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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진 Dec 16. 2021

3-4. 인생은 신이 벌이는 거대한 게임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행복할 것!  

인생이 정말 게임이라면, 지금 닥치는 고난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삶이 거대한 게임의 세상처럼 전혀 다르게 다가오지 않을까? 게임의 목적은 당연히 레벨업을 달성하는 것이다. 가진 모든 무기를 온전히 사용하고, 전력을 다해야 그 판을 깨뜨릴 수 있다.

      

인생이라는 거대한 게임에선 미션은 딱 한 가지, “지금 상황이 어떻든 너는 반드시 그 안에서 행복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행복한 척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다시 직장인이 되었다. 여기저기 회사를 옮겨 다니며 자연스레 내 의지를 내려놓게 되었다. 10여 년의 시간 동안 스무 번도 넘게 같은 상황을 반복한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자영업을 시작한 지 1년도 안돼서 코로나 19라는 세계적인 펜데믹이 발생한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직을 할 때마다 미래를 생각했다. “이 회사에 오래 다녀야겠어. 이 정도면 아이를 키우면서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겠어. 몇 년 후 여기서 어느 직급 정도는 되겠지” 하지만, 번번이 생각지도 못한 쓴맛을 보며 그곳을 떠나와야 했다.


평소에 농담 삼아'회사에 짐을 풀기 시작하면, 이상하게 그만둘 일이 생기는 징크스가 있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랬다. 회사에서 자리를 잡을 시점이면 고비가 왔다. 부도가 나는 등, 그 이유는 다 달랐다. 하지만, 시작부터 과정까지 공통점이 있었다.


마치 반복되는 게임 같았다. 일정한 룰이 정해져 있는 게임의 세상처럼, 상황이 펼쳐졌다.  


게임의 룰



「가장 힘든 상황,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일’이 주어진다. 그것을 다 극복했을 때, ‘행복을 보는 눈이 생김’과 동시에‘멘 탈의 강도’가 높아진다. 무기가 하나씩 생겨나는 것이다. 잠시 느슨해진 시점에 어김없이 다른 페이지로 넘어간다.      

다시 다른 각도로 ‘가장 힘든 상황,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일’이 주어진다. 그것을 극복하고 나면, ‘행복을 보는 각도’가 달라져 있고, 멘 탈의 강도’는 더 높아진다. 다음 단계로 올라가려면 필요하다. 게임에서 이겨야 다음 판으로 넘어가, 무기를 하나씩 획득하고 레벨 업이 되는 것과 같다. 이기지 못하면, 처음으로 돌아가 상황을 반복한다.      

레벨 업이 되는 기준은 돈과 무관하다. 미션은 딱 한 가지,“지금 상황이 어떻든 반드시 그 안에서 행복을 발견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레벨 업이 되었는지, 아닌지를 확실히 아는 방법은 간단하다.‘지금, 이 순간 행복한 가?라는 것, 행복한 척해봐야 소용이 없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수없이 반복되는 좌절을 게임이라 여겼다. 상황을 뜻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상황은 그저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나의 가장 연약한 곳을 공략하고, 가장 어려운 순간 다시 어디론가 이끌었다. 이런 나를 지켜보던 주변인들은 언젠가부터 그것을‘능력’이라고 했다. 행복해지기로 결심하고 상황은 저절로 주어졌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럴 능력이 없었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행복을 선택하는 것뿐이었다.     


서울의 외제 차 고객센터에 입사한 것도 이력서를 수십 통을 넣어도 면접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아서였다. 그동안 기적적으로 취업이 되곤 했었지만, 점점 기업에서 꺼리는 나이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럴듯한 구인광고와 번쩍번쩍해 보이는 외제 차 브랜드의 고객센터였지만, 처우는 그와는 정 반대였다. 급여 또한, 최저임금 수준에도 못 미치는 금액이었다.  첫 급여 명세서를 받아보고 나라는 사람의 가치가 점점 아래로 하락하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박봉인 것도 모자라 버스와 지하철, 도보로 한참을 걸어서 출퇴근해야 했다.

      

그곳엔 센터 생활을 빛내주는 같은 기수의 동기들이 있었다. 동기라는 공통점만으로도 우리는 금방 친해졌고 스스럼없이 서로의 상처를 털어놓고 보듬어 주는 사이가 되었다. 동기 중 한 명은 빛을 보진 못했지만, 과거 ‘연예인’으로 활동을 했던 친구도 있었고, 인생에서 ‘이혼’과 관계로부터 겪은 상처로 인해 오랫동안 집안에서 생활하다 세상과 마주하기 위해 첫발을 내디딘 친구도 있었다. 다양한 경험으로 여러 가지 일을 접해 보고 인생의 베테랑이 된 언니도 있었다. 덕분에 새로운 지역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모두 입담이 좋았는데, 특히 가수로 활동했던 그녀의 이야기는 딴 나라의 이야기처럼 흥미진진했다.

사회에 다시 발을 내디뎠다는 그녀가 마음을 열어 가는 모습은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그녀와 나는 신분당선을 타고 함께 퇴근했다. 덕분에 퇴근길이 즐거웠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알면 알수록 사랑스럽고 예쁜 친구였다.  그녀들 덕분에 센터에서의 생활은 매일매일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전화로 사람을 상대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흔히 말하는 ‘진상’ 고객들도 간혹 있었지만, 그동안 나의 경험들이 상담업무를 하는데 지혜를 발휘하여 재미있게 일을 할 수 있었다.

     

나의 왼쪽 가슴에 혹이 만져진 것은 그전부터였지만, 그 무렵 친구가 먼저 건강보험공단에서 진행하는 ‘유방암’ 검사를 받고 와서, 몇 차례에 걸쳐서 검사를 받도록 종용했다. 계획보다 빨리 친구로 인해 등 떠밀리듯이 검사를 받아보고 나오는데, 문득 병원으로부터 전화를 받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장혜진 님이시죠? 큰 병원으로 가야 할 것 같아서 연락드렸어요.”라는 검진받은 병원으로부터 검사 결과의 심각성을 예고하는 전화였다.      


얼마 후 병원으로부터 거짓말처럼 전화가 왔다. 고객센터에서 상담하다가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타이밍도 기가 막혔다. 고객센터에서는 업무 시간 개인적인 통화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나 같은 신입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장혜진 님이세요? 유방암 검진받은 oo병원인데요.”

 “네, 저 혹시 암 의심인가요?”

 “어떻게 아셨어요?”

 “느낌이 좀 그랬어요.”     


그렇게 예상하지 못한 일로 고객센터를 그만두게 되었다. 수술 후 몸이 회복되자마자 야심 차게 개업한 카페도 폐업해야 했다. 그다음,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일은 누군가가 “더는 이 일은 못 하겠어요”라고 손을 들고나간 자리, 막대한 양의 업무와 책임이 있는 그런 일이었다. 인수인계는 단 3일밖에 진행되지 않았다.






첫 출근과 동시에 입이 떡 벌어졌다. 또 시작이군.’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게다가 인수인계 기간이 3일이라니, 3일 안에 앞으로 맡게 될 업무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 전임자가 달력에 시기별 업무 리스트를 체크해주고, 앞으로 처리해야 할 업무 등을 정리하며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샘플로 남기며 대비를 했다. 회사에서는 힘든 부분은 도와줄 테니 언제든 얘기하라고 했지만, 많은 회사를 경험했던 터라 이제는 분위기만 봐도 저절로 알아 지는 것들이 많았다. 다들 자신의 업무를 쳐내느라 정신없었다. 전임자가 남기고 간 업무 파일과, 미처 처리하고 가지 못한 민원들, 잘못 정산된 청구서 등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첫째 날부터 전화기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이번 업무는 그동안 해왔던 모든 업무가 집약되어 있었다. 고객센터처럼 전화는 계속 들어오고, 그것을 우선 처리한 다음, 공사가 필요한 것들은 공사팀으로 전달하며 결과까지 책임지고 체크해야 했다. 주택관리 회사인 그곳은 관리 사무실을 둘 수 없는 소규모의 빌라 같은 공동주택의 대행 업무를 하고 있었다. 나는 특정 두 개 도시의 담당자였다. 60개가 넘는 건물에, 1천 세대가 넘는 세대의 건물 관리의 기본사항과 관련 민원 및 관리비 정산까지의 업무였다.     


매월 15일부터는 각기 다른 건물의 관리비 부과를 위한 선행 작업, 입금 체크, 공과금 납부 등이 있어 더 바쁜 기간이었다. 낮에는 전화를 받고 민원처리를 하느라 다른 일에 손댈 틈이 없었다. 틈틈이 업무의 비효율적인 부분을 파악하며 어떻게 하면 빠르고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발견한 것들은 실행해 옮겼다. 늦은 밤까지 야근하거나 주말에도 회사에 나왔다. 분산되어 있는 데이터를 통합하고 정산 프로그램과 엑셀의 연동 기능 등을 찾으니, 효율적인 일처리가 가능하게 됐다.     


하필 내가 입사한 2020년 여름은 서울을 비롯한 경기 남 북부, 강원도 등 많은 지역에서 한 달이 넘게 집중호우와 태풍으로 인해 쉴 새 없이 비가 내렸다. 그로 인해 침수와 정전 등으로 관리하는 건물이 침수되기도 하고, TV와 전기가 끊기는 등, 예상하지 못한 일들로 인해 전화는 북새통을 이루었다. 밤에 잠을 자려고 누우면 해결되지 않은 일들이 떠올랐고, 꿈속에서도 일했다. 머릿속엔 온통 일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출근을 했고, 출근해서도 계속 일 하니, 하루 24시간 내내 일을 하는 것만 같았다.    

 

당연히 회사의 이직률은 최고였다. 대부분 일주일도 안 되거나, 1~2일 이내에 빠른 판단을 하고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렇지 않더라도 한두 달 버티다가 결국은 그만두었고, 그것이 짧은 기간의 미숙한 업무처리 등의 실수로 이어져 다음 입사자의 업무에 차질이 생겼다. 악순환이었다.      


자영업을 했던 터라 매달 월급이 꼬박꼬박 나온다는 사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있었다.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과 ‘좋은 동료’들 덕분에 가까스로 회사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내가 물어보는 것들은 최대한 도와주려고 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하루 중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점심시간엔 잠깐 사무실 주변을 산책하며 머리를 식혔다. 관리비 부과가 끝나면 동료들과 모여 맥주를 마시고, 한 달의 피로를 흘려보내는 것이 즐거웠다.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그러는 사이, 길고 긴 장마도 끝이 났다. 대부분 관리비 고지 기간엔 야근했지만, 그동안 구축해 놓은 자가 시스템 덕분에 야근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어느새 회사에 대한 불신에 싹이 돋아 있었다. 대표님의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람 귀한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최근 1~2년 사이 급속도로 성장했다는 회사의 시스템과 내부 관리 상황은 엉망이었다.      


대표님과 면담을 할 때마다 통증을 호소했다. 누가 보아도 내부의 안정이 시급한 회사에 대표님은 오직 건물 수를 늘리는 것밖에는 관심 없었다. 그리고 대안은 인원 충원이었는데 처음엔 인원을 충원할 여력이 안 된다고 했던 회사가 충원 결정을 내린 이후엔 버티는 사람이 없었다. 입사 한 달간은 맡았던 업무의 3분의 1만 업무를 넘겨주고 천천히 적응하는 방식으로 전환을 하니 사람이 남게 되었다. 입사한 지 3일 만에 모든 것을 끌어안고 책임져야 했던 나와는 같은 조건에 전혀 다른 대우였다.      


업무를 지시하는 방식이나, 회의하는 방식도 마찬가지였다. 처리하기 버거운 일을 끙끙거리다가 고민 끝에 도움을 청하면, 일 처리가 되기는커녕 그 자리에서 면박을 듣기도 했다. 딴에는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아무런 인정도 받지 못하는 기분이 들었다. 또다시 심각하게 이직을 고려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회의감마저 들었다.      


그곳에는 같은 마음을 느끼면서도 참아 내는 분들이 있었다. 모두 주부 사원이었다. 초등학생부터 대입을 앞둔 수험생을 둔 엄마들이었다. 힘들지만,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며 그 안에서 '참을 인' 자를 아로새겨 가며 가족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결국, 사랑하는 존재를 위한 선택이었다. 함께 일하는 분들과 마음을 나누고 나니, 더 깊이 그분들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다른 선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사랑하는 마음에는 크고 작음이 존재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사랑해서 머물러있고, 누군가는 사랑해서 떠난다는 대중가요 가사처럼 다른 선택만이 있었다.


세상살이가 미숙하고 아파서, 보편적인 기준에 나를 구겨 넣을 수 없었던 시간 들,

또다시 그런 시간들의 연장선에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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