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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진 Dec 17. 2021

고통에서 확실하게 벗어나는 법

진짜 긍정에 대하여

평일 저녁, 가족들과 나누는 소소한 담소, 각자의 공간에서 경험한 것들을 쏟아 낸다. 아이는 아이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어떤 날은 모두가 소란스럽고, 어떤 날은 두 사람만 소란스럽고, 어떤 날은 모두가 조용하다.

그런 평범한 어느 저녁, 아이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씩씩거리며 감정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엄마, 나 아까 낮에 너무 화가 났어. 처음으로 학급 회장이 된 게 후회됐다니까! 정말 너무 화가 나고 힘들었어."

"왜, 무슨 일 있었어?"


아이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격앙된 말투로 낮에 있었던 일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아니 수업시간이었거든, 선생님이 잠깐 자리를 비우셨어. 내가 회장이니까 아이들을 조용히 시켜야 했거든. 근데 A랑, B랑, C가 너무 떠드는 거야.

애들도 걔네한테 조용히 하라고 했는데도 계속 자리에서 일어나고 떠들어서, 내가 가서 조용히 하라고 말을 했어. 그랬더니 A가 나한테 손을 까딱하면서 '야, 저리 꺼져!'라고 했어!"  


 "아이고, 반장이 쉽지 않지 ㅠㅠ 우리 하늘이 울었겠네. 당연히 힘들지 ㅠㅠ"


아이는 울음을 터트렸고, 학교에서도 그 자리에서 눈물을 참지 못했다고 했다. 선생님께서 해당 아이들과 하늘이를 교무실로 불러, A에게는 욱하는 성격을 덜 표출하도록 말을 하고 싶을 때 1분만 참으라고 하셨고, 하늘이에겐 친구들이 잘 못을 하더라도 학급회장으로서 친절하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단다.


똑같은 상황이 발생한다면, 과연 하늘이가 감정을 참아내며 친절하게 그 친구들을 대할 수 있을까?


"엄마, 나 진짜 걔네 너무 싫어, 특히 A는 꼴도 보기 싫고, 5학년 때 걔네랑은 같은 반이 안됬으면 좋겠어"


하늘이와 나는 어릴 때부터 역할극을 했다. 역할극을 통해, 상황을 바로 보고 상대의 의도와 마음을 느끼는 것에서 내면의 갈등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되었고, 아이와는 그 자체만으로 놀이가 되었다. 역할극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진지함이고, 상황에 대한 이해와 핵심 감정 확인하고,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관건이었다.


"엄마가 A를 할게, B는 할머니가 하시고, 하늘이가 와서 우리한테 조용히 하라고 해"


"하늘이 : 야, 너희 조용히 좀 해!!"


"B( 할머니 ) : 우리 안 떠들었거든?"


"하늘이 : 떠들었잖아!"


"A(나) : 야, 저리 꺼져!!


"하늘이 : 너한테 그런 거 아니거든? 네가 왜 난리야? (시무룩)


아이는 역할극에 들어가자, 갑자기 분노가 치미는 것 같았다.


"하늘아, 근데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늘이가 그 애들한테 처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던 던 것 같은데?

그 이유가 뭔것 같아?"


"A가 내 말은 잘 안 들어, 여자가 반장 되고 나니까 애들이 말을 안 듣는 것 같다고 했어.  너무 기분 나빠! 1학기 때 은결이가 반장일 때는 말 잘 듣더니, 내 말은 무시하고!"


"하늘아, 만약에 너랑 친한 친구 중에 아린이나 효주가  일어나서 떠들었다면, 하늘이가 가서 어떻게 했을 것 같아? 그때도 그 말투로 말했을까?"


잠시 골똘히 상황에 대해 생각하고는 대답했다.


"음.... 아니, 안 그랬을 것 같아. 웃으면서 조용히 좀 하자!라고 했을 것 같아"


"그렇지? 그 친구들한테는 그렇게 안 했을 거야.

1학기 때 반장이었던 은결이랑 A.B.C도 친하지? "


"어. 엄청 친하지, "


"그럼, 은결이는 A.B.C가 떠들 때 어떻게 말했을 것 같아?"


"좋게 얘기했을 것 같은데?"


" 친하니까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을 거야. 더 조심했을 수도 있고,  장난스럽게 말했을 수도 있고,  

A.B.C는 은결이랑 친하니 말을 들어줬겠지.

아린이랑 효주가 하늘이 말을 잘 들어주듯이

그런데, 그 친구들, 너희 반 말썽꾸러기 아냐? 수업시간에도 선생님이 계셔도 떠들지 않아?"


"엄청 떠들어, 선생님도 힘들어하셔"


"선생님 말씀도 안 듣는 아이들이, 반장 말이라고 잘 듣겠어?"

"아~~ 그러네!! "


"하늘이가 가서 조용하라고 말한 건 참 잘한 것 같아. 반장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거니까,  하늘이는 하늘이의 역할에 충실하면 돼. 그래도 안 되는 건 하늘이 잘못이 아니야. "


"엄마, 생각해보니까 내가 가서 좋게 말했으면, B가 그냥 알았다고 했을 것도 같네. A도 뭐라고 하진 않았을 것 같고,  근데, A는 여자가 반장이라서 애들이 말을 안 듣는다고 해서 기분이 나빴어"


"하늘아, 근데 잘 생각해봐. 그게 사실이야? 그 친구가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그 말이 사실이야?

담임선생님도 여자분이신걸? 그리고, 여자라서  말을 안 듣는다면, 그건 누가 이상한 거지?"


"그러네, 엄마!!!"


그 상황에 대한 감정이 남았는지 점검하기 위해 다시 한번 역할극을 했다.


"하늘 : 너네 조용히 좀 해??"


"나 : 꺼져버려!! "


"하늘 : 그럼 난 꺼질 테니까 조용히 해라~~ ㅎㅎ"


역할극이 끝나자, 하늘이의 마음은 상황에서 자유로워졌다. 맑은 하늘을 뒤덮고 있던 먹구름이 일순간 사라진 것이다. 정말이지, 감쪽같이 괜찮아졌다.





진짜 긍정이란,


 진짜 '긍정'은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흔히 우리가 하는 '긍정'의 노력들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억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불편한 감정이 싫어서 '괜찮은 척' 하면서 재빨리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나 다른 상태가 되려고 하면,  해결되지 않은 생각과 감정들은 그대로  남아 문제를 일으킨다.


"네가 반장이니까 이해해야 해", "친구를 미워하면 안 되지.", "그런 애들은 무시해버려"

라고 말했다면, 아이는 불편한 감정을 그대로 두고, 그런 노력을 시작한다. 하지만, 너무도 솔직한 마음을 자신의 뜻대로 따르게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이는 노력하다가 결국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을 미워하고, 죄책감을 느낀다.


"나는 반장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걸까?" "친구를 미워하는 건 나쁜 거야." 자존감의 상실로 이어진다.


또한, 같은 상황이 반복됐을 때, 억압됐던 감정들이 올라온다. 그전보다 한층 더 깊게,  감정이 시키는 대로 화를 내거나, 피해버린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결국 자신을 탓하거나 타인을 원망하게 된다.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게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스피노자



고통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내 입장에서 빠져나와, 갈등의 상황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의 입장을 객관적(반드시 나를 포함해야 한다.)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오은영 박사님이 출연하는 육아 프로그램인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 의뢰인이 녹화된 영상을 확인하는 장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의뢰인은 영상을 통해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자신과, 아이, 그리고 가정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그것을 통해 상황에 대한 바른 이해와, 인식이 생겨난다.


엄마는 어린 시절, 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이년아, " "야", "병신"이라고 불렀다. 화나 나면 온갖 욕설을 퍼부었고, 엄마의 얼굴은 늘 화가 난 사람 같았다. 엄마의 찡그린 얼굴, 나를 보는 눈빛, 그 모든 것에서 나를 향한 사랑은 찾아볼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언제나 그런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욕설을 내뱉으며 나를 때리는 모습, 나에게 병신이라고 말할 때, 엄마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짜증이 가득했다. 그런 엄마를 인정한다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 엄마니까, 지난 일이니까, '라고 이해할 수 없었다. 억지로 인정하려고 하면 할수록, 내면에서는 강한 거부감이 올라왔다.


그 모든 기억 속에는 짙은 고통이 함께 있었다. 처절하게 짓밟히고, 무시당할 때마다 나 자신이 징그러운 벌레처럼 느껴졌다. 엄마는 내 머리를 '대가리'라 불렀고, 입을 '아가리'라 불렀다. 눈은 '눈깔'이 됐다. 당시 내가 느꼈던 모든 감정은 시간이 지났다고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나란 사람의 정체성이 되었다. 사람들과 어울려 웃고 있지만, 내면엔 언제나 나 자신을 싫어하는 불행한 내가 있었다.


그 안의 나와 엄마를, 객관적으로 보기까지 많은 눈물을 흘렸다. 모든 감정을 허용해주었다. 방바닥에 주저앉아 아이처럼 다리를 동동 구르며 울고 또 울었다. 엄마가 무서워서 울지도 못했던 어린 나에게, '울어도 괜찮다'라고 말해 주었다. 내면의 기억을 억지로 꺼낸다는 것은 그 기억 안에서 울고 있는 나를 꺼내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눈물은 그 사람이 엄청난 용기,
즉 시련을 받아들일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도대체 어떤 마음이었길래, 자신이 낳은 자식들을 그렇게 대했을까?'


내 마음을 충분히 느끼고 위로하자, 저절로 그런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엄마의 모습이 다시 보였다.


나를 쏘아보던 눈빛 속에 담긴 그녀의 지독한 고통이,

나를 보며 내뱉던 길고 긴 한숨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녀가 내뱉는 욕설과 모든 분노는 어디에서 왔는지,

풀 한 포기 나지 않을 것 같은 척박한 그녀의 가슴이 절절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모든 것은 사실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나를 향한 미움이나 인정하지 않는 것 과는 거리가 멀었다.

역설적이게도 그 반대였다.


그저 살아내기에도 힘에 겨웠던 시간들,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몹시 아팠던 시간들이 그녀에게는 그때였다. 엄마는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그저 살아내는 것밖에는 방법을 몰랐다.   


그 사실은 지독히도 오랜 시간을 고수해 온 뿌리깊은 신념이 흔들리는 것을 의미했다.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믿음'이 결국 가짜였다는 것


나라는 존재에 대한 부정이 긍정으로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고통은 그렇게 의미를 찾지 못하고 서서히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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