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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인 Jun 15. 2022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를 읽고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시니컬한 대답


과학도나 철학도가 아니더라도 살면서 몇번은 "나는 누구인가, 왜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리고 아마 이 질문은 보통 행복하고 기쁠 때 보다는, 반대의 상황에서 더 자주 떠오를 일이 많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해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는 한없이 팽창하는 우주의 관점에서, 조금은 다정한 목소리로 답해준 것 같았다. 거대한 우주의 창백한 푸른 점, 그 안에 존재하게 되고 만나게 된 작은 우리는 기적이라고. 반면 리처드 도킨스는 좀 시니컬하다. 반대로 정말 작은 우리 몸 안의 유전자의 시각에서 “우리 다 유전자의 생존 기계일 뿐이야. 그러니깐 덜 심각해도 돼” 하고 말하는 느낌이랄까.


​“오늘날 자기 복제자는 덜거덕거리는 거대한 로봇 속에서 바깥 세상과 차단된 채 안전하게 집단으로 떼 지어 살면서 복잡한 간접 경로로 바깥 세상과 의사소통하고 원격조정기로 바깥세상을 조종한다. 우리는 그들의 생존기계이다.”


너무 유명해서 낯익은 문장인데도 다시 이 구절을 마주했을 땐 여전히 어딘가 모르게 기분이 나쁘고 황당하고, 낯설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분노하는 대신 조금은 그러려니, 하고 바라보는 데 책의 관점을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한 달에 한 번씩 "조물주는 왜 여성에게만 임신, 출산의 고통을 주었는가" 에 대해 짜증내는 대신, 포유류의 난자가 정자보다 크게 진화되었기 때문이지, 하고 그냥 다른 데 에너지를 쏟아보련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남성을 월경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여성에 대한 억압을 줄이는 것이니까-


유전자적 진화의 관점에서 해석하면 전혀 아닌데, 인간이 잘못 씌워둔 신화같은 사고방식이 얼마나 많은지도 책 곳곳에서 알게되어 재밌었다. 동물들의 세상에 대해 '피와 살육으로 얼룩진 야생' 이라는 시선도, '동족의 번영을 위해 숭고한 희생을 치른다' 는 시선도 모두 다분히 인간적 해석일 뿐이다. 내 사고는 여전히 자동으로 익숙한 '동물의 왕국' 식으로 흐르지만 말이다. '사랑', '효', '형제간의 우애' 와 같은 숭고한 인간의 정신 그 이전에, 유전자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유전적으로 가까운 사람에게 더 많은 자원을 투자할 수밖에 없다는 시선도 새롭다. 과학 책을 읽으면서 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한 것도 신기했다.


"우리는 유전자의 기계로 만들어졌고 밈(meme)의 기계로서 자라났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다."


요새 정말 많이 쓰는 말이 된 '밈(meme)' 이라는 말이 이미 1970년대에 쓰인 것도 흥미롭고, 시니컬한 듯 하면서 인류에게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리처드 도킨스의 은근히 따뜻한 시선도 좋다. 여러 책들과 마찬가지로 북스터디가 아니었다면 완주하지 못했을 책이고, 100% 이해하진 못했지만 읽어냈다는 사실 만으로도 큰 기쁨을 준다. (이제 과학책은 당분간 쉬어가기로 한 건 안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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