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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Seoul, Soul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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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 Jang Oct 19. 2024

다섯 번째 이야기

오늘부터 일일?..!…

제이슨은 이전 보다 더 많이 현정을 생각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이 나서,

전화를 하고 싶고,

문자를 하고 싶고,

일이 끝나면,

길바닥에서 시간을 보내며, 트래픽 속에 있어도,

단 몇 분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현정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


우리 오늘부터 일일 하자 하고 싶다.  

여자 친구라고 말하고 싶고,

여자 친구라고 부르고 싶다.


몇 번 만났고, 여럿이 산에서,

식사를 했고, 둘이서 겨우 한번,

하룻밤을 한번 같이 보냈다고 해서,

여자 친구라고 부르는 것이

지나친 것일까?

그의 마음을 다 보여 주면 상대방이 부담을 느낄까?

등등  머릿속에 생각이 많다.


수재면 뭐 하나?

고등학교를 조기 졸업 했으면 뭐 하나?

‘MIT’ 졸업생 이면 뭐 하나?

미국의 대기업 IT직원 이면 뭐 하나?

도대체 이건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니,

너무 어렵다.

사랑도 코딩처럼,

함수값을 넣으면,

‘촤라락’  프로그래밍이 되어,  


둘이 서로 사랑하시고,

연애하세요

라는

결과 값이 도출되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수학보다 어렵다.

코딩보다  어렵다.


그런데 머리로 생각도 해야 하고,

마음도 알아야 하니,

그래서 더 어렵다.


제이슨은 자신이, ‘dummy’ 인가 생각한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바보가 된다고 했어

라고 생각하며, 혼자 웃음을 짓는다.


사랑을 하는 것인가?

미친놈이 되고 가고 있는 것인가?

사랑에 눈이 먼 미친놈이 되는 거지.


하지만 마음이 그렇다 하여, 사랑에 눈먼 놈이 되어 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관계인지?

그녀인지?

둘 다 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를 만나는 것이 소중하고,

현정이 불편해해서,

혹시나 만나지 않을까,

그의 행동이 지나치게 무겁거나,

가벼워 보일까,

조심스럽다.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도 사랑의 감정중의 하나라면,

그는 현정이 소중하다.

그래서, 그는 신중히 생각하며,

불뚝 불뚝 일어나는

사랑과 열정을 달래며,

참아 본다.


그렇게 현정을 만난 후, 하루 이틀 그리고 한주가 지났고,

제이슨은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 주 토요일,

이른 오전이 지난 시간,

전화를 한다.


잘 지냈냐,

어떻게 지냈냐,

등의  무난한 말로 시작하려 했지만,


그녀가, ‘Hello’

라고 말하자,

그는  예상치 못한,

하지만 마음에 담아 두었던 말을 하고야 만다.


“보고 싶어. 널 만나야겠어.”


앗, 이게 아닌데

생각하고는, 급하게 말을 잇는다.


“그러니까 내 말은. 더 일찍 전화하려고 했는데, 그게. 그러니까.  How are you?”


 그는 그가  ‘dummy’라고 확신한다.


“I am doing good.”

“아. 그렇구나.”

“내가 너 있는 대로 가면 되겠어?”

“응?”  

제이슨은 예상치 못한 현정의 말에 당황이 되어, 할 말을 잃는다.

“만나야겠다며?”

“응. 내가 그렇게 말했어.”

"보고 싶다며?”

“응.”

“그러니까, 내가 너 있는 대로 가면 되냐고?”


제이슨은 현정의 말에 예이 하고 탄성을 질러야 하는데,  

한편으로는,

왜?  

라는 의문이 든다.


“내가 갈게. 지금 출발하면 돼.”

현정은,

“내가 갈게.”

라고 말한다.


현정은 엘레나와 함께 사는 집에, 그를 다시 오게 하고 싶지 않다.  

그때는 술도 취했고, 그냥 분위기와 그 남자에 흘린 듯 저지른 일이지만,

두 번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만날 때,

그동안 그녀가 해보지 않은,  

말과 행동이 흥미로웠고,

그래서 그와 있을 때는 다른 모습의 현정이 되고 싶다.

이곳에서 이 집에서 현정은 늘 같은 현정 일 것이다.


“산호세 산다고 했지?  Could you send me the

address where am I going?”

“그럼. 내가 지금, 네가 오기 편한 곳 찾아서 보내 줄게. 잠깐만.”

제이슨은 컴퓨터에 앉아 빠르게 장소를 검색하며 말한다.

“카페? 식당? 여기 주차하기가 괜찮나?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내가 알아보고 있어.”

“제이슨.”

“응?”

“I can come over to your place.”

“응?”

제이슨은 검색하던 마우스에서 손을 떼고,

다시 묻는다.

“My place?”

“너 누구랑 같이 살아?”

“아니. 아니야. 나는 혼자 살아. 계속 혼자 살았어.”


제이슨처럼 일 하는 싱글들은 아파트를 빌려 룸 메이트랑  같이 사는 경우가 있어,

물은 것이다.


“여기가 하이웨이 빠져서 바로고, 카페 찾아가는 것보다 낫긴 해.”

“그래. 알았어. Send me the address.”

“응. Safe drive.”

“See you soon.”


전화를 끊고, 제이슨은 가슴에 손을 댄다.  

심장이 몇 배는 빠르고 힘차게 뛰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수많가지 생각도 든다.


왜 만나기로 한 것일까?

그동안 보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

정리할 관계는 있나?

그래도 정리한다면,

그래서 만나자고 하는 것일까?

그만 보자고 하는 것일까?

그만 보는 건데 굳이 만나서 할 필요가 있을까?


현정은 신중한 타입이니, 얼굴 보고 말할 수 있지.

그런데 왜 집으로?


현정은 여기 오래 살아, 이곳을 잘 아니까,

집에 주차하고 같이 나가는 것일까?


그는 여러 가정들을 생각하고는,

그래, 그럴 수 있지.

라고 다짐 하듯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머리를 좌우로 흔든다.  


모든 건 만나서 하고,

지금 해야 할 일은 이라고 생각하며,  

집을 빠르게 둘러보며, 집 정리를 한다.  

이미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지만, 여기저기 걸어 다니며 정리를 하고 옷장문을 연다.


가볍고 캐주얼하게?

아니면, 좀 차분하게?

집에 있듯이 편안하게?

바로 나갈 사람처럼?


한참을 고민하다, 늘 입던 대로,

베이식 면바지에 하얀 티를 입고,

밝은 색이 혼합된 남방을 걸친다.


갑자기 카페인이  떨어지는 것 같아,

커피를 또 한 잔 내려,

소파에 앉아 마신다.


앞으로 한 시간 반, 두 시간 후 면 그녀를 볼 수 있다.


제이슨은 책을 집었다가 노트북을 열었다가 하다가,

갑자기 생각이 난 듯 차 키를 가지고 주차장으로 간다.

차도 늘 그렇듯, 깨끗하지만,

물티슈를 꺼내 여기저기 닦고,

차를 몰아, 아파트 앞 길거리에 주차한다.  

현정이 오면, 그의 주차장 자리에 현정의 차를 세우게 하려는 것이다.


다시 집으로 올라 와, 거울을 보며,

다른 옷으로 입을까 생각하며,

옷들을 만지작 거리다 입은 옷 그대로 다시 소파에 앉는다.


겨우 30분이 지났다.

현정에게 전화를 한다.


“Hello.”

“Are you on the way?”

“Yes, I just passed San Francisco and

am driving on I-280.”


‘I-280’는 캘리포니아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고속도로 이름이다.

산호세로 내려가는 고속도로는 세 개가 있는데,

현정은 조금 멀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달리는 ‘I-280' 고속도로를 달린다.  


 바쁘게 갈 일도 없지 않은가.


“Driving safe.  I will wait for you.”


기다린다는 그의 말에 현정의 가슴이 콩닥 거린다.

오늘 볼 생각도, 그의 집으로 갈 계획도 없었다.

그가 전화를 했고,

보고 싶다.

만나고 싶다.

라는 그의 말에 즉흥적으로 행동한 것이다.

현정은, 늘 계획적으로, 이성적으로 살려고 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전화 한 통화에 내면의 또 다른 현정이 튀어나왔고,

내면의 현정은 즉흥적이고 감정적이며 무모하다.


아파트 입구에 나와서 기다린, 그는  현정의 차 옆자리에 앉는다.

“운전하고 오는 거 힘들지 않았어?”

제이슨의 말이 가깝고 따스하다.

“괜찮았어.”

“여기로 들어가면 주차장이야.  You can park at my spot.”


차에서 내리며, 제이슨이 말한다.  

“내 차는 밖에 세워 놨는데, 내 차로 가는 거 괜찮지? 어디 갈까? 배 고파? 뭐 좀 마시는 게 나을까? 내가 여기저기 괜찮은데, 검색 하긴 했는데. 어디 가는 게 좋을까?”

“여기 살아?”

“응.”

“너네 집부터 갈까?”

“응?”

“왜? 안돼?”

“아니. 돼.”

“먼저 집에 가서 어디 갈지 생각하면 되지 않아?”

“맞아. 그러면 되지. 좋은 생각이야. 그렇게 하자.”


제이슨은 마음이 당황하여 말이 휑설수설 하다.

지금까지의 그녀와는 달리 오늘 그녀의 모습과 말은 좀 파격적이다.  


그래서 새롭고, 신선하기도 한데,  

불안하기도 하다.

이러다, 뜻밖의 말을 듣게 될 까봐


예를 들어,

저번 일은 없던 걸로 해.

실수였어.

그렇게 깊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

불편해.


가장 듣기 싫은 말은,

안 만나는 게 좋겠어.

같은 그런 말.


하지만, 이런 이야기 라면, 굳이 만나서 할까?  

그냥 연락을 끊어 버리지 않을까?

제이슨은 그 짧은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그 당시, 그녀에게 실수 라도 한건 없는지도 빠르게 떠올려 본다.


순간 그는  현정을 너무 오래 세워 두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 미안. 미안. 이리 와. 저기 엘리베이터 타면 돼.”

제이슨이 앞서 걷다, 나란히 걷다 하며 현정을 에스코트한다.

“조심. 조심.”

조심할 것도 없는 아파트 빌딩 주차장에서,

제이슨은 주변을 살피며, 말한다.  


제이슨은 집문을 열며, 현정이 먼저 들어 가게 한다.


“신발은 편한 대로 해, 벗어도 되고 신어도 되고.”

“I will take them off.”


현정은 신발을 벗겠다는 의미였는데,

너무 벗는다고 강조해서 말한 거 같다.

그동안의 그녀의 욕망을 너무 고스란히 담은 거 같기도 하다.


그의  집 안으로 들어간, 현정은 거실을 한번 둘러보고 창가로 향한다.


“Nice view. 7층이라 그런가. 높은 곳에 올라와서 보는 풍경은 오랜만인 거 같아.”

“그래?.”

“응. 빌딩 주차장, 엘리베이터 다 오랜만이야.”


제이슨은 말없이 주방 앞 카운터에 서서,

현정을 바라본다.


오랜만이다라는 그녀의 말,

오랜만을 느끼는 그녀에게,

설렌다.

또 어떤 것이 그녀에게 오랜만인지 알고 싶다.


남자 집의 방문?

창가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

그런 것들도 그녀에게 오랜만일까?


창가에 서 있던 현정이 몸을 돌려 제이슨을 바라본다.  

그는, 현정을 바라보고 있고,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녀는 그를 보는 것만도, 욕망이 느껴진다.  

현정은, 그녀 안에 이런 육체적 욕망이 가득했던 사람이었나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몸도 마음도 홀린 듯 온전히 빠져 버린 기분은 처음인 거 같다.


그녀는 속으로,

네가 유혹한 거야.

그래 그거,

플러팅.

네가 플러팅 한 거야.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입에 입 맞춤을 한다.


그가,  

왜 이러세요?

이건 아닌데요

라고 밀어 내면,


현정은,

괜찮아.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라고 말할 생각이다.


제이슨은 카운터에 서서 현정을 보며, 참았다.  

그가 얼마나 참을성이 많으며,

여자 대하기를 얼마나 침착하고 젠틀하며,

얼마나 감성에 관심이 많은 사람인지 보여 주고자 애썼다.


그녀는 지난번처럼 청바지에, 티셔츠 그리고, 연한 베이지색의 카디건을 걸쳤다.   

마른 체형이라 생각했는데, 청바지와 티셔츠만 입었는데도, 그녀의 몸의 볼륨이 드러나 보인다.

복숭아뼈 위 길이의 청바지 아래로 보이는 그녀의 발찌,

그리고 오늘은 묶지 않고 흘러내린 머리카락도

자극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의 외모보다,

이 공간에 그녀가 채운 그녀의 존재가

그의 모든 감각을 건드린다.


그에게 다가와 입맞춤을 하는 현정을 거부할 수 없다.


입맞춤하던 현정이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본다.

알 수 없는 그의 표정이다.

현정은 잠시 이성을 차 리고,

그 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선다.


여자 입장에서도 남자가 원하지 않으면 안 하는 게 맞다.


그는 그녀를  잡아당겨  입을 맞춘다.  


둘은 시간이 가는 것도 모를 만큼,

무엇을 할 지도 떠오르지 않을 만큼,

시간과 공간에 둘 만 존재하듯,

그리고, 마치 오래 만난 듯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침대에 뒹굴 거리며 누워 있다.


창 밖 너머 노을이 지는 것이 보인다.

“배고프지 않아? 잠깐 나갔다 올까? 아니면 to-go  해도 되고.”

“잠깐 나갔다 오자. 바람 쐬고 싶어.”

“그래. 앞에 공원 길을 좀 걸어 나가면, 식당이 있어.”

“그래.”


그는 그의 스웨터를 현정의 어깨에 덮어주며 말한다.

“좀 쌀쌀할 까봐.”


제이슨은 그녀의 손을 잡고,

현관문을 나서다 말고,

그녀를 보며 말한다.


“그런데 말할 게 있는데.”

“뭐?”

“우리 오늘부터 일일이다.”

“뭐가?”

“나는 너의 남자친구, 너는 나의 여자친구.”


현정은 순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난다.

플러팅이 심한,

이 매력적인 남자가 가진,  

순수함은 도대체 어떤 조합일까?


“뭘 해?”

“넌 여자친구 난 남자친구. 그런 거 몰라? 한국에서는 요즘 우리 일일이다 그렇게 말하면 서로 애인 되는 거야.”

“그게 뭐야? 안 해.”

“왜?”

“뭘 했다고, 여자친구 남자친구를 해.“

“이런 게 여자친구, 남자친구야.

아. ‘in a relationship or romantic relationship’  

그거네. 내가 영어로 말했어야 이해하는 거였구나. 우리는 그런 거야 지금.”

“그럼 뭐가 달라져?”

“많이 달라지지. 내가 한국말로 표현하기가 좀 그래서 말 안 한 건데. 너도 그거 알지. 너는 내 거. 나는 너거.  우린 그런 거야.”


그는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현정에게 설명한다.

니거 내 거라는 말에 쑥스러움도 담고,

새로운 연애에 들뜨기도 한 모습으로.


“생각해 볼게.”

“뭘?”

“일일 그런 거?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우리 사이에 많이 달라지는 것들.”

“알았어.”

그는, 순순히 알았다고 말하고는,  현정의 입에 입맞춤을 하고, 말을 잇는다.

”그럼  생각해 봐. 너의 의견을 존중해. 그리고 나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니까 존중해 줘.”

“뭘?”

“이렇게 손잡고 입 맞추고 문자하고 전화하고 만나고 하는 거. 이제는 안 참고 할 거야. 알았지?”

“그게 뭐야.”

“가자. 가자. 배고프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그 후로, 현정은 엘레나가 토드네 간 날은 제이슨 집에 갔다.  

제이슨이 현정의 집으로 오겠다고도 했지만,

현정은 고속도로를  달려 그의 집으로 가는 길이 좋았다.


마치 이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가는 기분이랄까.

현실과 꿈을 잇는 여정이랄까.


현정은 제이슨의 집에 갈 때는,

여자 현정으로 달려갔고,

집으로 올 때는 현실 세계의 현정,

그리고 엄마로 돌아왔다.  


현정은 그녀가 그의 젊고, 핫하고 힙한 외모,

그리고, 그 와의 잠자리를 좋아하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제이슨은 따스하고 포근한 사람이다.  

현정의 마음에도 그에 대한 따스함과, 포근함이 일렁이는 것을 느낀다.  


그에 대한 욕망이 아닌, 그에 대한 열정을 느낀다.  

열정의 뿌리가 사랑에서 온 것이라면,

그녀는 그를  가슴이 뜨겁게 사랑한다.


그녀는 조금씩 웃음을 찾기 시작했고 삶에 활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제이슨 때문이다’

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가 현정에게 밝고 긍정적인 새로운 에너지를 불러일으켜 준 것은 맞다.


현정은 제이슨의 무한한 표현의 사랑 속에서,

억누르던 그녀의 감정들이 살아나고,

둘만 있는 것을 좋아하는 그에게서 안정감과 신뢰감이회복되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동안 숨겨왔거나 감추어 왔거나 혹은 등한시했던,

그녀의  여성성을 발견해,

요즘은 그녀가 꽤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여인 같다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착각은 자유라고 누가 말했는데.

착각을 좀 하고 살아야 살 만하다고도 누가 그랬는데.


그래서 현정은 감정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살 만하다.


제이슨은 늘 주말을 기다리며, 한 주를 보낸다.  

이전과 달리 그녀가 중간중간 문자도 보내주고,

전화도 해 줘서,

그나마 그리움이 덜 하지만 현정과 함께 하는 모든

공간 속에서, 그녀의 체취와, 숨결이 느껴진다.


현정은 깊은 사람이다.

생각도, 마음도, 행동도 모두.

그래서 그녀가 보여주는 신뢰는 견고하고,

사랑은 깊이가 있다.

제이슨은 그런 그녀에게 다 주어도 충분치 않은 사랑의 깊이를 느낀다.  


그녀와 있으면 그는 좋은 사람,

괜찮은 사람이라 느껴지고,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녀가 충분히 사랑하고, 믿고, 의지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의 머리와 마음속에 그녀와 함께 하는

수만 가지 미래들이 떠오르지만,  

현재 그녀와 있는 시간을 충분히 누리고 싶다.


그녀가 하는 모든 말 들을 주의 깊게 귀에 담고 싶고,

그녀와 하는 모든 것들을 기억에 고스란히 담고 싶고,

그의 눈동자에 새겨진, 그녀의 모습을 담고 싶고,

그녀의 숨결을,

그의 호흡에  담고 싶다.


그렇게 보낸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었다.


“크리스마스 같이 보내고 싶은데.  엄마는 안 와도 된다고도 하시는데, 가지 말까?”

“You have to go.”


제이슨 아버지는, 담낭 제거 수술을 받으셨다

배를 패창 해  배꼽으로 기계를 넣고, 떼어내는 수술이라 그리 어려운 수술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수술이었고,

한동안 복통이 심해, 고생하셨다고 한다.


 “3주 정도 다녀오는 건데”

“좀 더 있어도 되지 않아?  오랜만에 가는 거 아니야?”

“그건 아니야. 작년에  둘째 누나 결혼식 때 갔다 오긴 했어.”

“그렇구나.”

그는 그녀를 끌어안으며 말한다.

“같이 갈까?”

“내가?”

“응.”

“난 여기 있어야지.”


현정은 소파에서 일어나, 말을 돌리며 말한다.

“선물 사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나가자.”


크리스마스를 앞둔 때라, 백화점엔 사람들이 붐비고,

분위기도 들떠 있다.


제이슨은, 그릇 코너에서 컵을 만지작 거리고 있다.

“컵을 사가게?”

“아니. 이거 어때?”

“귀여워.”

“집에 놓고 같이 쓰자. 이건 너거, 이건 내 거.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커플컵을 사는 거야. 나중에 얼마큼 모았지 하며 세어보면 재밌지 않을까?”

“그러다, 못 만나거나 헤어지면? 처리하기 곤란한 물건들은 서로 안 사는 게 나아.”

“현정?”

“왜?”

“뭘 그렇게 슬프게 말해. 우리가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뭐가 슬퍼. 현실이 그런 거 아니야?”


아 맞다.

현실.


현정은 현실로부터 멀어져 그를 만나는 것인데,

그와의  만남을 현실화시키고 있다.


제이슨은 꿈이고,

꿈은 미래가 없으며,

그 순간만큼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다.


“알았어. 사자, 오늘 당장 여기다 핫 코코도 타 먹자.”

“나 사실 양말도 봤는데.”

“양말?”

“응. 크리스마스 프린트가 있는 수면 양말.”

“그것도 사. 그것도 커플템이야?”

“응.”

“잠옷 까지는 하지 마.”

“아. 그것도 사려고 하기는 했는데.”

“양말에 컵 정도면 이번 크리스마스는 충분해.”

“맞아. 매년 하나씩 늘려 가기로 했으니까.”

“그래. 매년 하나씩.”
 

매년이 꿈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지.


둘은, 쇼핑을 하고 커플로 산 양말을 신고 커플 컵에 커피와 핫 코코도 마시며 주말을 같이 보내고,

월요일 아침, 현정은, 제이슨을 공항에 데려다준다.


토드에게 미리 말해 양해를 구했다.  

아는 친구를 공항까지 데려다줘야 한다고.

토드는 현정에게 그런 친구가 있었나 궁금했지만,

전 부인의 사생활까지 깊이 알려고 하는 것은 지나친 것 같아,

더 묻지 않고, 알았다고 했다.


엘레나와 시간이 많이 생긴 토드는 그의 부모님과 함께 팜 스프링으로 짧게 여행을 갔다.


공항에 도착한 제이슨은 짐을 부치고,

검색대 앞에서 현정의 손을 잡은 채,

들어가지 않고 머뭇거린다.


“연락할게.”

“알았어.”

“우리 페이스 타임도 하자. 알았지?”

“그래.”


제이슨은 다시 그녀를 두 팔로 감싸 안고는,

아쉬운지 쉽게 발을 떼지 못하고,

 그렇게 한참을 서 있는다.


처음 미국에 올 때도,

가족들이 배웅을 나왔지만,

활짝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검색대를 들어갔던 그였다.  


첫 여자 친구가 영국으로 떠날 때도,

웃으며 안녕하고 손을 흔들던 그였다.


오늘은 공항에서 헤어지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라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를 혼자 미국에 두고 가는 것과,
한동안 그녀를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에,

벌써부터 밀려오는 그리움 때문이다.


“가야 할 시간 다 돼가. 어서가.”

밀쳐 내는 현정을 그는 다시 꼭 끌어안으며, 말한다.

“취소할까?”

“뭘?”

“작년에도 다녀왔었고.  아버지도 이미 수술하셔서 퇴원도 하시고 회복 중 이시래. 다 잘 됐대. 가지 말까?”

현정은 그를 밀어내며 말한다.

“빨리 가. 이래서 자식 다 소용없다고 하는 건가?  그래도 수술하셨는데 못 가는 상황도 아니고 가면 되는데 왜 안 가?”

“너랑 떨어져야 되니까 그렇지. 너도 오면 안 돼? 일주일 만이라도.”

“원래 이렇게 매달리고 조르는 스타일이었어?”

“아니야.”

“그런데 오늘 왜 그러지?”

“그러니까. 너랑 떨어지기 싫어서 그러지.”


현정은 제이슨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본다.

그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현정의 마음도 마찬 가지이다.

오히려 그에게,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에게는 만날 시간이 많지 않으니,

시간을 좀 더 같이 보내자고,

붙잡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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