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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진 Dec 13. 2021

3-3. 가게는 망했지만, 행복했다.

그곳에 사랑이 있었다.

    

때로는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예상치 못한 일들을 마주하기도 한다.‘왜, 하필’,‘지금, 나에게??’라는 생각에 빠져드는 순간, 불행의 문턱에 발을 올려놓게 된다. 잠시 상황과 떨어져 전체를 보면, 모든 사건은 삶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양한 타이밍이 있을 뿐이다.       




2020년 02월, 겨우내 움츠렸던 공원에 생명이 움트기 시작할 무렵, 중국발 우환 폐렴 소식이 들리더니 급속도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곧 바이러스는 코로나 19라는 이름을 달고, 그들의 세계에서 특수 비밀코드를 부여받은 것처럼 세계 곳곳에 널리 퍼졌다. 카페가 개업한 지 1년도 안 되는 시점이었다. 반짝하고 성장했던 매출이 비수기보다 훨씬 더 줄어들었다. 공원 언덕의 벤치에는‘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영하의 추위에도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시는 동네 어르신들의 만남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었다. 어르신들마저 공원을 찾지 않았다.      


“시간이 좀 지나면 나아질 거예요, 메르스 때도 그랬어요. 버팁시다!”라는 말이 국내 ‘네이버 NO. 1 자영업자 커뮤니티’,‘아프니까 사장이다’의 위로의 댓글로 달리기 시작한 것도 두 달이 지났다. 코로나의 확산 세는 줄어들기는커녕,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를 휩쓸었다.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의 위상도 맥없이 무너뜨리며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K 방역이라는 특수성을 알렸다. 그 결과 주변에 코로나 환자가 발생했다는 문자가 오면, 주변 상권은 초토화됐다. 커뮤니티에는 ‘누가, 누가 매상을 제일 죽 쒔나’를 겨루듯, 긴 한숨의 댓글들이 오고 갔다. 손님이 있을 때 빨리 가던 카페의 시간은 ‘정지’된 것 같았다. 아메리카노 2잔으로 마감을 하고 간 날도 있었다.     


마스크를 써야 하는 나날들이 늘어날수록, 마음은 점점 고통스러웠다. 사소한 일상이 몹시도 그리웠다.

우두커니 창가에 앉아 적막한 공원 골목을 바라보며, ‘희망’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큰 힘을 주고 있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갑자기 불어 닥친 코로나바이러스의 공포에 ‘희망’마저 사라진 것 같았다. 감히 길고 긴 전쟁, 일제의 침략을 당하며 나라를 잃고 희망까지 송두리째 빼앗겼을 한민족의 고통을 헤아려 볼 지경이었다.    


카페를 찾아오는 단골들이 있었지만, 월세나 관리비를 내고 나면 남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임대료조차 내지 못할까 봐 두려워 잠도 오질 않았다. 코로나보다 더 두려운 것은 월세 납부일이었고, 그 두려움이 너무도 큰 나머지 정작 코로나에 감염될까 두려운 마음은 느낄 수조차 없었다. 이미 가게를 오픈할 때 남동생에게 빌려 쓴 돈과 그동안 이직을 겪으며 서서히 증가해온 대출금도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주변의 대부분의 가게가 울며 겨자 먹기로 배달을 시작했다. 그조차 배달 수수료를 내고 나면, 남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울상이었다. 나 역시 배달을 생각하긴 했지만, 배달을 하려면 필요한 용기 및 기구 등 준비해야 할 것이 많은 데다, 무엇보다 상담을 위해 찾아오는 손님이 40%나 됐다. 상담하는 시간에 배달을 받지 않는 기능도 있었지만, 배달을 도입하는 의미도 없을뿐더러 배달의 경우 커피와 음료보다 차별화된 디저트가 관건이었다. 몇 가지 케이크나 크루아상 등 디저트 메뉴가 있긴 했지만, 배달할 정도의 메리트는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월세와 운영비는 밀리지 않고 벌리는 것에 감사하자’라고 간신히 마음을 다독였다. 다행히 코로나 자체보다 온갖 괴담이 더 두려웠던 시기에도 매일매일 커피를 사 가는 분들이 있었다. 카페를 아지트 삼아 매일매일 커피를 마시러 오는 분들도 있었다. 주문과 동시 카드를 내밀었다. “사장님도 한잔 마셔. 안 마시면 내일부터 안 온다…"라며 고마운 협박을 하셨다. 일부러 타로카드를 보고, 다른 손님을 응대하는 사이, 테이블에 돈을 올려놓고 가시기도 했다. 그분들 덕분에 힘을 얻었다. 디저트도 보완하고, 새로운 메뉴도 추가하며 메뉴판을 재구성했다. 내부 방역에도 힘쓰며 꾸준히 운영을 이어갈 수 있는 것에 감사할 수 있었다.



                                          

                                                                                            

궁지에 몰린 것처럼 느껴질 때일수록,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냉정함은 상황을 올바른 시각으로
보게 해 준다. 냉정함은 선택의 가능성과,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하며, 상황을 해결해 나갈 힘이 내 손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용기가 필요하다. 개인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전체라는 관점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더 멀리 보고,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K 방역이 지속적인 효과를 보이고,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슬슬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야외 테이블에는 파라솔에 앉아 공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즐기던 계절 손님들도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이전처럼은 아니지만, 매출은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코로나가 종식되지 않는 한, 승산이 없는 싸움 같았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야심 차게 시작했던 사업도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가슴에 손을 얹고 무엇이 문제인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냉정하게 생각해 봐야 했다. 물론 코로나19가 나뿐 아니라, 수많은 자영업자를 힘든 상황으로 내몰았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하지만, 코로나가 터진 지 몇 달이 되었지만, 잘 되는 곳은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였다. 같은 동네에서 비슷한 메뉴의 식당 중, 한 곳은 여전히 테이블이 꽉 차 있었고, 또 한 곳은 규모가 훨씬 크고 쾌적했음에도 텅 비어 있었다. 직접 가서 보거나, 주변 사람들의 견해를 들으면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만이 가진 특수성과 기술도 없는 채로 겁도 없이 장사를 시작하다니, 참으로 용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었다. 경험이 부족했던 탓에 권리금과 인테리어 비용으로 초기 자금을 너무 많이 들였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지 못해 여유자금 부족의 결과로 이어졌다. 커피와 함께, 타로를 접목한 것이 이색적이라 판단했지만, 경험이 없던 탓에 오히려 그것이 발목을 잡았다. 상담하다가 커피를 내리는 상황이 매번 발생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한 상황이 되었다.     


결정적으로 나의 선택에는 언제나 커다란 오류가 있었다. 나 자신의 고유한 가치와 목표보다 타인의 시선이 먼저였다. 카페는 진심으로 원했던 일이 아니었다. 내가 진짜 원했던 것은 타로카드라는 도구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에게 그럴듯하게 보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무리하게 탄생시킨 공간이 바로 카페였다. 그 누구의 시선보다 나의 가치와 철학이 우선이었다면, 사람들이 오가는 도심의 한 복판에서 타로를 펼치며 경험을 쌓았어도 충분했을 것이다.      


어쩌면 사람들의 말처럼 타로를 주력으로 해서 돈을 더 받는 것이 2,500원짜리 커피를 파는 것보다 나을지도 몰랐. 하지만,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한계를 지닌 채로 누군가의 운명을 말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었다.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새로운 부분이었다.




‘타로가 미래를 알았으면, 카페를 하지 않았겠지…’     



모든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쏟아부은 정성과 돈을 경험이라는 가치와 바꾸기까지 잠시 몸살을 앓았다. 코로나라는 특수한 시기인 만큼 헐값에 카페를 내놓았다. 헐값이라도 매매가 쉽지 않은 시기였다. 부동산이 중간에서 내놓은 가격보다 훨씬 더 높게 올려놓고, 이득을 챙기려 했다가 신뢰를 잃기도 했다. 결정은 확고했다.  


2020년 6월 말 일자로 운영을 종료하고, 7월 1일 새로운 회사에 출근을 확정 지었다. 가장으로써 모든 것을 지킬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 기간, 많은 사람의 설득을 받았다. 다른 업종으로의 전환을 도와주겠다는 고마운 친구도 있었다.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들인 돈이 아깝지 않냐? 얼마 들었냐?, 그동안 해 놓은 게 아깝지 않냐. 그래도 이렇게 손님 있는 가게 요즘 드물다. 가게 문 닫아 놓으면, 절대 안 나간다. 너무 싼 가격에 내놓은 게 아니냐. 나갈 때까지라도 문은 열고 있어라.”     


모든 것을 고려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2020년 6월, 가게를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6월 말일까지 종료 소식을 알렸다. 매장에 쿠폰을 보유하고 계신 손님들에게도 사용하시라고도 안내했다. 단골이 된 지 얼마 안 된 손님들에게도 설명했다.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울컥하고 눈물이 나올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제법 많은 사람에게 소식을 알리고 있었다. 손님들은 소식을 듣고 아쉬움을 표현했다.      


“유일하게 강아지랑  같이 들어와 커피를 살 수 있는 곳이었어요.”

“문 닫기 전까지 계속 올게요.”

“우리 동네에서 제일 좋아하는 공간이었는데, 너무 아쉬워요.”      


초창기부터 자주 오던 한 연인 손님은, 카페를 오픈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는데, 일본에 여행 가셨다가  선물을 사 오셨다. 여행지에서 생각이 나서 사 왔다며 나와 하늘이를 위해 각각의 선물을 전해주셨다.

이후에도 너무 맛있어서 하늘이가 생각이 났다며 빵을 건네주셨다. 오실 때마다 하늘이의 안부도 잊지 않았다. 영업 종료 소식을 듣고는 매우 안타까워했다.      


카페를 아지트라 부르며 제집 드나들 듯 오시던, 어느새 호칭마저 ‘언니’라고 바뀌어 있던 언니들은 문을 닫기 직전까지 매일 커피를 마시러 나왔다. 끝까지 아지트가 없어지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카페는 매매가 되지 않은 채 마지막 영업일 6월 30일이 되었다. 놀랍도록 많은 분이 카페를 방문했다. 쿠폰이 남아서 찾은 분들도 너무 반가웠다. 마음 같아선 폐업 이벤트로 음료를 모두 무료로 나누어 드리고 싶었다. 하루 종일 눈가가 촉촉했다. 여러 가지 감정이 복받쳐서 온몸에 전류가 흐르고 있는 것처럼 찌릿찌릿했다.


 마지막 카페의 영업일, 테이블은 손님으로 꽉 차 있었다. 누군가가 폐업 사실을 손님들에게 굳이 알릴 필요가 있느냐고 했었다. 폐업하는 사실을 손님들이 알게 되면, 남은 기간 장사가 안될 게 뻔하고 했다. 폐업할 때는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하지만 결과는 그 반대였다. 마지막 날이라고 아쉽다며 오히려 카페를 찾아왔다.      


단골 언니들과 한 분, 한 분 포옹을 하며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아무도 찾지 않던 그때, 정적을 깨고 문을 열고 들어오던 언니들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만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는데, 가게의 문을 닫아 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곳곳에 나의 손때가 묻어 있는 공간이었다. 개업 때 받은 화초들을 가꾸며 화초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정이 들었다. 이것이 과연 맞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결정은 확고했다. 코로나는 우리의 기대처럼 쉽사리 물러가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진심으로 원하는 일을 찾아야만 했다.     


해 질 무렵 서서히 냉장고에 있는 식자재를 비우기 시작했다. 폐업 진행 중이었다. “띠링~”하고 문이 열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카페를 오픈하고 초반부터 조건 없이 감동하게 했던 연인이 꽃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나에게 꽃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서로 입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눈빛을 주고받으며 말했다.    

 

“이 꽃은 라그라스라는 꽃이에요. 꽃말은 집에 가서 꼭 찾아보세요. 사장님과 잘 어울리는 꽃말이에요.”     


이 연인이 이해가 되지 않었다. 무료로 타로도 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일전에 우스갯소리로 “혹시 무슨 종교단체나 그런 곳에서 전도 나오신 건 아니시죠?”라고 물어본 적도 있었다. 아무 조건 없이 베푸는 그 마음이 신비했다. 누가 누구에게 베푸는 것인지 순서도 뒤바뀌었다. 장사를 하고 나서 더더욱 그런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대부분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선의를 베풀었다.      


“사장님 지금 가게 정리하고 계시죠? 오늘은 메뉴 주문 안 하고, 저쪽에 좀 앉아 있다가 갈게요.”라고 말하며, 역시 계획된 행동인 것처럼 늘 앉던 안쪽 자리로 이동해 나란히 앉아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냉장고를 닦으며 눈물이 났다. 이제 문을 닫게 될 카페의 마지막을 빛내 주고 있는 그분들의 아름다운 마음이 느껴졌다. 마음이 따뜻했다.      

     

조금 후“띠링~”하고 또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종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도 단골손님이었다.      


“사장님 오늘 가게 마지막 날이라면서요? 이거 할 때 인테리어하고 들어오지 않았어? 내가 계약할게요. 만약에 변심하면 환불해 주는 거야?”라며 가 계약금을 지불했다. 여자 친구가 운영을 해 보고 싶다고 했다고 했다. 드라마틱한 일이었다. 거짓말처럼 카페가 매매됐다. 마지막 영업일 저녁 7시쯤이었다. 가게가 매매되지 않으면 월급의 절반을 비어 있는 가게의 임대료와 기본 관리비를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이후 코로나의 확산 세는 더욱 심해졌고, 위기 경보 단계도 계속 높아졌다. 새로운 지침이 계속 생겨났고, 카페 같은 곳은 매장에서 손님을 받지도 못하게 되는 등 상황은 점점 불리해졌다.

뉴스를 볼 때마다 한숨이 나왔다. 계약하면서 헐값에 가게를 매매하는 이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간곡히 당부드렸다. '코로나로 인해서 피해를 덜 입으시기를 바란다고… 동네의 특성상 디저트나 다른 먹거리의 비율을 높이거나, 다른 메뉴를 파는 것도 추천한다'라고 말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가게는 또 다른 주인을 찾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때 폐업하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냐고 했다. 그 결정이 타로에서 온 것인지 물어보기도 했다.


타로를 펼쳐 본 것은 맞지만, 타로를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각자의 몫이었다. 사람들은 타로의 결과보다 자신의 느낌으로 이미 답을 알고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러나, 선택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나 역시 내 안에 어떤 느낌이 강하게 움직이게 했다. 점점 내 안의 느낌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선택이, 최고의 선택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무언가 어떤 힘이 삶을 이끄는 것 같았다. 마지막 날 저녁, 천사 같은 연인 손님으로 전달받은 꽃,‘라그라스’의 꽃말은 바로 이것이다.     



“당신의 친절에 감사합니다.”






엮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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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Meruyert Gonullu 님의 사진, 출처: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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