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진, 상인들이 정말 굳세 보인다. 등이 굽고 손등이 다 터졌는데도 일하는 모습이 놀라워. 그런데 왜 상인이 거의 다 할머니야? 식당에서 일하는 분들도 그렇고. 할아버지는 어디 있어?” 부산 자갈치 시장, 12월 칼바람에 떨면서 스페인 친구 에스테파냐가 물었다.
방한 8일 차 여행자의 객관적 시선 덕에 나 역시 궁금해졌다. 생활 최전선에서 좌절하지 않고 노동하며 주변을 먹이고 챙기는 생활력은 왜 할머니들에게 나올 때가 많을까. “서울, 경주에서도 느꼈어. 한국 할머니는 경이로울 정도로 강인해. 아름다워.” 미술사학을 공부한 에스테파냐는 할머니들과 달항아리 백자를 연결했다. 잘나 보이고 싶다는 욕망이 감지 되지 않아서 오히려 매력적인, 폭력적인 경쟁 논리에서 멀어져 있는 초월적 존재. 둥그렇게 감싸 안는 힘.
뭉툭하게 닳은 할머니 손가락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말해주는 게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서글펐다. 경이로운 생활력을 가지기까지 감내했을 고통이 떠올라서다. 참아내는 힘은 눈물, 땀, 한숨을 먹고 큰다. 제국주의를 이끈 스페인과 달리 한국은 강대국 사이에서 온갖 침략을 버텼다. 현대엔 수직적 사회 구조 안에서 다수가 을의 설움을 겪는다. 한국인이라면 억세게 버티느라 종종 서러워진다는 게 무슨 뜻인지 본능적으로 알지 않을까. 약자로서의 경험을 ‘일단 참고 위로 올라가 힘을 쥐어야지’라는 각자도생 세계관의 땔감으로 쓰는 사람도 있고, 타인의 아픔에 감응하는 감수성의 땔감으로 쓰는 이도 있다.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한국인 최초로 은사자상을 받은 임흥순 작가의 신작 전시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을 보았다. 재연극 영상으로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시기를 산 네 할머니의 생애를 불러낸 작품. ‘저 공포와 슬픔을 어찌 견뎠을까?’ 싶은 사건으로 가득 찬 일생에 몸서리치다가 전시장 어귀에 놓인 할머니들의 살림살이, 옷, 뜨개질 도구에 눈길을 빼앗겼다. 상흔을 끌어안고 다시 밥을 짓고 생활을 가꾸고 주변을 먹인 흔적.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 작가가 미술관 중앙에 설치한 거대한 작품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가 구한 나라’.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니체의 말처럼 할머니들은 우리를 갈라놓으려는 시도에서 살아나와 우리를 잇고 있다.
* 2018년 1월 9일자 조선일보 일사일언 초고입니다. 최종 게재된 편집본과 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