁혀봅시다. 그럼 정말로 언젠가는 내가 그리던 모습이 될 테니까요. 당신은 분명히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둘째로, 누군가의 비난이나 속단 때문에 꿈을 포기하지 마세요. 성공하지 못할 거라고 말하는 건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대부분 그 말 탓에 성공에 닿지 못할 것이고, 그제야 '내 말이 맞았다'라며 거들먹거리면 그만이니까요. 그런데 누군가를 응원하고, 성공할 것이라고 말해주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각종 상황과 당사자의 노력이 필요하니까요. 결과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데, 자칫 당사자의 원망을 들을 수 있는 발언이니 책임감이 막중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나를 응원해 주었다면, 그 신뢰를 저버리지 마세요. 당신의 응원 덕에 기어코 여기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는 걸 보여주세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안 된다고 말하는 건 너무나도 쉽습니다. 쉬운 길을 가지 마세요. 박사 따서 뭐 하냐, 공부 오래 해서 뭐 하냐, 해외 가면 뭐가 다르냐, 해외 박사 네가 할 수 있겠냐…. 저에게도 이런 말을 던지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 가운데 제가 수없이 되새긴 말들입니다.
긴 과정을 거쳐 미국 대학원 진학을 앞둔 지금, 이런 생각을 해요. 현실이라는 말 앞에 굽히고 타협할 필요는 없다고요. 이제는 그런 훈수를 들으면 마음속으로 '어쩌라고. 네 인생부터 책임져!'라고 외칩니다. 조금 싸가지 없어 보여도 괜찮아요. 다치지 말고 굳건히 나아갑시다, MZ들! 가끔 힘들면 찾아오세요. 제 인스타그램과 스레드로요!
Edited by 송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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