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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혜교 May 07. 2023

낭만이 밥 먹여주는 시골집에서 일해요

20대 집순이의 집콕일지



인간의 기다림에 자연이 새파랗게 응답하는 그런 오월이 왔다. 이런 봄날에는 온 가족이 마당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며 오늘의 풍경에 대해 떠들곤 한다. 어떤 나무는 짙은 녹색인데, 어떤 나무는 풋사과 같은 연둣빛이라고. 산 중턱에 뜬금없이 피어있는 꽃나무가 예쁘다고. 모든 날이 행복으로 가득 찬다는 말의 뜻을 여실히 실감하는 봄이다.






열매는 마트에서 열리는 게 아니었어


처음 양평으로 이사 왔을 당시, 우리 집 바로 옆에는 높은 언덕이 하나 있었다. 언덕을 오르면 집 뒤의 숲으로 올라갈 수 있었는데, 봄이 오면 숲에는 산딸기가 잔뜩 열렸고 가을에는 밤을 주울 수 있었다. 처음으로 산딸기나무가 가득한 숲을 발견했을 때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언제나 마트 매대 위 그람 수에 맞춰 플라스틱 박스에 담겨있는 열매들만 보다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넘치게 매달린 열매를 보는 건 신선한 충격이었다. 원래 열매는 마트가 아니라 나무에 열리는 것인데, 그 당연한 사실을 도시에서는 잊고 살았다.


가을이면 숲을 산책할 때마다 밤이 발에 차였다. 피해 다니는 게 더 힘들 정도였다. 개중에는 정말 오동통하고 동그란 밤도 있었는데, 두어 개 주우면 탁구공처럼 손 안에서 굴리는 맛이 있었다. "다람쥐 같은 동물들도 먹어야 하니까 밤은 적당히만 줍고 도토리는 주우면 안 돼." 아빠의 말을 들으며 주머니에 담아 온 밤을 박박 씻어서 벽난로에 구웠다. 당시 살던 집은 북향이라서, 가을부터 난로를 피워야 했기 때문이다. 벽난로 불 조절이 힘든 탓에 작은 밤은 종종 태워먹었고 조심하지 않으면 벌레도 함께 씹힌다는 위험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직접 주워온 밤은 정말 맛있었다.





꽃 이름을 구분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요즘에는 길을 걷다 꽃이 보이기만 하면 잠시 멈춰 서서 꽃 이름을 궁금해한다. 도시에 살던 10년 전의 나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다. 서울시민일 적 내가 길에서 구분할 수 있는 꽃이라고는 벚꽃과 개나리, 철쭉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 정보마저도 그리 정확하지는 않아서, 대체로 벚꽃과 매화를 구분하지 못하고 철쭉과 진달래도 구분할 줄 몰랐다. 대충 '핑크색 꽃'으로 통칭하곤 했다.



꽃 이름을 구분할 줄 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이전에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빨간 꽃, 노란 꽃이 아니라 홍매화와 금계국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아름다움이 더 성큼 다가온다는 걸. 이제는 길가에 핀 작은 야생화마저도 눈에 띈다. 바닥에 낮게 붙어있는 쌀알처럼 작은 파란 꽃은 꽃마리. 잔뜩 모여 피는 데이지 같은 흰 꽃은 개망초.






새소리를 들으려고 음악을 줄였습니다


시골로 이사 와서 만난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을 꼽자면 단연 새소리일 것이다. 숲 속의 시골집에서는 수십 종류의 청아한 소리가 매일 창밖을 채운다. 그래서인지 요즘에는 눈을 뜨자마자 창문을 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새소리가 언제나 기분을 북돋아주기 때문이다. 일을 하기 위해 책상에 앉으면 마음이 축 처질 때도 있지만, 가벼운 정도의 '일하기싫음증'은 대체로 새소리 몇 번이면 금세 치유된다. 특히 소쩍새나 호랑지빠귀는 여름밤의 단골손님들이다. 늦은 밤까지 창문을 활짝 열어두게 하는 건 더위보다도 소리였다.

 

도시에 살 때는 참새와 까치, 비둘기 정도의 새만을 보면서 살았다. 작고 예쁜 새들은 그림이나 다큐 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존재였다. 이제는 창문을 열고 윈도우시트에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면, 파랑새나 휘파람을 불듯 우는 새까지 그림 속에서 보던 예쁜 새들이 나무에 앉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인기척을 내면 날아가버리는 탓에 여전히 이름은 알 수 없지만, 나의 업무에 굉장히 큰 도움을 주는 동료들인 셈이다. 낭만이 밥 먹여주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건 모두 이 예쁜 새들 덕분일 거다.







글을 쓰는 걸 일로 삼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마주치는 모든 행복을 착실하게 기록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떤 여름날 하늘의 색을, 어느 아침에 창문을 열자마자 마주했던 청아한 새소리를, 잔디밭에 누워 햇살을 받던 순간의 눈부심을. 양평에 살면서 깨달은 아주 신비로운 사실 중 하나는, 질리지 않는 풍경도 있다는 것이다. 매일 보는 풍경인데도 매일 같이 감탄하는 일을 십 년 넘게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늘의 색이 매일 다르고 산 위에 드리우는 구름의 거대한 그림자 모양이 매일 다르다는 걸 매일 발견하며 산다.


우리는 모두 같은 세계에 살지만, 각자의 세상은 모두 다르다. 도시에서 차로 1시간 떨어진 이곳에서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던 세상을 만났다.  이 작은 시골 마을은 내게 사람을 살게 하는 건 참 별것 아닌 순간이라는 걸 알려주었다. 어쩌면 꽃 이름을 궁금해하게 된 순간이, 새소리를 듣기 위해 음악을 줄인 첫 순간이 한 뼘씩 성장했다는 증거였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낭만은 나에게 밥을 먹여준다. 나는 언제나 자연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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