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혜진 Nov 05. 2021

5. 절망이 벤치에 앉아 있었다.

끈질기게 희망을 찾아 헤매다가 가까스로 빛을 발견했을 때, 절망이 먼저 그곳에 와 있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지혜일 것이다. 묵묵히 삶을 살아가도 괜찮다. 때론 견디기 어려울 만큼 비참한 경험이 우리 삶에 닥친다고 할지라도 괜찮다. 다 지나간다. 그런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자신과 가장 가까워지며, 삶의 주인이 되기도 한다.     




함께 일했던 팀장님을 통해 임시직으로 일을 막 시작했다. 그 무렵 심리치료를 받고 있었다.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거울로 본 눈빛은 내가 아니었다. 약을 복용 후엔 신기하게도 미칠 것 같은 분노는 올라오지 않았다. 하지만, 온갖 해결되지 않는 생각들이 마구마구 떠올라 한순간도 쉴 수 없었다. 항우울제와 수면제로 인생을 이어 갈 순 없었다. 내가 믿었던 종교, 영성 서적들, 자기계발서, 기도법 등 무엇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단순 산후우울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혼전임신으로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모두 나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심리치료는 어릴 적 내가 겪었던 감정의 이슈들을 찾아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내면 아이 치유 기법’이었다. 상담사는 사전 상담 내용을 토대로 어린 시절 상처받았던 사건을 떠올리게 했다. 그런 다음, 어린 내가 느꼈을 법한 감정을 하나하나 멘트로 대변해 줬다.


나는 눈을 꼭 감은 채로 상담사의 멘트를 그대로 따라 했다. 상담사의 멘트가 나의 마음과 다른 부분이 많았음에도 세션을 할 때마다 내 얼굴은 눈물 콧물, 범벅이 되곤 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고, 다시 그때를 떠올렸다. 기억의 이미지가 다른 모습으로 떠올랐다. 머릿속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다른 기억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몇 차례 세션을 받은 후 현실에서도 밤낮으로 적용했다. 남편에 대한 분노를 나의 결핍으로 인지하려고 노력했다. 용기를 내어 그에게 손을 내밀기로 했다. 치료사가 알려준 대로 감정을 말로 표현해서 뱉어낸 다음, 상황을 다르게 인지하려 노력했다. 차분히 대화를 해 볼 작정이었다. 그가 조금만 도와준다면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매일 술 마시고 늦을 때마다 어떤 기분이 드는지, 얼마나 외롭고 힘든지를 말하려고 했다. 나도 노력할 테니 당분간은 가정을 위해 노력해달라고, 함께 노력해보자고 부탁하고 싶었다.      



‘오늘은 꼭 할 얘기가 있으니 꼭 일찍 와 달라’고 문자로 보냈다. 알았다는 답신이 날라 왔다. 퇴근 후 그가 좋아하는 찌개를 끓이며,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의 회사 동료였다.     


“제수씨 오늘 오랜만에 둘이서 술 한잔하려고 하는데, 좀 봐주면 안 될까요?”     


마지막 자존심과 희망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너무 화가 났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과, 남편의 체면을 생각할 틈이 없었다. 싸늘한 말투로 남편을 바꿔 달라고 했다. 동료가 민망한 기색을 풍기며 남편을 바꿔주었다. 남편은 전화를 받자마자, 불같이 소리쳤다.

                                                                                                                                               “못 들어가! 아니 안 들어가!”     


내 안의 상처들이 모두 들고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세상을 멸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너무 화가 나서 화가 나면 참지 못하고 뱉어버리는 그 말, 짧은 결혼 기간 내내 입에 달고 살던 말, 진심이 아니면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해버렸다.‘우리는 진짜 안 되나 보다. 이혼하자.’라고 문자를 보냈다. ‘그래’라고 답신이 날아왔다. 가슴에서 ‘쿵’하는 소리가 났다. 그동안 그는 그 말을 무시하거나 나중에 얘기하자고 답신을 보냈었다.     







11시가 넘은 시각, 그는 평소보다 일찍 집으로 들어왔다. 아기가 우유를 먹고 막 잠이 들고 조금 지나서였다. 그가 들어오기 전까지 이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 우리는 위태로움을 넘어서 있었다. 부부싸움을 하다가 창밖으로 누군가 뛰어내리거나 흉기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었다. 만삭에 가까운 임산부의 손에 들린, 칼날에 서린 살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가정생활을 이어가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 만큼 우리는 많이 지쳐 있었다. 깊게 베인 상처로 인해 가슴은 너덜너덜했다. 내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알 턱이 없던 그였다. 그런 그에게 많은 것을 바랐던 내가 바보같았다.      


“그래 이혼하자”라고 말하며 몸을 부들부들 떨며 서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 말을 하려 했던 게 아니라, 그의 마음을 확인하려고 했을지도 몰랐다.     



순간, 커다란 손이 거세게 뺨을 내리쳤다. 마르고 구부정한 나의 몸이 날아가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다시 몸을 일으켰을 때, 그는 더 거센 강도로 또다시 뺨을 내리쳤다. 귓속에서 삐~ 하는 기계 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몽롱해졌다.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그는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괴성을 지르며 몸을 밟고, 다시 목을 조르다가, 바닥에 내던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평균보다 훨씬 거구인 그의 체격에 소리도 내지 못하고 바닥에서 신음하며 뒹굴고 있었다. 잠들어 있던 아기가 잠에서 깨어나 울음을 터트렸다. 아기의 울음소리에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아기를 안으려고 몸을 일으켰다. 몸이 바닥에 던져진 충격과 공포로 말을 듣지 않았다.     



그가 다시 욕설을 내뱉으며 몸을 짓밟았다. 인생에서 처절하게 길고, 아프고, 비참하고, 무서웠던 밤, 엄마가 아빠에게 던져지는 것을 보고, 자지러질 듯 앙앙 울어대는 아기의 울음소리 덕분에 우리의 싸움은 영영 끝이 났다.                         





이미지출처 : 미리캔버스




함께 보면 좋은 글 1.


https://brunch.co.kr/@hyehye314/1



작가의 이전글 4. 거미는 항상 동일한 집을 짓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