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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혜교 Dec 01. 2022

쟤는 왜 저렇게 잘났지?

아주 최소한의 갓생을 향하여


행복이란 참 상대적이다. 퇴근 후 넷플릭스를 켜고 닭강정에 맥주 한 캔을 따면 이게 행복인가 싶다가도, TV 프로그램이나 유튜브 속 반짝거리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 내가 느끼는 건 그저 ‘소확행’이구나 싶은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단순히 로고 박힌 가방이나 번쩍거리는 보석만이 ‘상대적’ 박탈감을 주는 것은 아니다. 삶의 상대적 면모는 다양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육아 예능에서 돌잡이 아기가 그 작은 몸에 꼭 맞는 사이즈의 품질 좋은 옷을 입고 있는 모습에서, 메뉴판에서 가격을 보지 않고 가장 맛있는 것을 추천받는 타인의 모습에서. 상대적 박탈감은 갑작스레 튀어나와 우리의 평안한 삶을 괴롭힌다.




슈퍼카는 아니더라도 스트링치즈 정도


스무 살 무렵에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지금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건 그리 거창한 게 아니라 1,500원 더 주고 불닭볶음면 위에 스트링 치즈를 올려도 될지, 2+1 행사하는 과자 대신 그냥 끌리는 걸 골라도 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라고. 하겐다즈까지는 바라지도 않겠다.     


 얼마 전 친구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아는 선배가 스타트업에 스카우트되면서 외제차 한 대 뽑았대. 아직 30대 중반인데!” 오, 부러운데? 생각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나는 면허가 없다는 사실이다. 면허도 없는 사람이 슈퍼카를 가진 사람을 부러워할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러나 우리는 참 쉽게 면허도 없이 슈퍼카를 탐낸다.

 



빼앗긴 적 없는, 가진 적도 없는


‘상대적 박탈감’은 참 흔히 쓰이는 말이다. 박탈감의 사전적 정의는 ‘박탈당하였다고 여기는 느낌이나 기분’이다. 그렇다면 '박탈당하는 것'은 무엇인가? 재물이나 권리, 자격 따위를 빼앗기는 것이다. 그러니 ‘상대적 박탈감’이란 결국, 아무도 내 것을 빼앗지 않았음에도 상대의 화려한 모습을 보고 무언가를 뺏긴 듯한 허망함을 느끼는 것이다. 이보다 이상한 감정이 또 있을까?

 

한국인은 한평생 상대평가 속에서 살아간다. 99점을 맞았음에도 같은 반에 100점을 맞은 친구가 있다면 반 1등으로조차 불리지 못하는 학창 시절을 보낸다.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자신에게 ‘이만하면 괜찮은데’라는 후한 평가를 내리기란 쉽지 않다.


경쟁하고 또 경쟁해서 회사에 들어갔더니 영어는 저 사람이 조금 더 잘하고, 발표는 저 사람의 발끝도 못 따라간다. 누군가는 이러한 깨달음의 과정을 ‘현실을 배우는 것’, ‘내 분수를 알게 되는 것’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상대평가에 매몰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싶다.

   

삶의 모든 것이 그렇듯 게으름도 참 상대적이다. 내 주위에는 자신을 ‘게으르미’라고 칭하는 친구가 있다. 그러나 그는 주 5일 착실하게 출근하며 꼬박꼬박 운동하고, 주말에는 취미 생활도 즐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게으르다고 여기는 이유는, 아마 그가 침대를 사랑해서가 아닐까 싶다. 흔히 스스로 게으름을 판단할 때 침대에 대한 애정도나 일상에서 침대 위에 머무는 시간 등을 고려한다. 그러나 그것은 기호일 뿐 게으름의 척도는 아니다. 한국에선 게으르니스트로 보이는 사람들도, 유럽 어느 나라에 가면 굉장히 성실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한국인은 일을 잘한다'라는 칭찬은 당연하게 딸려오는 덤이다.

   



소소한, 그러나 확실한 행복


열심히 사는 사람을 보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알람 소리에 괴로워하며 겨우 눈을 뜨는데, 어떤 사람들은 가뿐하게 일어나 침대를 정리한다. 나는 퇴근하면 옷을 거는 것조차 힘든데, 퇴근하자마자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자신에게 먹인 후 깨끗하게 설거지하고 운동까지 마치는 사람들이 있다. 갓생 브이로그 속 활기찬 사람들을 보면 ‘나와는 태생부터 달라. 나는 저렇게 살다가 진짜 힘들어서 죽어버릴지도...’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이 상대적 박탈감은 언제나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에서 온다. 희망은 바로 그곳에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 행복이란 참 상대적이다. ‘소확행’을 누릴 때 꼭 인식해야 할 것은 소소한'이 아니라 ‘확실한’ 쪽이다. 어쨌거나 이 행복이 확실하다면, 그 크기는 내가 정하는 것이다. 게으름의 척도도 마찬가지다. 오늘 나의 게으른 하루가 어느 게으른 나라의 기준으로는 갓생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상대평가를 버리고 절대평가를 취하는 것이다. 평가 기준 역시 내가 정해야 한다. 을 마무리하며 나만의 평가 기준을 공유한다.  

   

오늘 충분히 즐거웠는가?
새롭게 배운 게 있는가?
내일은 좀 더 잘할 수 있을까?




게으르니스트's 한 마디

"상대적 박탈감은 언제나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에서 온다. 희망은 바로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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