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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인 Oct 12. 2023

극한 직업, 사랑(#진짜 사랑, #참사랑, #열정페이)

에리히프롬에게 보내는 금요일의 편지

TO.  에리히 프롬


 작가님, 집 앞에 빨간 소국이 하나, 둘 피어나는 걸 보니 완연한 가을이에요. 저는 몰랐는데 누군가 친절하게 화단에 소국의 꽃말을 예쁜 글씨로 팻말에 적어 꽂아주었더라고요. 빨간 소국의 꽃말은 진실한 사랑이라고 해요. 저는 사랑이란 단어를 보면 작가님이 자동적으로 떠올라요. 연애를 글로 배웠어요라는 우스갯소리와는 다르게 전 실제로 제대로 된 사랑을 작가님의 책을 통해 배웠거든요. 

 솔직히 말하자면 작가님이 쓴 '사랑의 기술'을 처음에 읽었을 땐 제게 책의 내용이 크게 와닿지 않았어요. 심지어 신에 대한 사랑이라는 챕터는 너무 어려워서 읽지도 않고 건너뛸 정도였지요.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 전 연애 경험 한 번도 없었던, 여중 여고 출신의 갓 스무 살이었으니 사랑의 ㄱㄴㄷ도 몰랐던 시절이었거든요. 그런데 직장을 다니고 자신뿐 아니라 주변도 책임져 보고, 연애로 눈물 콧물 몇 번 흘리고 난 후 읽으니 이런 명작을 몰라봤던 제게 꿀밤을 주고 싶을 정도였어요. 처음에 작가님 책을 만났을 때부터 그 뜻을 이해하고 제대로 사랑을 배웠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지금이라도 제대로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 조금씩 사랑의 그릇을 넓혀가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어서 작가님께 감사할 뿐이에요. 

 EBS에서 제작한 극한 직업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극한의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삶을 밀착 촬영하여 그들로부터 숭고한 의지와 정신을 배울 수 있게 한다는 좋은 취지의 프로그램이에요. 처음에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색다른 직업 현장이 궁금해서 홀린 듯 보기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극한 직업에 종사하는 전문가분들의 사심 없고 진지한 태도를 통해 마음이 숙연해지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드는 좋은 프로그램이에요. '극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의 고난도 직업을 오랜 기간 계속하기 위해서는 그 일 자체가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가 되어야 하더라고요. 돈이나 명성에 대한 욕망 없이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직업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작가님께서 말씀하신 참 사랑, 진실한 사랑이 떠올랐어요. 작가님의 사랑은 받을 것에 대한 기대 없이 주는 행위였어요. 시장 경제의 논리대로라면 제대로 사랑하는 것만큼 극한 직업이 없는 거죠. 열정페이라는 수식어가 더 어울릴 정도니까요. 그런데 돈을 주지 않으면 불행하고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는 요즘 가치관과는 다르게 참사랑을 실천하고 살아가는 분들을 실제로 만나보면 그들만큼 지극한 행복을 느끼고 사는 이가 잘 없다고 느껴져요. 마치 극한 직업 속 직업인들 표정에서 보이는 떳떳함과 보람, 공헌감처럼 진짜 사랑을 하고 살아가는 분들께는 더할 나위 없어 보이는 행복의 기운이 흘러나오더라고요. 저는 작가님의 책과 제가 만나온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제대로 사랑하는 것만큼 지극한 행복을 느끼게 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배우고 느꼈어요.  그리고 이 관점에서 저 나름대로 사랑을 정의해 보았어요. 

 '사랑은 지불을 통해 내면의 순수한 열정을 깨우는 행위이다. 열정페이보다는 페이 포 열정에 가깝다. 우리가 극한 직업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사회에서 규정한 직업의 귀천을 떠나서 느끼는 숭고함과 존경스러움이 제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세상 사람들은 행복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사실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과 놀 때처럼 순수한 열정이 깨어나면 그 결과로 행복이 찾아온다고 생각해요. 참사랑은 이 순수한 열정을 깨우는 가장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이었고요.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을 사랑하고, give&take가 아니라 일체감을 가지고 사랑하고, 휴식 시간 외에 모두 사랑하라는 작가님의 말씀은 결국 사랑과 자신의 삶이 하나가 되도록 노력하라는 말씀이었어요. 마치 극한 직업 속 직업인들이 그 직업 자체를 자신으로 여기며 인내과 몰입으로 최고의 명장이 되었듯이요. 그리고 작가님은 사랑을 잘하기 위한 구체적인 연습 지침도 주셨는데 기특하게도 저 대부분의 지침을 잘 따르고 있어요. 

 '일정한 시각에 일어나기, 독서, 산책, 음악 감상, 명상 등 긍정적인 취미 생활, 스스로 성찰하는 시간 가지기, 부정적인 사람은 최대한 피하고 곁에 있더라도 자신의 사랑과 소신 지키기, 참 사랑을 실천하는 성숙한 존재와 가까이 하기'까지요.

 반면 아직 어려운 건 '성찰을 방해하는 쾌락적 유희 활동을 최소화하기'예요. 물론 게임, 추리소설, 과식, 과음, 피상적 대화, 험담 등은 하지 않지만 세상엔 재미있는 드라마나 영화가 너무 많더라고요. 그래도 제가 요즘 다시 보고 있는 '최고의 사랑'같은 따뜻하고 밝은 느낌의 드라마나 영화 감상 하루 한 편 정도는 봐주실 거라고 생각해요. 아니면 글쓰기 한 편으로 상쇄되려나요. 하하.

 돛 단 배가 바람과 물살에 따라 떠가듯이 우리 인생도 자신에 대한 성찰을 놓쳐버리는 순간 주변에 휩쓸려 표류하는 듯해요. 한 때 소유의 세계에서 살았고, 기브 앤 테이크 정신으로 왜곡된 연애를 했고, 감정을 바라볼 새도 없이 외부 자극과 쾌락적 유희 활동이 가득한 삶을 살았는데도 이 모습이 사회의 가치관과 크게 어긋나지 않다 보니 오히려 지지를 받았고 무엇이 잘못인지도 모르는 상황까지 이르렀어요. 다행히 책과 걷기를 좋아했기에 좋은 글을 읽고, 걷는 동안 혼자 사색하며 지금 이 자리, 바로 행복까지 오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참 사랑에 닻을 내리고 이젠 사랑이 아닌 어떤 길도 선택하지 않는 제가 되었습니다. 제 꿈은 할머니가 되었을 때 저를 만나왔던 분들에게 사랑의 명장으로 기억되는 거예요. 특히 저를 스쳐 지나간 모든 아이들에게요. 

 어린 시절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불쌍하고 처량하다고 생각했던 제 생각은 정말 틀린 생각이더라고요. 이젠 나무가 성숙한 사랑을 하는 존재였다면, 소년이 건강하게 잘 자라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소년이 할아버지가 된 순간까지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쁜, 지극한 행복을 느끼는 삶을 살았으리라는 걸 알아요. 할머니가 되어 작가님 곁으로 가는 그날,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뿌듯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함께 할 수 있기를 꿈꾸며 오늘의 편지를 마칠게요.  


FROM. 애독자이자 실천가 혜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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