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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진 Dec 07. 2022

 딸아이가 바람났다.

며칠 동안 나는 신경질이 났고, 까닭 없이 슬펐다. 두 번째 암 선고를 받았을 때에도 1박 2일을 못 넘기던 우울감이 내내 그곳에 있었다.


"엄마, 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어쩐지!!

며칠 전부터 딸아이의 행보가 수상했다. 주말만이라도 나와 함께 자겠다고 버티던 아이가 콕 박혀 있다가 굿 나이트 인사만 하고는 돌아갔다.  딸아이의 삶에 대부분을 차지하던 내 자리가 조금씩 작아지기 시작했을 때, 연날리기를 하듯 잡고 있던 줄을 더욱 느슨하게 만들었다. 때때로 아이에 대한 마음이 커져버리는 것을 감지할 때면, 위험신호로 받아들였다.


"네가 먼저 고백해봐! 걔도 너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딸아이는 용기를 냈고, 곧 연애를 시작했다. 1학기 때도 잠깐 남자 친구가 생겼었지만, 이번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딸아이의 아침이 달라진 것이다. 도파민이 분비되는 것인지 깨우지 않아도 눈을 번쩍 뜨고 가뿐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옷차림에 신경을 쓰는 시간은 많아졌다.


나에게 보내오는 카톡은 줄어들다가 굳어져 버렸다. 저녁에 뭐가 먹고 싶다거나 다이소에 가야 한다는 등, 필요에 의한 것들이었다.  느슨하게 잡고 있던 실타래가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마구마구 풀리다가 팽하고 끊어져 버리는 것 같았다.




나는 딸아이와 함께 하는 모든 시간을 누리고 있었다. 그 애와 함께 하는 대화, 음식, 투정 부리며 토라지는 얼굴이나 무심하게 던지는 미소, 흔한 짜증들마저 그랬다. 어릴 땐 아무것도 아닌 일로 떼를 쓰고 울어대고 비틀어대는 몸짓 조차도 너무 사랑스러워서 웃음이 먼저 났다. 아이가 말을 듣지 않아서 힘들다거나 하는, 그 흔한 엄마들의 하소연은 나와는 먼 일이었다. 아이의 모든 마음이 내 속에 들어있어서 암탉이 알을 품듯 살뜰히 품었다.


그런데, 아이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일로는 불가능했다. 무의식의 괴리가 너무도 큰 것이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의 근원에서 솟구쳐, 한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들 수도 있는 거대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내게 남편이 있었다면 다른 여자와 바람난 것 같은....,  나 아닌 다른 존재로 가득 차 있는 딸아이는 처음이었다. 때때로 아이의 방을 노크하면서도 차가운 벽이 느껴졌고, 방문이 열리면 심통이 났다. 바닥에 영혼이 빠져나간 육체처럼 몸만 빠져나간 옷들을 바라보았다. 꼬투리를 잡아 볼까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하지만, 어떻게 서든 꼬투리를 잡아서 굴복하게 하고 싶은 내가 있었다. 내가 너에게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내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바람난 남자와 평생을 살아야 하는 형벌이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더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딸아이에게 성교육을 좀 더 정확하게 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함께 식사를 하다가 무심한 척하면서 '초등학생의 바람직한 스킨십'에 대해 떠들었다. 그리곤, 처음으로 좋아하는 사람과 이별했을 때, 슬픔에서 벗어나기 힘드니 마음껏 좋아해선 안된다고 경고성 발언을 날렸다.  다시,  '그냥 마음껏 좋아하고 슬퍼하는 건 이별 후에 해도 늦지 않아'라고 말을 바꾸어 버렸다.


"엄마, 어쩌라는 거야? ㅎㅎㅎ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나 초등학생이야. ㅎㅎㅎㅎ"





며칠 전, 일찍 잠을 청했다. 일종의 도피였다. 그런데, 너무 일찍 자버린 나머지 애매한 시각에 깨어났다.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  밑도 끝도 없는 슬픔이 파고들었다. 딸아이가 태에서 나와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수많은 감각을 느끼다가, 지금의 거리를 측정해 보았다. 슬픔이 목까지 차올랐다. 그만 울고 말았다.


"그래, 울어라, 울어. 실컷 울어라."


나는 무의식 속 감정의 근원으로 더 깊이 들어가 내 안의 모든 감정들의 근원들을 샅샅이 느꼈다.  그리고 그 터무니없는 감정들 속에서, 더는 그것이 필요하지 않음을 나에게 상기시켰다.


바람둥이 첫사랑,

이미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전남편,  

훨씬 이전에 나는 아기였다.

아기였던 나는 나보다 아빠를 더 좋아하는 엄마에게,

나보다 엄마를 좋아하는 아빠에게 화가 났다.

이미 모든 것을 차지하고 있는 언니에게는 무기력했고, 내 것을 빼앗아 간 동생들을 질투했다.  


내 안의 수많은 아픈 존재들이 아우성치고 있었다.

그것은 시간과 대상을 뛰어넘어 있었다.

존재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서 살아있어야만 했다.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수없이 말해줬는데 ㅠㅠ)


때 묻지 않은 맑은 마음으로 너와 함께 살고 싶다.

너를 너 자체로 보고 싶다.

어제의 태양이 오늘 뜨지 않듯이

애초에 너와 나의 거리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내가 너를,  그리고 나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임을^^



    




사진출처

cottonbro studio님의 사진: https://www.pexels.com/ko-kr/photo/735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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