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근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택시를 불렀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폭우가 지나간 밤거리의 어수선함을 바라보는데, 기사 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저는 이 라디오 프로가 제일 재밌더라고요. 탤런트 김성환이가 하는 거예요. 옛날, 개발되기 전 서울이 어땠는지 이야기하는 프로예요."
종일 차 안에 혼자 지내는 택시 기사님 중에는 손님이 타면 대화 상대가 될 수 있을지 호시탐탐 가늠해 보는 분들이 있다. 그런 기사님이겠거니 대충 대답을 얼버무렸다. 조용히 가고 싶어요,라고 직접 요청할 수도 있었지만, 약간의 전라도 사투리를 써 가며 천천히 말을 고르는 습관이 있는 작은 외삼촌이 생각나는 말투를 가진 분이었다. 무엇보다 말꼬리마다 높임말을 잊지 않은 데다 목소리에서 설명하기 힘든 선함이 묻어났다. 더 이야기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할 찰나, 아저씨가 다시 말을 걸었다.
"웃기고 신기한 이야기 해줄까요? 예전에 차관아파트라고 있었어요. 60년대에 우리나라가 돈이 없으니까 미국에서 돈을 차관해서 아파트를 지었단 말이죠. AID차관아파트라고 했는데, AID가 무슨 뜻이 나면... 음... 아마 차관일 거야. 하여간 큰 단지였는데 지금은 래미안이니 힐스테이트니 다 바뀌었죠. 저기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차관아파트 사거리가 나와요. 어쨌든 아파트 단지가 생기니 그 주변에도 작게 상권이 생겨서 슈퍼마켓도 있고 작은 여관도 있고 그랬어요.
우리 처랑 결혼하기로 하고 결혼식이 한 달쯤 남았을 때, 처갓집에서 그러는 거예요. 입덧을 한다고. 우리가 결혼 약속을 하고 1박 2일 여행을 했거든요. 차관아파트 앞에 있는 여관에서 딱 하룻밤 같이 보냈는데, 그때 잉태가 된 거예요. 잉태가 뭔지 알죠? 그때 생긴 애가 우리 아들이에요. 허허."
택시는 언주역 사거리를 지나 학동역을 향해 달렸다. 이제 대화를 이어가고 싶은 건 내 쪽이었다.
"아드님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만으로 서른다섯, 그러니까 서른여섯이죠."
"아드님도 이 이야기를 아세요? 본인이 세상에 태어난 이야기 아드님께도 들려주신 적 있으세요?"
"아뇨, 아들은 모르죠."
"아드님께도 들려주세요. 좋아하실 것 같아요."
"우리 아들은 차 기술자예요. 외국차 서비스센터 정비팀. 딸은 산부인과 간호사고요. 딸은 고참 간호사라서 제왕절개 수술만 잡히면 의사가 얘를 찾거든. 아들은 빨간 날에 꼬박꼬박 쉴 수 있고요. 근데 둘 다 결혼을 안 했어요."
"그럼 다들 독립 안 하고 네 식구가 한 집에 사시는 거예요?"
"네. 그렇죠. 아, 아니.. 세 식구."
택시는 도산사거리를 지나 압구정역을 향해 달렸다. 신호 대기 중인 차량의 헤드라이트 불빛과 신호등 불빛이 물기로 축축해진 아스팔트 위로 이지러졌다. 까만 밤 안에서 유독 도드라져 보였던 초록과 빨강과 주황이 미끄러져 간 흔적.
"요즘 분들이 내 이야기 들으면 다들 대단하다고 해요. 애들 어릴 때부터 내가 혼자 키웠거든."
"아, 그러셨어요?"
"회사 다니면서 매일 애들 도시락 싸고... 그때는 정말 힘들었죠. 우리 집사람이 삼 형제의 막내딸이었거든. 그런데 그 아버지 정신 질환이 집사람한테 간 거야. 우리 막내가 세 살 되던 해에 갑자기 발병을 했어요. 애들이 집에 멀쩡히 있는데 자꾸 애들 찾으러 산에 가야 한다고 그러고 몇 날 며칠 잠도 안 자고 먹지도 않고..."
"아휴, 너무 놀라셨겠어요."
"놀라다마다요. 그런데 그렇게 되니까 처가에서 미안하다고, 나를 속였다고 하더라고요. 처녀 때부터 약은 먹고 있었는가 봐. 그래도 지 짝 찾고 여의고 나면 괜찮아질 거다 하면서 결혼만 재촉을 했던 거예요. 어쩐지 혼인을 너무 서두르더라고. 중요한 걸 숨기고 결혼을 했으니 나더러 새장가 가라고 이혼을 해주더라고요? 그렇게 이혼도 했는데 내 마음에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자꾸 드는 거예요. 그렇게 처가랑 연락은 끊지 않고 있었어요. 그러다 집사람이 병을 치료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가보니까 정말 나았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합치자 했더니 처가 쪽에서 혼인신고를 해야지 데려갈 수 있다네. 같은 여자랑 혼인신고를 두 번 했지 않았겠어요, 내가.
그렇게 서너 해 즈음은 괜찮게 지냈어요. 그런데 또 병이 나고, 정신병원에 2년 입원하고, 나오면 3년 괜찮고 그렇게 왔다 갔다 했어요. 그러다 근 20년 전부터는 병원에만 있어요. 나이 들수록 병이 더 심해지는 거래, 원래 정신 질환이라는 게. 얼마 전에는 폐가 안 좋아져서 수술도 받았거든요. 오래 병원 안에만 있어서 그랬는지 폐에 곰팡이균이 들었다는 거야. 아니, 살아있는 사람 폐에 어찌 그런 게 들어가요. 가슴 열고 폐를 절단하는 수술을 해서 내가 또 한 달 동안 일 쉬고 병수발도 다 했어요."
"그래도 정말 대단하세요. 혼자 애들도 키우시고, 병수발도 하시고. 얼마나 힘드셨을까..."
"내가 나쁜 생각도 몇 번 했어요. 애들을 그냥 어디 보내 버릴까 어쩔까 하기도 했죠. 그런데 나 하나 희생하면 애들도 마음 편하고, 처가 식구들도 엄청 고마워하고, 집사람도 제일 편하니까."
"그런 일 겪으면 원망도 많이 생길 수 있을 텐데, 기사님께는 전혀 그런 게 안 느껴져요."
"남 탓하고 원망해봐야 뭐 해요. 이게 내 인생인데."
이게 내 인생인데, 이게 내 인생인데, 이게 내 인생인데. 아저씨 목소리가 가슴 안에서 메아리쳤다. 흔히 말하는 불행한 상황에서도 자기 삶에 책임지는 사람들, 핑계 대지 않는 사람들,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 어리광 많은 내 마음 상태를 직시하게 만드는 사람들, 생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들.
택시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동호대교 초입에서부터 차량 행렬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아저씨는 "아이고, 여기가 원래 이렇게 안 막히는 곳인데 오늘 무슨 일이야" 놀라셨지만, 나는 이야기할 시간을 조금 더 벌 수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손님한테 이런 이야기 해봤자 소용없지만, 우리 애들이 결혼을 머뭇대요, 엄마 때문에. 살아있는 부모를 죽었다고 할 순 없잖아요. 사귀는 사람이 생겨도 엄마가 정신 질환으로 병원에 있다는 이야길 어느 시점에는 해야 되는 거예요. 상대 부모를 생각해봐요. 어느 부모가 좋다고 하겠어요. 그래서 그런지 애들이 결혼 생각도 없고... 나는 그게 너무 속상해서 언젠가 애들한테 '너희 엄마가 차라리 아파서 죽었으면 흠이 되지 않을 텐데'라고 말한 적도 있어요."
"아... 너무 마음 아프셨겠어요."
"마음 아프죠. 우리 딸이 사귀는 사람이 있는데, 저쪽 부모님이 빨리 결혼을 시키고 싶나 봐. 그래서 언제 마음먹고 이야기를 하겠다고 하더니 결국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그만뒀다고 그러더라고요. 정신 질환이 유전이거든요. 자식대에서 발병할지 손주대에서 발병할지 몰라요. 다행히 우리 애들은 멀쩡한데..."
"요즘 아이 낳지 않을 생각인 사람도 많으니까요,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애들이 엄마 저러고 있는 것 때문에 지들 인생 못 사는 게 진짜 속상하죠."
"어디 있을 거예요...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다가올 추석에 음식 해서 애들이랑 또 병원에 갈 거거든요. 근데 그렇게 한 번씩 다녀오면 더 힘들어요. 음식 좀 나눠먹고 이야기하다 또 병원에다 혼자 두고 와야 하는 거니까. 엄마 혼자 두고 오는 거니까. 명절이 그래서 우리는 더 힘들어."
택시가 좌회전 신호를 받으면 곧 목적지였다. 내가 서둘러 말을 이어갔다.
"기사님, 저희 시아버지도 시어머니 간병을 오래 하셨어요. 저희 남편이 일곱 살 때 쓰러지신 뒤로 지금껏 돌보고 계세요. 처음 남편이랑 사귈 때 남편이 정말 어렵게 그 이야기를 꺼내더라고요. 막 울었던 기억도 나요. 그런데 제가 처음 인사드리러 가서 아버님을 보는데, 아버님이 너무 멋진 사람인 거예요. 어렵게 돈 벌고 애들 키우고 아픈 아내 수발을 일일이 해주고. 이런 아버지를 보고 자란 아들이라면 결혼해도 괜찮겠다 싶어서 결혼 결심했어요. 정말로 그랬어요. 아드님께도 말씀해주세요. 이렇게 결혼하는 사람도 있다고. 기사님 모습을 보고 가족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아마 있을 거예요."
아파트 입구에 도착했을 때, 아저씨는 천천히 상체를 내쪽으로 틀더니 택시 실내등을 켰다. 눈코입 모양과 안경 내려쓴 각도까지 세세히 눈에 담았다. 아저씨는 내 눈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아무 말 없이 느릿하게. 아저씨가 입술을 다시 떼기까지 걸린 시간은 몇 초 정도였지만, 나는 우리 사이에 한참의 시간이 흐른 듯 느꼈다.
아저씨는 미터기를 끄고 카드 결제기를 작동시켰다. 내릴 채비하는 내게 아저씨는 한마디 덧붙였다.
"고마워요. 남편분을 많이 사랑해줘야겠어요. 남편분, 많이 사랑해주세요."
"네, 그럴게요. 많이 사랑해줄게요."
택시 문을 닫았다. 부웅 소리와 함께 아저씨는 자신의 길을 떠났다. 아파트 단지로 걸어 들어오는 길, 눈물이 후두둑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