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는 동일한 패턴으로 집을 짓는다. 인간에게도 내재되어 있는 다양한 패턴이 있다. 다만 내재되어 있는 패턴이 드러나는 시기를 알지 못해서 우리는 곧잘 혼란에 빠진다. 누구나 인생의 어느 계절에는 스스로 만들어 놓은 패턴에 자신을 가두곤 한다. 그렇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거미가 아니므로 한 계절을 보내고 나면, 또 다른 계절을 맞이할 수 있다.
상견례를 하고, 우여곡절 끝에 엘리베이터 없는 6층짜리 아파트, 6층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게 되었다. 돈에 맞춰서 집을 구해야 하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베란다 밖으로 멀리 8차선 도로가 보였다. 빛과 바람이 잘 통하는 집이어서 그런대로 마음에 들었다. 그곳에서 2011년 1월 건강하고 예쁜 딸아이가 태어났다. 모든 것이 내 것 같지 않은 생활도 시작되었다. 분명 나인데, 나의 감정이, 나의 생각이, 나의 몸이 통제를 벗어나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호르몬 탓도 있었지만, 모든 것을 호르몬 탓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의 잦은 술자리와 일박 산행 등으로 자주 싸웠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부터는 회식은 더 많아졌다. 업무를 핑계로 외박을 하는 일도 생기면서 나를 휘감고 올라오는 분노도 더욱 커져만 갔다. 그가 술을 마시고 늦게 오는 날이면, 밤새도록 죽일 듯 싸웠다. 어느 날은 극도의 감정으로 나 자신에게 칼끝을 겨누며 난동을 부렸다. 또 어떤 날은 물건을 집어 던지며 격렬하게 소리를 쳤다. 그런 나의 모습이 너무 위태로웠다. 하지만, 나를 삼켜버리는 분노 앞에 나 역시 속수무책이었다.
그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3시간에 한 번씩 아기에게 분유를 먹이고, 아이의 리듬과 함께하며 하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어릴 때 키우던 개가 홀로 새끼를 낳고 주인인 나에게도 등허리를 동그랗게 구부리며 털을 새우던 모습이 나 같았다. 그야말로 본능으로 아기를 케어 해 내고 있었다.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귀하기로 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뿔뿔이 흩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복귀도 무산되고, 빚으로 장만했던 살림으로 경제적인 부분에도 타격이 오기 시작했다.
맞벌이를 꼭 해야만 했던 상황이었다. 남편은 자주 돈 얘기를 하면서 원망 섞인 하소연을 했다. 시댁에서는 결혼식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남편은 시어머니가 계획하는 예단과 결혼식을 일정을 전달했다. 그럴 때마다 너무 외롭고 힘들었다. 할 수 없이 3개월짜리 아이를 단지 내 어린이집에 맡기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심장이 온종일 불안과 긴장으로 두근두근 방망이질 쳐 댔다. 잠도 오지 않았다. 아이를 보면 눈물이 났다. 남편을 보면 으르렁거리며 이빨을 드러냈다.
출산까지 몸무게가 13㎏이 늘었는데, 출산 이후 저절로 15㎏이나 빠졌다. 육체도 쇠약해 졌다. 병원에서는 산후우울증이라는 당연한 진단이 내려졌다. 항우울제를 처방해 왔다. 우리는 서로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빈정거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남편은 산후우울증을 비웃으며 말했다.
“우리 엄마는 5살 때까지 나를 혼자 키웠다. 너만 아이를 키운다고 그렇게 유세하느냐?”
가까스로 꾸린 가정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술자리를 좋아했다. 업무와 동료들을 핑계로 자기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럴수록 거칠어지는 내 모습이 비참하고 수치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