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
어느 토요일 저녁,
현정과 제이슨은,
마켓에 가서 장을 보고,
집에 와서 같이 음식을 만들어, 저녁을 먹는다.
식사 도중 제이슨은, 현정에게 뜬금없이,
“지금까지 결혼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이렇게 사는 게 결혼이라면, 나쁘지 않을 거 같아.”
현정은 속으로
갑자기?
밥 먹다 말고,
결혼 이야기를?
결혼이라는 주제에
할 말도,
해 줄 말도,
해 주고 싶은 말도 없어,
그녀는 아무 대꾸 없이,
잠잠 코,
식사 하는 거에만 집중한다.
제이슨은 들고 있던 수저까지 내려놓고, 꽤나 깊이 생각한 것처럼 진지하게 말을 잇는다.
“현정, 잘 들어봐. 아무리 같이 살아도, 주중은 각자의 일들이 있으니 서로 바쁠 거야. 그래서 시간도 같이 많이 못 보낼 테고. 식사 시간이 서로 다를 수도 있고, 잠자는 시간도 다를 수 있고, 그런데 주말은 서로 약속하고 만나지 않아도, 결혼하면 같이 사니까, 이렇게 자연스럽게 함께, 마켓도 가고, 음식도 같이 해 먹고, 어떤 날은 외식도 하고, 어떤 날은 문화생활도 같이 보내잖아. 그런 게 결혼 생활 아닌가? 어떻게 생각해?"
현정은 제이슨의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꼭 결혼 하지 않아도,
같이 살면
약속해서 만나지 않아도 되고,
함께 있고,
함께 할수 있지.
현정은 그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거잖아.
설마,
결혼하자
는 아니겠지
“그런 거 같아.”
현정은 그저,
그리 특별할 것이 없다는 듯,
건조하게 말한다.
그가 무슨 생각과 마음이든,
현정은 이 주제를 돌리고 싶다.
제이슨은, 주제를 돌릴 마음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우리 사이에는 편안함도 있지 않아? 같이 산다고, 결혼한다고 해서, 금방 다 익숙해지고, 편안해지는 건 아니잖아. 그런데 우린 서로 잘 맞는 부분이 꽤 많지 않아?"
제이슨이 질문을 했지만,
현정은 그저 입에 들어 있는 음식을 씹는다.
이제는 그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무슨 결혼 전 서로 잘 맞는지 안 맞는지 설문지 같은 거하는 거 봤는데,
그런 걸 하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질문한 그가, 대답도 한다.
"우린 집에 있는 걸 좋아하고, 둘이만 있는 걸 좋아하고, 그런데, 또 서로 잘 맞아서 편안하면서도, 둘만 있어도 재밌잖아. 그래서 난 요즘 우리가 부부 같은데."
마침표인지,
물음표 인지,
제이슨이 애매하게 말을 끊고는 현정을 쳐다본다.
입안에 있던 음식물도 목구멍으로 다 넘어가,
뭐라도 말해 줘야 할 것 같다.
“알았어.”
겨우, 한말이 알았어 이다.
뭘 알았다고
알았다고
대답한 거지
현정도 모르겠다.
“응? 뭘?”
"편안하고 즐겁다는 거잖아."
“아, 그런데 중요한 거 하나가 빠졌다.”
“뭐?”
“사랑해. 너랑은 어디 있어도, 무엇을 해도, 나는 널 사랑해.”
갑자기?
주제가
사랑으로 바뀌었다.
그를 만나면서 현정은,
제이슨과 같은 남자를 만난다면,
그래서 이렇게 같이 살 수 있다면,
어쩌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제이슨은,
마음이 순수하고 맑고,
성격이 밝고 긍정적이며,
행동에 책임감과 신중함이 있고,
생각에 깊이가 있는
그런 사람이다.
그런 사람과는
친구를 해도,
동료를 해도,
연인이 돼도,
부부가 돼도,
좋은 거 아닌가.
무엇보다,
그의 사랑의 순수함과 심오함을 안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도 너 많이 사랑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사랑해
현정은 차마 이렇게 말할 수 없어
하고 싶은 말들을 속으로 삼킨다.
제이슨은 모르는,
그가 묻지도 않았고,
상상조차 하지도 못할,
그녀에 대해 안다면,
지금처럼 그가 말할 수 있을까?
그는 그래도 현정을 사랑한다고 할 것이다.
현정은 그것이 더 두렵다.
그녀에게는 없는 미래,
하지만 제이슨은 가져야 할 미래,
그가 생각하는 삶에는 미래가 있고,
현재의 삶이 미래를 채워 가야 하지만,
현정의 현재에는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미래가 없다.
그와의 관계가,
만난 시간과 횟수에 상관없이,
그저 둘의 사랑이 더 깊어 갈수록,
현정은 슬퍼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함께 하는 시간이 더 길어지기 전에,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 해 겨울,
제이슨은 한국에 가야 할 일이 생겼고,
현정은 이때가 자연스럽게 헤어질 수 있는 기회? 라 생각했다.
기회라는 단어가 적절하지 않지만,
일방적으로 헤어질 생각을 하고 있으니,
기회라는 단어가 맞다.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이제는 그만 만나,
헤어져라고 말할 수 없다.
이유가 없으니까.
그의 얼굴을 보고 말할 용기도 없으니까.
결국 그녀에 대해 다 말하기 싫으니까.
말해도 그는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
이혼녀면 어떠냐,
아이를 무지 사랑한다
라고 말할 것이다.
현정은 그런 그에게 흔들릴 것이다.
하지만 함께 하는 현실도,
지금처럼 행복하기만 할까?
엘레나가 아직 어리지만,
엄마가 만나는 남자를 받아들여야 하는
아이의 혼돈은?
매주,
전 남편과 현 애인을 동시에 만나야 하는 ,
그 ‘awkward' 하고,
불편하고, 당황스러운 기분은?
이제 26살인 제이슨이 감당하기에는,
그녀에게 조차도 무거운 현실이다.
혹 반대로 그가 듣고,
실망한다면,
그 조차 현정은 마주할 자신이 없다.
상대방에게는 일방적이고 잔인한 일이지만,
이렇게 지금 도망가지 않으면,
그를 떠날 수 없다.
공항에서 아쉬움을 가득한 채 떠나는 그를 바라보며, 현정은 울었다.
그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지 않았다.
입에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손으로 닦아내면서
또 울었다.
그 와의 헤어짐 만이 슬퍼서가 아니었다.
그냥, 모든 것이 마음속과 머릿속에서 튀어나와,
슬픔을 제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울어도,
이상하지 않은,
공항이라는 장소 아닌가.
제이슨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현정에게 문자를 보낸다.
시간차가 얼마가 나는지,
미국은 지금 몇 시 인지,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9031 킬로 미터,
마일로는 5599 마일.
비행기로 오가는데 약 12 시간소요.
캘리포니아가 밤이라면, 서울은 낮이고,
서울이, 캘리포니아보다,
하루 먼저 가는,
십육이라는 숫자만큼의 시간차.
비록 거리와 시간의 차이가 있지만,
서로의 존재를,
문자를 통해서라도, 느끼고 싶고
그는 현정에게 그가 잘 도착했다고 알려 주고,
그녀도 잘 있는지 물어보고,
그리고, 몇 시간 전에 보고 헤어졌지만,
그 사이 보고 싶다 등등 말하고 싶다.
그렇게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을 때,
재욱의 첫째 누나 재인이,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다.
그녀는, 재욱 보다 7살이 많은, 33살로,
그녀는 자신이 ‘비혼주의자’라고 밝혔다.
현재 까지는.
재욱도, 재인이 비 혼주의자인 것을 지지한다.
왜냐하면, 재인과 결혼할 그 어떤,
누가 될지 모르지만,
그 누군가를 위해서다.
재인에게 무슨 문제가 있어서는 아니다.
외모 적으로, 그녀는 여자든 남자든 누구나 한 번쯤은 쳐다볼 정도로,
호감 가는 얼굴에 혼자 뭘 먹고 자랐는지,
173센티로, 키도 큰 편이다.
학창 시절, 남학생들은 강렬하게 눈에 띄는 그녀의 외모에 호감을 표 했고,
여학생들은 그녀의 모델 같은 이미지를 동경했다.
재인은, 남녀를 막론하고 꽤 인기가 있었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경제적으로는, 한국 사회에서 성공한 커리어 우먼이다.
대학 졸업 후, 들어간 직장을 10년 정도 다니면서,
석사 학위도 따고,
거의 초고속 열차처럼 승진하여,
상무까지 할 정도면,
그녀의 커리어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없다.
다만, 재욱이 그녀가 ‘비혼주의’를 선택한 것이,
그녀의 여러 선택 중,
다 잘했지만,
이도 잘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녀의 성격이다.
물론, 남동생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누나의 성격이니,
그녀가 다른 사람 혹은 연애라도 하는 사람한테는,
그녀의 성격이 어떤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녀가 애교를 부린다거나,
상냥한 말투를 쓴다면,
재욱은, 상상만 해도, 그것이 더 끔찍하다고 느껴진다.
높낮이 없는 건조한,
조금은 사무적이고 딱딱한 말투가,
재인에게는 더 어울릴 것이라 생각한다.
재욱이 느끼는 재인은,
그리고 가족들도 다소 인정하는 그녀의 성격은,
까다롭고, 매우 까다롭고,
다소 비판적이며, 모든 면에, 비판적이며,
아주 예민한,
본인은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꽤, 신경질 적인 성격 때문이다.
물론, 좋게 말해,
이런 그녀의 똑 부러지고,
철저하고,
꼼꼼하고,
예민한 성격이
지금의 그녀의 커리어를 만들었을 것이다.
직원들도 좀 볶고,
다그쳐 가면서,
프로페셔널하게.
이 모든 걸 다 포용하며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
혹은 재인이 사랑의 힘으로 좀 더 둥글둥글한 사람으로 변모한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재인은 그녀가 ‘비혼주의자’라고 밝혔다.
왜 그녀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
정작 본인은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재인의 부모님은 이유를 알고 있는지,
아니면 모르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고 묻지 않는 건지,
혹은 온 가족이 재욱처럼 그렇게
물어도 대답해 줄 그녀도 아니고,
섣불리 물었다가 비평과 훈계가 복합적으로 섞인,
본인에 의하면 생각과 의견,
듣는 입장에서는 잔소리를 꽤 길게 들을 거라 생각하는 건지
그래서 질문을 최대한 자제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그녀가 ‘비혼주의자’인 것 말고도, 30살이 넘을 여태까지,
가족이 아는 한 연애조차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재인은 말하지 않았고,
가족들도 묻지 않았다.
“재욱.”
짙은 그레이 컬러의 코트를 입은 재인의 모습이,
여성 ‘CEO’처럼,
세련되면서, 전문적으로 멋있어 보인다.
“누나.”
“내려서 택시 타도 되고, 버스 타도 되고, 지하철 타도 되고, 여기 인천 공항이 교통편이 얼마나 잘되어 있는데, 출근하는 사람이 마중을 와야겠니? 한국, 미국 한두 번 다닌 것도 아니고, 고등학교 때도 가방 두 개 달랑 들고 미국까지 간 애를 엄마는 이제 와서 마중을 가라 하고.”
재욱은,
역시 재인은 여전하고,
재인의 비혼주의 선택은,
그녀의 최고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재인이 말하는 동안 재욱은 말없이 서서,
슬쩍슬쩍 핸드폰을 본다.
여전히 그녀에겐 답이 없다.
이제야 세계시간 앱을 열어, 캘리포니아 시간을 체크한다.
지금 시간이면 미국은 새벽이고,
현정은 자고 있을 것이다.
그래 이 시간까지 깨어 있느니,
자고 있는 게 낫지
“내 말 들었어?”
“응?”
“뭐 해. 가자.”
“그래 누나. 나와 줘서 고마워.”
“잘 지냈어? 별일 없었고?”
“응. 누나는?”
“나야 뭐, 늘 바쁘지. 이 자리가 쉽게 얻어지는 자리도 아니고, 얻었다 해도 쉽게 지켜지는 자리가 아니니, 늘 경쟁해야지, 새 아이템도 개발하고, 목표도 달성해야지. 팀과 회사를 이끌어 나가는 것이 쉬운 일이니. 그런데 넌 주말에 오면 되지. 무슨 화요일에 도착하고 그래?”
재인은 걸어가면서 말을 늘어놓는다.
“잘 지내고 있었다니 좋네.”
재욱의 답변이 그녀의 말과 상당히 어긋나 있어,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재욱을 바라본다.
“왜?”
재욱이 약간 긴장한 듯 묻는다.
만나자마자 재인의 심기를 건드리면,
오늘 밤새, 그녀에게 볶일지도 모른다.
콩처럼 달달달.
멸치처럼 탈탈탈.
재욱은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는,
그녀를 보며 최대한 친절하게,
“누나. 왜?” 라고 묻자,
재인은 한쪽 눈썹을 끌어올리고는,
“분명 대화는 하는 것 같은데, 못 알아듣는 거 같지?”
재욱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아니야. 나는 다 알아 들었어.” 라고 재빨리 대답한다.
그의 말에,
재인은 못 이기는 척, 발걸음을 뗀다.
재욱은,
나이스, 잘 넘어갔어 라며,
다행이라 생각한다.
“누나도 회사 다시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걸어가면서 재욱이 묻는다.
“아니야, 그냥 오늘 연차 냈어.”
“그런데 옷은 왜 이렇게 입었어?’
“옷이 뭐?”
“다시 출근하는 줄 알았지.”
“어디를 가든 늘 이렇게 입어야지, 어디서 누굴 만날지 알고. 특히, 공항에서 다른 회사 직원이나, 바이어 라도 만나봐. 니 누나 상무야. 사람들에게 꽤 인지도 있는 자리라고.”
재욱은 괜한 질문을 했나 생각하며,
“아 그래. 그렇구나”
라고 재빨리 맞장구를 치고는,
공항에서 아는 사람 만날 일이 얼마나 된다고 저렇게 신경 쓸까,
그들이 재인을 보면,
먼저 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너도 좀 잘 입지. 공항 패션 몰라?”
재욱은, 역시 주제를 잘못 선택했다 생각한다.
재인이 뭐라도 더 말하지 않을 대답을 생각해내야 한다.
“슬리퍼 안 신고 온 게 어디야?”
제이슨은 이렇게 말하고, 혼자 피식 웃는다.
발가락 두 개를 끼어 신는 'flip slippers’를 신고 나가는 걸 본 현정이
한국 공항에서는 이러고 다니면 안 된다고 해서,
운동화로 갈아 신고 온 것이다.
재인은 그의 말에 어이가 없는지,
별 말없이,
걷는다.
재욱은, 그 사이 다시 핸드폰을 꺼내 보지만,
역시나 현정은 아직 답이 없다.
그래 미국은 아직 새벽이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확인하고 답장하겠지
재욱의 아버지, 필석은, 담낭 수술을 마치고,
지난주 금요일 저녁에 퇴원하셨다.
재욱의 어머니, 선주는 식구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른 저녁 재욱과 재인이 집에 도착하고,
재욱이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는 동안,
재욱의 부모님 집 근처에 사는 임신한 재연도 왔다.
재인 보다 2살 어린,
재욱의 둘째 누나 재연은,
첫아이를 임신한 지 얼마 안 됐고,
유산기도 있고 입덧도 심하다고 한다.
그녀는,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신생아실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비혼주의자’라는 재인과 달리,
재연은 29살에 두 살 어린,
산부인과 레지던트 의사와 결혼했다.
재연의 남편 서 주완,
그는 결혼 후, 레지던트를 마치고,
펠로우를 하면서, 군복무 중에 있다.
지난번, 휴가 때, 아이가 생겼을 것이다.
재연이 힘겹게 거실로 들어오며 말한다.
“내 계획은 이게 아니었다고.”
선주가 재연의 팔을 잡고 그녀를 소파에 앉히며 묻는다.
“또 토했어?”
“엄마 원래 이래? 우리 임신했을 때도 그랬어?”
선주가 재연의 등을 쓸어내리며 말한다.
“엄마 되는 게 쉬운 줄 알았어? 좀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선주는 재연이 힘든 임신 초기를 보내고 있지만,
첫 손주라 그런지,
벌써부터 마음이 애틋하다.
“밥 먹자. 너랑 아버지 드시라고, 전복죽 끓이고, 재욱이 좋아하는 갈비탕 끓였어.”
재욱은 선주의 갈비탕을 제일 좋아한다.
뽀얀 국물도 맛있고,
특히 갈비탕 안에 넣은,
얇고 가늘고, 호로록 깔끔하게 넘어가는,
당면을 참 좋아한다.
현정에게 당면을 가득 넣은 잡채를 만들어 준 적도 있었다.
현정은 야채들을 썰었고,
재욱은 면을 삶고,
야채를 볶았다.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은
그녀와 하는 여러 일들 중,
재욱이 가장 좋아하는 일 중의 하나였다
게다가 재료들을 사러 가기 위해 마트를 가야 하지 않는가.
현정과의 마트 구경은 정말 재미있었다.
재욱은 원래도 마트를 좋아했다.
선주가 갈비탕이라는 말만 했을 뿐인데,
그의 머리와 가슴으로,
그녀와의 추억들이 떠올려지면서,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온다.
가족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교제 중인 사람이 있다.
중대 발표를 할까 생각하다가,
그럼 그다음은?
그래서?
라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 보니, 현정과 그렇게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던 거 같다.
지금, 현재가 너무 좋아서,
막연하게 그냥 이렇게 함께 하는 거지
라고만 혼자 생각했었다.
현정에게 물어보지 않았지만,
그녀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도, 물어볼걸 그랬나
결혼은 서류가 있는데,
왜 연애에는 그런 게 없는 거지.
현정을 못 믿어서가 아니다.
재욱의 불안정한 상황이 반영이 된 것이다.
20대 중반
회사와의 1년 계약
군 미필
이런 상황에서,
현정과 미래를 이야기한들,
가족들에게 중대 발표를 한들,
그다음은?
그래서?
라는 의문만,
야기될 것이다.
그래도
사랑 해요.
라고 말해도,
그 다음은?
그래서?
라는 의문만
반복될 것이다.
재욱은,
뭘해도 다 잘 해낼 자신이 있는 미래지만,
20대 중반,
회사와의 1년 계약,
군 미필은
잘 할수 있어 라는 자신감만으로
해결 될 문제들이 아니지 않은가.
핸드폰을 다시 보지만, 그녀에게 여전히 답은 없다.
문자를 더 보낼까 하다가,
겨우 하루,
그래봐야 이틀 가지고,
너무 안달하는 것 같아,
잠시 진득이 기다려 본다.
기다림도 사랑이라고 하지 않던가.
재욱은 가족들과 함께 북적 거리며,
연말과 연초를 보냈다.
회사에서 하는 프로젝트가,
한국에 있는 테크 회사랑 비슷해,
회사 요청 대로,
그곳 세미나에 참석하느라,
원래 일정보다, 한 달 정도 더 머물고,
그다음 해, 2월 초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현정에게는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하루, 그래 봐야 이틀이 아닌,
두 달이 지났다.
제이슨은,
기다림,
속상함,
걱정이 가득했다.
미국에 와도, 원래 알고 있는 전화번호 말고는 연락할 방법이 달리 없다.
러닝 클럽에서 만났던 사람들,
그때 함께 뛰었던 사람들 한테도 연락해,
혹시나 그 뒤로 현정이 참여했나 알아봤지만,
그들은 대답은,
누구?
아.
그때 너랑 같이 뛸 때 보고 우리도 그 뒤로는 못 봤는데
라는 예상한 대답만 들었다.
그렇다고 밤에 한번 가 본 위치도 정확하지 않은,
그녀의 집에 갑자기 찾아갈 수도 없다.
제이슨은 그렇게 현정에게 수도 없이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냈지만,
그녀에게 대답은 없다.
그리고 2020년 2월부터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코로나라는 바이러스는
결국은 심각해져,
3월에 자가 격리가 시작되었다.
제이슨도, 자택 근무를 하게 되었고,
한 주 정도면 풀릴 줄 알았던 격리는
두 달이나 이어졌다.
그 사이, 제이슨은,
처음으로,
극도의 외로움,
걱정,
스트레스를 겪었다.
미국에도 혼자 왔고,
학교에 적응할 때까지 혼자 이기도 했지만,
외롭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현정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도 그의 마음을 더 힘들게 만들었다.
그는, 평생에 앓아 보지 못한,
두통과 위장장애와 수면장애를 겪는다.
제이슨을 보내고,
현정은 일주일 정도 아팠다.
열은 나지 않았지만, 온몸이 부서지듯이 아팠고,
두통과, 체함이 있어서,
밥맛도 없었다.
무언가에 열정을 다하고,
애를 쓰고,
온 신경을 쓴 뒤에 찾아온,
후유증 같은 것일 것이다.
일주일 정도 지나고,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어났고,
모든 생활을 예전으로 다시 하기 시작했다.
아니면, 원래 하던 일에,
제이슨을 만나는 것만 빠졌다고 해야 하나.
엘레나를 데이 케어에 보내고,
오전에는 운동을 하고,
일주일에 한 번, 만나던 ‘Dr. Meghan’ 은
최근 그녀의 우울증이 많이 호전되었다면서,
무슨 일이나, 주변에 변화가 생겼냐 물어봤지만,
현정은 약도 잘 먹고,
상담도 하고,
운동도 해서 좋아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만 만난다
엘레나가 토드의 집에 간 주말에는,
불과 한 달 전과 달리,
그의 집이 아닌,
그녀의 집에 혼자 있는다.
그 자리에 공허함이 밀려 오지만,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할 만한 에너지나 열정은 없다.
모두 다 그에게,
그 시간에,
쏟아붓지 않았던가.
낮에는 나무와 새들이 날아드는 것을 보고,
저녁에는 노을이 지는 것을 바라본다.
홀로 멍하니 앉아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제이슨의 문자가 끊임없이 온다.
연락처를 지우고 차단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렇게 까지 하기에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보지 않는 것을 결정한 것 만도,
충분히 힘든 선택이니까.
그의 새로운 메시지가 오면,
그것을 들여다보면서,
예전에 주고받았던 문자까지 읽는다.
내용이 여느 소설책 보다 더 재밌다.
그렇게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시작되었고,
그가 미국에 다시 왔다고,
문자가 왔다.
그의 기다림이 실망이 되고,
결국엔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했다.
“You don’t need to answer, but can you text me, JUST, OK. I am worried about you.”
현정은 그에게,
“I am ok. No worries about me.
I had a good time with you.
Thank you and take care.
너도 잘 지내.”
라는 문자를 보내야 하나?
그녀는 괜찮지 않다.
하지만, 그가 걱정할 문제는 없다.
모든 것이 그녀의 문제다.
그동안 즐거웠다니.
그는 그녀의 삶에 단지 한 순간 즐거움만 주고 간
존재는 아니다.
차라리 이제 막 이혼한 이혼녀가,
잠자리는 하고 싶은데,
깊은 관계는 갖고 싶지 않고,
그래서, 가끔 만나 밥이나 먹고,
잠자리나 하려고 만났다면,
그래서 그의 젊음과, 육체를 탐한 것이라면,
그래서 즐거웠다면?
그래서, ‘We are over.‘
이제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네.
할 수 있다면,
차라리 그런 거라면,
마음에 그때
내가 왜 그랬지?
미쳤었나 봐?
이혼하면 정신이 좀 한동안 나간다던데.
그렇게
지난날의 한때를
창피해 하며, 후회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보고 싶고,
생각나고,
그래, 널 사랑해서.
널 사랑하는 건 안되니까.
그래서 문자 하나도 남기지 못해.
그래서,
현정은 그저 비겁하게,
그에게서 도망친 것이다.
혹은,
도망쳤던 현실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
꿈에서 깬 것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