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보아도 닳지 않는다
일주일에 한 번, 복잡한 서울을 떠나
한적한 서울을 만나러 간다.
그곳으로 가는 발걸음은 언제나 조급하다. 조금이라도 늦을까 봐.
그런데 그곳과 작별할 시간쯤이면 늘 아쉽다.
무언가가 놓고 오는 기분이다.
아마 그것은 내가 옛집을 생각하고 아끼는 마음일 꺼라 생각한다.
더 알고 싶은 곳.
더 사랑하고 싶은 곳.
많은 이들이 사랑했으면 하는 곳.
'시민 스스로 보존가치가 높은 문화유산을 지킨다'라는 깊은 마음을!!
많은 이들이 알았으면 하는 바람에 오늘 이렇게 끄적여보았다.
<2009년 3월 7일> 일기 중
20대의 자기소개서에 자주 등장했던 장소는 서울 성북동 최순우 옛집이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저자이며,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이셨던 최순우 선생님의 생가. 돌아가신 1984년 12월 16일까지 그곳에 머무르셨다. 딱 한 달 뒤, 내가 세상에 태어났다. 그분의 옛집을 알아가게 된 것은 2009년 상반기 파리 교환학생을 다녀온 후 우리나라 문화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마음에서 최순우 옛집의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면 서다. 매서운 추위가 강한 겨울날에 정원 청소를 하고, 한옥집의 대청마루를 걸레로 닦고 방문하는 사람에게 옛집 소개를 했다. 사람들에게 밝은 미소로 마주하며 몸은 추웠지만, 마음은 너무나 따스했던 그곳의 기억.
우연히 인터넷 포털을 서핑하다가.. 눈에 띄는 내 이름과...'회화 스터디'라는 제목을 접했다. 외국어 회화가 아닌... 미술에서 흔히 쓰는 '회화(繪畵)'. 방황을 많이 했을 때 들렀던 곳이 최순우 옛집에서의 스터디했을 때의 기록이 최순우 옛집의 네이버 카페에 기록되어있었다. 별 이유 없이, 졸업을 앞둔 시기에 그냥 내 마음이 동하여하고 싶었던 일이 바로 우리나라 문화재 관련 자원봉사였다. 한국에 귀국 후 이방인의 문화에 매료되기 전 우리 문화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2008년 12월부터 약 5개월 동안 성북동 최순우 옛집에서 옛집 관리와 도슨트(전시해설가) 활동을 하며 우리말과 문화를 알렸습니다.라고 자기소개서에 써놓은 구절도 기억난다.
막상 최순우 옛집에서 자원봉사를 하다 보니, 일부 타학교 학생들은 옛집에서 일하면 자원봉사학점이 인정이 되어 다른 봉사 장소보다 옛집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나의 경우 학점이 인정되지 않았음에도 몇 달간 이곳에 애정을 담으며 자발적인 자원봉사였다. 2006년 청소년문화교류센터(MIZY)에서 처음 '자원봉사'의 맛에 빠진 이후, 두 번째 자원봉사였다. 마냥 관심 있는 곳이었기에, 마음이 벌써 그곳으로 향했기 때문에 부모님도 어떻게 말릴 수 없었다. 사실, 대학에 진학할 때 어문계열(영문 혹은 불문)이나 미술사학 분야로 진학하고 싶었으나, 미술사학은 국내 대학에서 전공할 수 있는 문이 좁았기에 잠시 꿈을 접었다.
그런데, 프랑스 교환학생을 1년간 다녀오며 큰돈 들이지 않고 학생 신분으로서 전시회를 즐길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다보니 자연스레 미술관과 박물관에 대한 관심은 커졌다. 퐁피두센터의 1년 관람권을 저렴하게 끊을 수 있었고, 오르세 미술관도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의 경우 루브르 미술관이나 다른 문화재들도 관람하는 비용이 저렴하거나 무료로 볼 수 있는 시간대가 있어 미술관과 공연 등을 많이 접하다 보니 귀국 후 막연하게 '문화재' 분야에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문화재와 관련된 자원봉사 활동의 재미에 푹 빠질 무렵, 뒤늦게서야 고(故) 최순우 선생님께서 쓰셨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책에서 나온 회화 작품들을 공부하는 스터디에 합류했다. 최순우 옛집에서 활동하는 20대 자원봉사자들의 모임이었다. 언론사 스터디를 제대로 준비해본 적도 없던 내가 주전공(불문학)과 복수전공(국문학), 취업스터디(언론고시)와 관련 없는 생뚱한 분야의 스터디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해보고 싶다'는 열정 하나만 내 발길을 묶어버렸다. 서울에 홀로 유학생활을 했던 터라 혼자 거주했던 집에서 성북동 최순우 옛집의 거리는 왕복 2시간이 걸렸다. 막차시간이 가까울 저녁 10시까지 으산한 옛집에서 전통차를 마시면서 우리나라 전통회화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당시 학교 교양수업보다, 전공수업보다 더 맹렬히 공부했었던 것 같다. 최순우 옛집의 주변 명소들도 하나둘씩 찾아보며 성북동 동네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동네 주민들이 즐겨 찾는 빵집인 '나폴레옹'도 종종 가서 비싼 빵맛에 빠져보았고, 우리나라 3대 요정 중 하나인 길상사도 가보았다. 만해 한용운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까지 머무르셨던 '심우장'도 들러봤고, 영화 '비몽'의 촬영지였던 전통찻집 수연산방의 문턱도 넘어보았다. 이 많은 문화적 유산이 많은 곳이 성북동에 있음에도 일반인들이 몰라서 가보지 못한 비밀장소가 꽤 많이 있다.
새로운 공간에 내 몸을 맡길 때나
혹은 익숙한 공간을 다시 가봤을때 그 순간이 너무 좋다.
익숙한 곡보다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어떤 것 등등보다,.. 더..
그 공간이 내게 주는 그 설레임을
느낄 때 짜릿하다.
그 공간은 과거와 현재를 만나게
해주는 장소이자, 훗날
그 공간에 발을 내딛을 나를
상상해보는 일이 흥분된다.
다시 여기. 또 오게 될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든다. 강한 끌림이...
<2011년 10월 28~30일> 일기 중
어떻게 보면 최순우옛집에서의 반년간의 자원봉사 활동은 취준생의 마음을 위로하는 공간이었던 거 같다.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은데, 도망갈 수 없었던 그 시절. 전공을 살려 파리에서 교환학생을 다녀온 후 무얼 하나 내가 할 수 없다는 자괴감에 사로잡혔고, 졸업하기 전 남은 학점을 채우기 위해 어려웠던 국문학 수업을 겨우 들으며 동기부여없는 시간을 보냈었다. 최순우 옛집에서의 반년의 기억이 어떻게 보면 일상과 미래에 막막한 취준생의 마음을 살펴준 곳이었다. 엄마는 그 공간에서 어느 보상도 없이 자원봉사하며 시간을 보내는 나를 보며 혀를 차셨다. 그런데 최순우 옛집을 둘러보고 난 이후 이곳의 정서와 내 마음을 이해해주시고 했다.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에 입사원서를 쓸 기회가 생긴 것도 부모님의 관심 덕이었다. 경주에 거주하지 않으시나 부모님 두 분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신 편이다. 격주에 한 번은 이 박물관에 꼭 들르신다. 부모님이 참여하신 경주박물관에서 주최한 박물관 대학프로그램의 졸업여행이 일본이었다. 첫 해외여행이었고, 기족단위로 갈 기회가 생겼다. 대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안 지났던 시점에서 부모님을 따라 일본의 역사여행을 다녀왔다. 첫 해외여행치곤 실패없이 참 좋았었다. 이후 20년간 꾸준히 두 분은 박물관에 대한 애정이 많으셨다.
자주가는 공간이 바로 나를 만들 수 있었던 걸 그때 깨달았던 것 같다. 서점, 문구점, 도서관 못지 않게 내가 에너지를 많이 채우는 공간은 박물관이었다. 미술관보다 더 선호하는 공간.. 무언가를 자연스레 좋아하는 건 주위 환경이 뒷받침해줘야한다. 이후 박물관에 대한 집중적인 애정보다 예술의 큰 단위에서 바라보고 예술 전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거 같다. 그렇기에 2014년 박물관에 원서를 썼을 때는 최순우 옛집에서 자원봉사를 했던 경험을 쓰지 않았다. 그 이력을 말고 나를 돋보일 수 있는 사회생활의 경력들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업무자체도 문화재와 관련된 업무가 아닌 언론,홍보직군이었기에 그 업무를 잘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을터다. 그렇게 2년을, 20대의 끝자락에 그곳에 몸담았은 것은 복이었다.
“사람은 만물을 소유할 수 없기에 내면이 채워져야한다는 것!
학습과 경험.. 공감..상상력의 힘을 기르자.
빈손으로 떠나도 온전히 내 것으로 채울 수 있으니깐.”
2015년 9월, 박물관에 몸담으며 일기장에 끄적였던 문장들이다. 최대한 박물관에서 누릴 수 있는 환경을 모두 즐겼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지금 생각해면 아쉬운 마음도 있다. 그래도 또 다른 인연의 길이 박물관과 나와의 길을 이어줄 꺼라 생각한다. 내가 걸어온 행적은 늘 그랬다. 바라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순간들이 참 많았다.
2006년 1년간 파리 이날코(INALCO) 교환학생으로 공부하며 귀국할 때 이방인의 문화에 매료되기 전 우리문화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후, 2008년 연말에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재단에서 운영하는 성북동 '최순우옛집'에서 제4대 국립중앙박물관 최순우 관장의 생가를 찾은 관람객들에게 도슨트(전시해설가)로서 우리말과 문화를 알렸다. 그 중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문화재는 달항아리였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몸담았을 때도 애착이 많았던 전시는 <조선청화, 푸른빛에 물들다>였다. ‘전시 홍보’란에 처음 내 이름이 새겨진 도록을 보며 얼마나 좋아했는지.
지난 3월,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3층 백자실이 개편됐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가고 싶었다. 서울 성북동 최순우 옛집의 자원봉사를 통해 달항아리의 매력에 빠졌고,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책을 통해서 더 가까이에 달항아리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백자실에서 최순우 전 관장님의 이야기가 담겨있던 백자실에는 구본창 선생님의 작품도 같은 전시실에서 볼 수 있었다. 2012년에는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김환기 전>을 통해 여러 달항아리의 그림을 관람하고 몸담은 매체에서 전시 리뷰 기사를 아래와 같이 썼다.
“무심코 가다가 우거진 나무 그늘을 지날 때면 쉬어가고 싶어 진다. 비록 초라한 집일망정 수(樹)에 파묻혀 살고 싶어 진다.” 수화(樹話). 자연을 사랑하는 작가의 마음에 새겨진 이름이다. 그는 스스로를 그렇게 불렀다. 김환기에게 자연은 친구이자 가족이었을 것이다. 그 자연 중 유독 나무를 사랑해서 자신의 이름에 담았고, 자신의 화폭에 자연을 닮은 푸른색을 담았다.(중략)
김환기의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재는 항아리다. 뉴욕에서 활동하기 전 서울과 파리에 머물렀을 때 유독 그의 작품명엔 ‘항아리’가 들어간 작품이 많았다. 항아리만 그려진 ‘항아리’(1955~1956), 뒤에 달이 떠 있고 매화가 가지를 뻗고 있는 ‘항아리와 매화’, 매화나무 사이로 항아리를 들고 있는 ‘여인과 매화와 항아리’, 제각각 여러 패턴의 항아리들을 그린 ‘항아리’(1956)도 그러한 예다. 김환기는 1950년대에 수많은 항아리를 그려낸 이후, 항아리의 둥근 모형을 점점 추상화에 가까운 단순한 원의 모형인 달의 모습에 가깝게 표현하기 시작한다. (중략)
집념뿐만 아니라 사물을 보는 물상(物象)을 정확하게 볼 줄 아는 눈을 갖고 있는 수화 김환기. 그의 심미안(審美眼)을 통해 우리나라의 자연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보자. 2월 26일까지, 갤러리현대.”
글 ㅇㅇㅇ기자 (@sone) 사진 갤러리현대
최순우 옛집의 자원봉사를 뒤로 한 후 몇 년이 지나, 국립중앙박물관에 몸담으며 백자와 청자의 매력에 흠뻑 빠지는 순간들이 여러 차례 다가왔다. 좋은 것은 자주 보아야 한다.. 자주 보아도 닳지 않는다. 내 안목이 더 높아진다. 그 어느 전시보다도 우리나라의 국보와 보물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던 2년을 잊지 못할 듯싶다. 소유할 수 없어도 다 마음에 담아 있으니. 매일 꺼내봐야겠다.
* 박물관에서 몸담았던 내 모습을 담은 기록들을 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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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우 옛집을 사진을 직접 담았던 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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