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에게 보내는 목요일의 편지
TO. 에리히 프롬
작가님, 오늘은 어떤 기분이셨나요? 전 긴 연휴가 끝나고 나니 다시 일을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긴장감이 살짝 올라온 하루였어요.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도 피곤해하거나 긴장하려나 했는데 웬걸, 절 보자마자 보고 싶었다고 웃으며 달려오는 에너지 넘치는 모습을 보며 저까지 기분이 좋아지더라고요. 아이들의 반가운 인사에 깃든 존재 인정의 힘을 실감하며 오늘은 제가 작가님께 배운 존재를 인정하는 방법에 관해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해요.
작가님은 다양한 철학, 심리, 사회적 사례를 통해서 개념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이끌어가시곤 했는데요, 그중 '존경'이란 개념이 인상적이었어요. 작가님께서는 사랑을 실천하는 요소로 '책임, 보호, 지식, 존경'을 말씀하셨지요. 이 중 모든 생명을 보호하고 서로를 위해 책임을 다하고, 각 생명에 대한 제대로 된 지식을 통해 이해를 해가려는 노력은 평소 제가 알던 개념과 일치했어요. 반면 '존경'이란 개념은 제가 평소 알고 있던 존경의 의미와 달라서 호기심을 자극했어요. 작가님께서 말씀하신 존경, 즉 타인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의 한 부분이라는 것에서 과연 우리는 서로를 존경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어요.
작가님은 '미생'이라는 드라마를 아시나요. 작품의 제목에서 보듯이 주인공은 분주한 회사 안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뿌리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결국 외적 요인으로 인해 그 회사 안에서 끝까지 살아남지는 못해요. 대신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말처럼 그와 함께 근무하던 동료와 상사로부터는 존경받고(작가님의 개념에 따른 의미로요) 완생을 이루어요. 또 이 힘으로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되고요. 저는 이 드라마 속 주인공, 그리고 그의 동료와 상사를 보며 서로가 주고받는 크고 작은 존경의 신호들이 얼마나 개인에게 큰 힘이 되는지, 더 나아가서 우리가 사회에서 겪는 문제들 중 대부분이 서로가 자존심이나 완고함으로 인해 상대를 존경하지 않으려 할 때 생긴다는 걸 실감하게 되었어요.
그 후로 존경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니 신기하게도 그 어떤 처벌이나 보상으로도 풀리지 않던 마음이 진심 어린 뉘우침, 사과 한마디, 고맙다는 편지 한 통에 스르르 풀리는 것을 살면서 수도 없이 목격하곤 했고 이와 반대로, 아무리 물질적인 보상을 한다 한들 존재에 대한 비난이나 무시, 외면 등 존경과 반대되는 행동은 상대 영혼의 뿌리를 고사시키고 이후에는 자신의 평판까지도 망치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한 때 '자존감'이라는 키워드가 인기 검색어 순위에 오르내리고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이라는 제목의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을 보면 아직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서로 존경하는 연습이 더 필요한 환경이라고 느껴집니다. 제 경험 상 존재를 인정해 주는 사람이나 환경을 만나면 자신의 생명이 지지되고 존중받는 느낌이 드는 반면, 존재에게 불안을 주는 사람이나 환경 안에서는 무언가 죽음을 앞당기는 듯한 스트레스, 공포, 두려움, 분노를 느끼게 되어요. 아무리 스스로 직면할 용기와 자신에 대한 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용이 큰 사람일지라도 외적 요인이 본인을 압도할 때 존재가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저처럼 누구나 경험으로서 알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내면과 외부에 존재 불안을 야기하기보다는 존재 인정을 해준다면 세상은 더 평화로워지겠죠. 질량 보존의 법칙처럼 내면의 안정감이 큰 세상은 쉽사리 흔들리지 않을 테고요.
제가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쳐주면서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사실 국어 실력 향상도, 작문 능력의 향상도 아니에요. 사실 제가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는 최우선의 이유는 바로 외부 요인과 관련 없이 스스로를 존경할 수 있는 마음, 또 이 마음을 키워서 다른 이들과 여러 생명까지 존경할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자신도, 주변도, 이 세상까지도 미생에서 완생으로 끌어갈 수 있는 자존감 충만한 사람으로요.
오늘은 아이들과 시 쓰기의 날을 가졌어요. 한글을 배운 지 얼마 안 된 아이들이라 긴 산문 대신 평소 틈틈이 짧은 시를 쓰곤 했는데요, 오늘은 긴 연휴도 끝나 분량도 주제도 자유롭게 하여 아이들의 솔직한 생각이 담긴 시를 쓰는 시간을 가졌어요. 항상 시를 쓸 때면 거짓 없이 솔직하게 쓰라고 하는데 우리 아이들의 진실한 마음이 언제 이렇게 더 튼튼하고 예뻐졌나 흐뭇할 만큼 좋은 작품이 많았어요. 그중 한 편, 작가님도 행복해하실 만한 시를 골라서 선물합니다. 서로가 존재를 인정해 주는 마음을 모아 사랑이 충만할 세상을 꿈꾸며 내일 편지로 또 찾아뵐게요.
From. 진정한 사랑을 믿는 혜인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