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감의 탄생(#무기력, #무력감, #무기력원인결과)
에리히 프롬에게 보내는 월요일의 편지
TO. 에리히 프롬
안녕하세요. 한국에 살고 있는 책과 글쓰기를 좋아하는 혜인이라고 해요. 작가님의 책을 읽으며 그 책들의 두께만큼 제 삶의 모습도 성장했어요. 저 역시 글쓰기를 하다 보니 제 글이 누군가의 인생에 좋은 양분이 될 때 느껴지는 엄청난 보람과 기쁨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일주일 간 작가님의 글이 어떻게 제 삶에 꽃들을 피웠는지 진솔하게 전해드리고 싶었습니다. 한국에는 ‘월요병’이라는 말이 있어요.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주말 동안 쉬다가 월요일에 출근할 생각에 답답하고 아쉬워하는 마음이 들어 생긴 말이에요. 월요일인 오늘은 ‘월요병’과 어울리는 주제로 편지를 씁니다. 작가님이 주신 ‘무력감’에 대한 통찰이 제게 어떻게 도움을 주었는지, 제가 작가님의 뜻을 잘 이해했는지 살펴보며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어요.
작가님을 통해 무력감이란 내 의지로 그 어떤 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절망감이라는 것을 배웠어요. 작가님 말대로 이런 무능하다는 느낌은 표면적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무의식에 숨어 있기도 한 것 같아요. 제 경우에는 주변으로부터 비난이나 비판을 받을 때 무력감이 표면으로 드러나 힘든 적이 있어요. 또 무의식 속에 있던 무력감은 제가 일을 착수하기 전 부담을 느끼게 했던 기억이 있고요. 작가님께 무력감의 의미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저는 무력감으로부터 자유를 얻기 시작했어요. 모든 자유의 시작은 제대로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느꼈습니다.
사실 누구나 추상적인 개념을 막연하게 느끼고 있지만 언어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잖아요. 언어 자체의 한계가 있음에도 작가님께서 용기 내어 신중하게 고른 개념과 이 개념에 대한 생각을 전해주셔서 감사해요. 작가님이 정의한 개념으로부터 배우는 것도 많았고 제 경험이나 생각과 비교하기도 하면서 그 과정 속에서 저라는 존재의 뿌리가 자라났어요.
기분이 지속되면 정서가 되고, 날씨가 지속되면 그 지역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기후가 되듯이 무언가 지속된다는 것은 엄청난 영향을 발휘하네요. 무력감이 지속될 경우 타인, 외부의 공격, 주변의 사물, 기술, 자신조차 자기의 힘으로는 변화시킬 수 있을 거란 자신도, 희망도 없다는 작가님의 말을 듣고 정말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 대상은 다양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 감정이 심해지면 그 어떤 것도 바라거나 원하지 않게 되거나, 자신이 뭘 원하는지조차 더 이상 모르게 되기까지 한다니, 주변에서 무력감에 오래 젖어있는 사람들을 도와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어요.
일단 무력감이 시작되면 대개는 이 원인을 외부에서 찾게 된다고 하셨는데 직장인이 되고 나서야 이 부분에 크게 공감했어요. 특히 허약함과 과로 등의 신체적 핑계를 대며 무력해하는 저를 고치기 위해 직장생활 3년 차부터 저는 술을 더 이상 먹지 않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요. 이젠 20대 때보다 더 건강한 느낌이고요. 특정 인생 경험에서 얻은 상처로 인해 무기력하다는 핑계도 글을 쓰고 저를 돌아보는 내면 작업을 하면서 극복했어요. 또 자신의 머릿속 걱정이나 불안에 휩싸여 상상하던 상황을 현실화한 후 자신에게 고통을 주며 이 상황을 핑계를 대는 사람을 만나면 그의 고통의 원인이 무기력임을 알아차리고 도움이 되는 지침을 줄 수 있게 되었어요.
작가님께서 설명해 주신 무력감을 회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특징도 제게 많은 도움을 주었어요. 무력감을 회피하려는 사람들은 특별한 인물이나 새로운 사건 등의 외부요인이 인생에 등장해서 자신의 무기력이 기적적으로 사라지기를 믿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무기력이 극복되리라 생각하기도 한다는 말에 무척 공감했어요. 드라마 속 ‘신데렐라 스토리’에 몰입하는 사람들, 자신의 삶보다 정치인이나 연예인의 삶에 무게를 두는 사람들, 사람들을 착취하는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사람들, 매주 로또를 사는 사람들까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요. 저도 정도는 약하지만 새로운 수첩, 새로운 공책의 앞 장만 쓰고 또 금세 다른 수첩을 사며 미래에 대한 기대로 현실을 외면한 적도 있었거든요.
작가님의 말씀 중 어떤 이는 머릿속에서 자신의 무기력에서 벗어나 누군가를 지휘하고 통제하는 공상을 하기도 하고 자신이 통제 가능한 주변 인물이나 동물, 모임에게 혹은 익명의 게시판에서 통제권을 행사함으로써 본인의 무기력을 달래기도 한다는 말 역시 공감했어요. 제 과거를 돌아보니 아주 가까이에 그런 분이 계셨거든요. 이런 경험을 통해 저와 같이 타인의 통제권의 영향을 쉽게 받는 여린 존재들을 도울 수 있는 힘과 지혜도 길렀어요.
어떤 이들은 자신의 무능이 자극되지 않을 만한 부차적인 일이나 완벽주의적 강박으로 삶을 가득 채워서 분주하기도 하다는 작가님의 말씀에서 제 자신을 돌아보기도 했어요. 주변에서는 겉보기엔 활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분주한 사람의 무기력을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지만 제 자신의 삶 속에서만이라도 분주함과 이룬 것을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하루에 5-6개의 스케줄을 소화하던 삶에서 진짜 제가 좋아하는 활동만을 남긴 후 정리할 수 있었어요. 어쩌면 지금 이렇게 글쓰기에 집중할 있는 것도 모두 작가님 덕분이네요.
작가님께 배운 무기력의 신호가 되어주는 핵심 태도는 저를 이해하고 동료를 이해할 때 무척 도움이 돼요. ‘불만, 의욕 없음, 언짢음, 자발적이지 않은, 수동적인,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과한 친절과 순응, 불안’이 제게서나 주변에서 보일 때면 이러한 태도와 무기력감이 순환하지 않도록 맛있는 간식과 휴식, 대화 등의 예방주사나 응급 치료를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우리의 무기력이 점점 더 수렁으로 깊이 빠져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요.
무엇보다 작가님께서 제게 주신 가장 강력한 변화는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에 대한 저의 태도예요. 무력감처럼 깊이 자리 잡은 강렬한 감정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다는 작가님의 말에 크게 동의했어요. 그래서 전 아이들을 가르칠 때 전 그들에게 시도하고 실패하고 스스로 일어설 기회를 충분히 주는 편이에요. 어른이 아이를 동등한 인간으로 바라보지 않는 경우 아이에게 무기력을 학습하게 한다는 것을 제 경험으로 알고 있어요. 작가님의 글을 만난 이후 모든 아이들과의 대화에 진지하게 임하고, 그들에게 한 약속도 성인에게 한 것처럼 잘 지킵니다. 만들어진 장난감 대신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재료들을 주고, 세상을 이해할 언어와 표현의 기초는 가르쳐주지만 이 언어로 자신의 세계를 표현하고 서로 경쟁보다는 서로의 강점을 북돋는 것에 비중을 둬요. ‘빨리빨리’ 문화로 유명한 한국에서 교육을 할 때 이 가치관을 유지하려면 교육학과 인간 심리에 대해 능통해서 선택과 집중을 하는 능력이 중요했기에 덕분에 몇 년 간은 퇴근 후 공부에 몰두했어요.
어른이 되어서도 우리의 무기력을 유발하는 요인들이 존재하더라고요. 뉴스에 나오는 안타깝고 자극적 이슈들 중 상당수가 이 무기력을 유발하는 요인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이젠 아이들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제 주변 어른들과 청년 세대를 위해서도 무기력을 치열하게 연구하고 있어요.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 하에서 시장에 팔 능력이나 자신을 책임질 재화가 없는 경우, 욕망이나 자신의 무기력을 보상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외부요인이 있는 경우, 타인의 시선이나 고독에서 자유롭지 않아 집단 무의식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경우, 사회와 정치 등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환경에 대해 무지한 경우,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경우 등의 다양한 요인 중 자신이 어디에 해당하는지를 일단 아는 것만으로도 무기력의 해결에 첫 발을 떼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아요.
결국 세상을 제대로 알고 나를 제대로 아는 것이 무기력을 극복하는 출발점이었어요. 다만 작가님께서 사회의 민낯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하고 우리도 인식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하면서도, 작가님의 말을 사회의 민낯을 이용하는 엘리트가 되어야 권력을 가질 수 있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것은 바른 방향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세상을 경쟁과 우열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은 자신의 권력을 잃을까 봐 또 다른 불안을 가지기에 꼭대기에 올라도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무기력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에요. 외부 세계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하고, 지금 사회의 가치관에서는 출발점이든 과정이든 불평등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을 알지만 이 불평등을 인정하고 이 안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을 노력하는 것보다, 현실 감각을 갖되 시야를 확장하여 모두 잘 사는 다음 패러다임을 꿈꾸며 그 세계의 마음과 태도로 미리 살아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나의 1인분을 생산하면서도 그 이상의 생산물은 축적하려 하기보다는 서로의 무력감을 줄이는데, 더 나아가 서로의 창조를 돕는 데 사용하는 세계 말이에요. 이렇게 누군가를 위해 글을 쓰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월요병이 사라진 느낌인걸요? 내일 또 다른 편지로 찾아뵐게요.
FROM. 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