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지가 너무 많으면 생기는 일
졸린 눈을 비비며 출근하는 길,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향하는 대로 당신은 회사 근처 카페로 향한다. 날씨나 기분에 따라 당신의 선택은 달라지지만 대체로 쉽게 결정을 내린다. 비가 오고 조금 쌀쌀한 오늘은 따뜻한 카페 라테, 어젯밤 과음을 해 목이 너무 마를 때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힘이 없어 나른할 때는 달콤한 캐러멜 마끼아또.
기다려온 점심시간, 당신은 구내식당으로 발걸음을 향한다. 점심 메뉴는 3가지가 준비되어 있다. A는 한식, B는 양식이나 중식, C는 건강식인 샐러드다. 구내식당에 입장해 배식구로 걸어가는 동안 전시되어 있는 점심 식사 샘플을 보고 머릿속으로 몇 가지 판단을 거친 후 단 시간 안에 쉽게 결정한다. 밥이 끌린 당신은 한식을 선택 후 된장국과 제육불고기로 식사를 마친다.
점심을 먹고 가벼운 산책을 하러 나갔다가 대형 화장품 매장에 들른다. 마침 건조한 날씨에 바를 립밤이 필요했던 터라 매장 문을 열고 들어간다. 겨울 시즌에 맞춰 여러 가지 립밤들이 나열되어 있다. 보습 기능에만 충실한 컬러감이 없는 립밤도 있고, 약간의 발색을 더해주는 립밤도 있다. 또한 길쭉한 뚜껑을 여는 스틱형으로 된 것도 있고, 눌러서 짜내는 튜브형, 단지형도 있다. 과일향이 나는 것도 있고, 꽃내음이 은은하게 나는 것도 있다. 끈적임이 있는 것도 있고, 깔끔하게 마무리되지만 보습력이 약해 보이는 것도 있다. 이것저것 테스트를 해보다가 왠지 피곤해진 당신은 다른 물건들이 있는 쪽을 바라본다. 마침 휴대용 손소독제가 떨어졌다는 기억이 난다. 립밤은 내려두고 알코올 향이 너무 강하지 않으면서 적당히 끈적임이 없는 적당한 크기의 휴대용 손소독제를 구매 후 매장 밖을 나선다.
가족과 외식 약속이 있는 당신은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향한다. 여럿이 머리를 맞대고 메뉴를 골라보지만 애피타이저 페이지부터 메뉴가 끝도 없다. 파스타도 여러 종류에 스테이크도 꽃등심, 안심, 티본 등 선택지는 무한하다. 결국 그들은 선언한다.
패밀리 세트 시키자!
여차저차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집에서 마실 와인을 사러 마트에 들르니 더더욱 머리가 아찔해진다. 수없이 많은 와인들이 줄줄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니 무엇을 고를지 고민이다. 그냥 맥주나 살까 하다가 결국은 '오늘의 추천 와인'을 골라 나온다.
이렇게 우리는 매일 많은 선택지를 마주한다. 결정이 어려울 때도 있지만 때로는 고민했던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빠른 결정을 내린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2000년 무렵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와 스탠퍼드대학교 연구진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한 식료품점을 빌려서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했다. 계산대 근처에 작은 과일잼 판매 부스를 설치한 후, 시간마다 진열을 바꿔가며 한 번은 24종류의 잼을, 다음 차례에는 6종류의 잼을 판매했다. 그리고는 구매율을 관찰해보았다.
어떤 상황에서 더 많은 잼이 팔렸을지, 아마 당신은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24종류의 잼을 진열했을 때에는 구매율은 5퍼센트에 불과했지만 6종류의 잼을 진열했을 때의 구매율은 30퍼센트였다. 구매는 10매, 재구매는 무려 15배 넘게 차이가 났다. 더 많은 종류의 잼을 진열했을 때 사람들이 더 많이 구경하러 왔지만, 적당한 종류의 잼을 진열했을 때의 구매율이 훨씬 높았다.
이를 선택의 패러독스 (the paradox of choice)라고 하는데, 선택지가 많을수록 만족스러운 결정을 방해한다는 이야기다. 선택지가 많다면 구경하는 재미는 있지만, 내 선택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고 선택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미련이 커지기 때문에 구매로는 쉽게 이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새로운 선택지를 발견할 때마다 좋은 감정이 커진다. 이런 디자인의 립밤도 있고, 이런 재질의 립밤도 있네 하고 말이다. 하지만 선택지가 점점 늘어나고 어느 숫자를 넘어가면 나쁜 감정이 커지고 만족도가 떨어진다. 그 기준점이 10가지다. 10가지가 넘어가버리면 선택이 고통스러워져 회피하게 된다. 보통은 3에서 6가지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선택을 하게 된다.
선택항목이 많으면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할지 모른다는 공포를 느끼게 되어 정신적 스트레스를 느낀다. 스타벅스에서 시즌 신상 메뉴를 출시해도 딱 3가지 정도만 출시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또한 레스토랑에서는 런치 세트, 커플 세트, 패밀리 세트 등 선택지가 적은 특별 메뉴를 새로 만들어 빠른 결정을 돕는다. 세트 메뉴는 인원수만 맞추면 고민의 여지가 없기에 선택의 고통을 줄여준다. 또는 메뉴 사이사이에 추천 메뉴, 인기 메뉴 등을 표시하여 알게 모르게 선택의 폭을 줄여주는 방법도 사용한다.
종류가 많기로 유명한 와인을 고르는 것이 힘든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와인샵에서는 레드와 화이트로 나눈 후 그 안에서 원산지나 맛, 바디감으로 분류하여 진열한 후, '와인상 수상작', '판매율 1위'등 라벨도 표시해 둔다. 수많은 와인 속에 파묻혀 많은 선택에 놓이는 것보다 훨씬 구매를 수월하게 한다.
오늘, 당신이 만나는 선택지는 몇 개나 될까?
(참고 문헌)
숫자의 법칙 - 노구치 데츠노리
열두 발자국 - 정재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