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12월이 사람이라면 그는 융통성 없고, 깐깐할 것이다. “올해 당신에게 52주, 365일, 8760시간을 제공했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였는지요?”라고 따져 물을 것이다. 시간을 쓸모 있게 썼다는 변변한 증거를 찾지 못하면 쉬이 울적해지는 계절, 12월엔 상념이 많아진다.
올해 칠순인 나의 아버지에겐 12월과 대적할 필살 무기가 있다. 탁상 달력이다. 아버지는 매일 그날의 운동 시간, 계단 오르기 횟수, 혈압 변화, 음주 여부, 반신욕 여부 등을 자신만 알아볼 수 있는 숫자와 기호로 달력에 기록한다. 반복적인 일상 의례뿐 아니라 일련의 텃밭 농사 작업, 가족·친지 생일, 지인 모임도 기록 대상이다. 아버지의 탁상 달력은 언제나 고불고불한 암호로 가득 차 있다. 특별한 일이 있어서도 아니고, 남 보여주기 위함도 아니다. 달력 한 칸 한 칸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냈는지 스스로 설명하고 싶어 증거를 모으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일본의 개념미술가 온 카와라(On Kawara)는 1966년 1월 4일부터 매일 날짜를 그렸다. 캔버스에 단색 배경색을 여러 번 칠한 뒤 그날의 날짜를 하얀 글씨로 그린다. 화폭엔 ’JAN. 4, 1966’ 같은 무미건조한 기호가 남는다. 연작 이름은 ‘오늘’. 온 카와라는 24시간 단위로 엄격하게 작업 시간을 끊었다. 4일을 그리던 중에 시간이 자정을 넘어 5일이 되면 만들던 작품을 폐기했다. 그렇게 50여 년 동안 날짜를 그려서 3천여 점의 ‘오늘’을 남겼다.
동시에 매일 아침 자신이 일어난 시각을 기록해 지인들에게 엽서를 보내고(1968-1979), 매일 신문을 스크랩하고(1966-1995), ‘나는 아직 생존해 있다’는 문장을 전보로 보냈다(1970-2000). 이런 작품 활동 이외의 인터뷰, 사진 촬영은 모두 거부했고, 심지어 자신의 전시회 행사에도 드물게 참석했다.
하루라는 시간이 새로이 주어지면 이를 살아내는 행위, 그러니까 삶 그 자체를 예술 활동으로 만든 작가는 이 땅에서 총 29,711일을 살고 떠났다.
남 보기 그럴싸하게, 혹은 생산적으로 시간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힐 때면 아버지의 탁상 달력과 온 카와라의 작품을 떠올린다. 내 시간을 어디에 얼마큼 쓸지,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 결정하는 건 다른 사람 아닌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는데 이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
* 2017년 12월 18일자 조선일보 '일사일언' 초고입니다. 최종 게재된 편집본과는 조금 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