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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혜교 Apr 20. 2023

숲 속의 시골집에서 자랐습니다

20대 집순이의 집콕일지



중학교를 자퇴했으니, 한적한 시골마을의 전원주택으로 이사하자. 가족회의 끝에 만장일치로 양평행을 결정한 것이 10년 전의 일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이 결정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거라는 걸. 보통 시골살이라 하면 은퇴 후 중년, 혹은 노년이 되어 시작하는 것이 보편적이니까!


그래서인지 시골로 이사 갈 때까지만 해도 시골살이의 면면을 잘 모르는 상태였다. 처음으로 시골의 어마어마함을 실감한 것은 이사 당일이었다. 아빠는 계약금을 치르기 위해 얼른 은행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워낙 큰돈이니 직접 창구에 가서 해결하겠다는 거였다. 내비게이션에 가장 가까운 은행을 검색하자, 20km가 떨어져 있다고 나왔다. 아빠는 검색 결과가 잘못된 줄 알고 새로고침을 눌렀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그날부터 우리 가족은 편의시설을 포기해야 한다는 현실을 차근차근 받아들였다. 그리고 시골의 좋은 점을 하나하나 찾아내기 시작했다.






초원의 집 속 주인공처럼


우리 집 책장에는 옛날부터 항상 '초원의 집' 시리즈가 꽂혀있었다. 1870년대 미국 서부에서 자란 작가가 본인의 삶을 기반으로 집필한 유명 소설인데, 엄마는 예전부터 이 시리즈를 참 좋아했다. 책 속의 아이들은 자연을 벗 삼아 놀고 일하며 자란다. 우리의 일상도 가끔 초원의 집 소설 속과 비슷했다. 불편함도 많았지만, 그래도 시골로 이사 와서 가장 좋은 점을 하나 꼽으라면 자연에 어우러져 놀 수 있다는 것이다.


양평은 눈이 정말 많이 오는 곳이다. 특히 우리 동네는 언제나 서울보다 5~6도 정도 기온이 낮다. 4월에 함박눈이 내리는 것을 나는 이곳에서 처음 봤다. 눈이 내리는 날에는 다 함께 나가 주차장의 눈을 쓸어야 했다. 넉가래를 하나씩 쥐고 왔다 갔다 하긴 했지만, 사실상 아빠가 한번 움직이는 것만 못했다.


아파트에 살 때는 눈이 제대로 쌓이기도 전에 늘 염화칼슘이 뿌려져 있었기 때문에, 화단에 있는 눈을 주섬주섬 모아 눈사람을 만들곤 했었다. 그땐 눈이 조금뿐이라는 게 아쉬웠는데, 직접 치워야 할 때가 되니 눈이 아주 지긋지긋하게도 내렸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겨울을 좋아했다. 겨울이 되면 집 옆의 언덕에 눈이 쌓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없으니 그 언덕은 우리 가족의 전용 눈썰매장이 되곤 했다. 처음에는 포대자루 같은 것을 구해다 탔지만, 눈이 많이 쌓인 뒤로는 본격적으로 썰매를 사다가 타기 시작했다.



낑낑거리고 한참을 언덕을 오르면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썰매를 타고 내려오는 데는 5초도 걸리지 않았다. 썰매를 타고 내려오는 길이 매끄럽게 닦여있지 않으니, 덜컹거릴 때마다 대충 챙겨 입은 바지 속으로 눈이 한가득 들어갔다. 그래도 그 순간이 내 기억에 아주 오래도록 남아있다. 사람은 살면서 천국과 비슷한 순간을 몇 번 마주치게 된다고 생각하는데, 나에게는 온 가족이 모여 함께 숲 속의 언덕을 오르고 깔깔 웃던 날들이 그런 순간이었다.




영화 속에 들어온 기분


영화를 보면 주인공들이 눈 위에 털썩 드러누워 팔다리를 휘젓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그 느낌이 항상 궁금했다. 도시에서는 눈이 내리면 이내 검게 더러워지는 걸 많이 보았기 때문에 그 위에 함부로 누울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물론 새하얀 눈을 보면 누워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내가 털썩 몸을 맡길 정도로 두툼하게 쌓일 일도, 아무도 밟지 않은 깨끗한 설원을 볼 일도 거의 없었다.

 

눈이 아주 많이 내리던 날, 집 옆의 공터에 나가서 스노우 엔젤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아빠는 두 발을 단단히 딛고 침대에 눕듯 폭신한 눈 위에 몸을 맡겨보라고 했다. 나는 타고나기를 쫄보라서, 주섬주섬 천천히 주저앉았다. 그리고 옷 속에 눈이 들어가든 말든 팔다리를 휘저으면서 천사 모양을 만들었다. 아무도 밟은 적 없는 눈을 밟고 아무도 없는 설원에 드러누웠던 순간, 참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여름의 계곡 속에서


여름이 되면 집 근처의 계곡에 가서 발을 담그곤 했다. 겨우 종아리까지 오는 얕은 물이었지만, 아빠가 돌 몇 개를 들어 옮겨주어서 허벅지 정도의 제법 깊은 물이 되었다. 날이 많이 더울 때면 어김없이 계곡에 들어가 앉아있곤 했다. 비록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을 수는 없었지만, 계곡물은 소름 끼칠 정도로 시원했다.


가만히 물속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1급수에만 산다는 버들치가 보였다. 사람이 물에 들어갈 때면 서둘러 도망가지만,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앉아있으면 이내 경계가 풀렸다는 듯 내 발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가끔은 다리를 툭 치고 지나가는 용감한 버들치도 있었다. 집 앞에 흐르는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조금 더 큰 하천이 나오는데, 그 하천에서는 바위를 뒤집는 족족 다슬기가 붙어있었다. 큰 바위일수록 다슬기가 많아서, 나는 의미도 없이 괜히 낑낑거리며 바위를 뒤집곤 했다.






돌이켜보면 도시에 살 때는 즐거움이 굉장히 한정적이었다. 보통 동네의 번화가에 가서 친구들과 떡볶이를 사 먹고 노래방에 갔다. 가끔은 아파트 단지 앞에서 버스를 타고 영화관에 가서 비싼 버터구이오징어를 시킬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캐러멜 팝콘으로 만족하곤 했다. 쉬는 날이면 어김없이 소파에 누워 친구들과 카톡으로 실없는 이야기를 했다.


특히 나는 그네 타는 걸 아주 좋아하는데, 동네 공원에 있는 그네는 낮에는 초등학생의 차지였고 밤에는 무서운 고등학생 언니들의 차지라 자주 누리지 못했었다. 시골집으로 이사한 뒤, 아빠는 가장 먼저 마당의 나무에 튼튼하게 그네를 매 줬다. 나는 한참을 그 위에서 살랑거리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이룬 것도, 어쩌면 그때 마음껏 그네를 탈 수 있었던 덕분일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아주 깊이 실감했다. 집은 언제나 따뜻하고 정감 있으며 행복한 곳이라는 것. 자라면서 얻어낸 경험 덕분에 자연스럽게 집순이가 되었다. 시골집에서는 하루종일 심심할 틈이 없었으니까. 시골에서 자라게 된 건 정말 큰 행운이었다고, 이제와 다시금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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