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오 라모스 <양이 되고 싶었던 늑대>
주변에서 모두가 자존감에 대해 말합니다. '너는 나에게 상처줄 수 없다'고 선언하는 힘도 자존감에서 나오고, '미움받을 용기'와 '지지않는 마음'도 자존감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이제 막 부모가 된 친구들은 '아이의 자존감을 높이는 7단계 대화법'을 공부하고, 아이를 크게 혼낸 날엔 늦은 밤 혼자 거실에 앉아 '엄마의 자존감'에서 문제를 찾습니다. 그리고 죄책감에 괴로워하죠. 엄마 자존감이 높아야 아이 자존감도 높다,는 메시지는 때론 엄마의 낮은 자존감이 대물림된다는 협박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서점에 가면 자존감의 비밀을 밝혀준다는 심리학 책들이 범람하고, 친구들과 고민 상담을 하다가도 "그건 네 자존감이 너무 낮아서 그래." 이런 말도 곧잘 듣게 됩니다.
이렇게 자존감이란 말이 자주 들려오는 건 물론 자존감이 중요하기 때문이겠죠. 게다가 자존감 높여주는 양육법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전무했던 시기, 늘 시급한 생존 논리가 우선시 되는 사회 안에서 그런 철학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부모님 밑에서 자란 세대였기에 제 주변에서 자존감에 문제 없는 친구를 찾는 것도 힘들고요. 그러니 할 말이 많죠. 때론 낮은 자존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상처를 들어내보이며 공감을 형성하고 치유받는 경험도 하게 되지만, 어떤 친구들은 "내가 자존감이 낮아서..."라는 말을 습관처럼 쓰면서 모든 문제의 원인처럼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 이면에는 아마도 이런 메시지가 숨어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이렇게 낮은 자존감을 갖게 된 것은 내 탓이 아니었다고.
그러니 네가 나를 불쌍하게 여겨주고, 예뻐해줘야 해.
물론 상처받은 어린 시절의 자신을 끌어안아주고 보듬어주는 건 건강한 마음을 갖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뜨거운 눈물도 쏟고, 외롭고 힘들었던 자신의 과거에 안타까운 연민을 느끼기도 하죠. 그러나 그 과정도 어느 정도여야 합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상처만 만지작거리고 산다면 그것은 상처에 자신을 매어둔다는 의미고, 그렇게 종속된 상태를 '자존'이라고 부를 순 없을 테니까요.
전 심리학 책 읽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어쩜 그리 마음에 쏙쏙 와닿게 제목들을 잘 짓는지 안 보고 배길수가 없었죠.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밑줄을 긋기도 했고요. 인생의 잠언처럼 느껴지는 교훈을 발견해 노트니 휴대폰이니 온갖 곳에 저장해두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놈이 그 놈처럼 느껴졌습니다. 새로운 깨달음, 정수리가 쪼개지는 충격이 없는데도 관성적으로 심리학 책 더미를 뒤적이는 제 모습이 어느 날 '퇴행'처럼 느껴지더군요.
과거의 상처를 핑계대지 않고 다가올 인생을 정면으로 마주하겠다는 선언과 용기. 그게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마냥 따뜻하게 느껴지는 책의 품에 안겨 머물려 하는 '유예와 미루기'로 시간을 버리고 있었습니다. 문제가 뭔지 알았고 이제 출동만 하면 되는데, 출동하기 두려워서 '난 아직 준비가 안 됐어'라고 자기 암시를 계속 하는 꼴이었죠.
요즘 우리 사회의 자존감 책 열풍이 이 모습과 비슷하다고 느껴집니다.
자존감에 대한 말을 열심히 하면서 위안 받고, 정작 떨치고 일어날 독립의 순간은 미루고 있는 게 아닌가 돌아봅니다.
당장 저부터 말예요.
그림책 처방
마리오 라모스(Mario Ramos)는 벨기에가 자랑하는 그림책 작가 중 한 명입니다. 1995년에 데뷔해 2012년 12월 54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돌아가시기 전까지 약 30여권의 그림책을 발표했고, 모국 벨기에와 같은 언어권인 프랑스를 넘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작품도 많았습니다.
마리오 라모스는 '자기 긍정'의 의미가 무엇인지 밝히는 작품을 즐겨 그렸습니다. 타자와의 차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자기답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어린이 독자에게 이야기 들려주는 걸 좋아하는 작가였어요. 한국에선 그의 유작인 『명령하는 왕관』을 비롯해 『돼지 학교에 간 늑대』 『난 생쥐가 아니야』 등 약 8권 정도의 책이 번역되었습니다. 오늘 소개할 『양이 되고 싶었던 늑대』는 한국엔 출간되지 않은 작품입니다.
표지에서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아기 늑대의 꿈은 양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늑대들은 이 꿈을 비웃습니다. 하지만 아기 늑대는 아랑곳하지 않아요. 양이 되고 싶은 뚜렷한 이유가 있었거든요. 아기 늑대는 하늘을 날고 싶었습니다. 하늘을 날려면 날개가 있어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했죠. 가만히 양들을 관찰해보니 양들도 날개는 없지만 때때로 '메에에~' 하고 폴짝 뛰어올라 하늘로 날아오를 때가 있었습니다. 이 모습에 반해버려서 아기 늑대는 양이 되고 싶어했죠.
그래서 어느 날 양으로 위장을 하고 양떼 사이로 다가갑니다. 변장이 허접했기에 양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데 하늘에서 내려다 볼 때는 완벽한 위장이었습니다. 독수리조차 헷갈리게 할만큼요. 아기 늑대를 양으로 착각한 독수리가 사냥감을 낚아채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독수리는 늑대를 나중에 먹기 위해 '킵' 해놓고 다시 사냥을 떠나고, 아기 늑대는 절벽 꼭대기에 아슬아슬하게 놓여진 독수리 둥지에 혼자 남겨집니다. 주변은 동물들 뼈가 어지럽게 널려있어요.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전 여기까지 읽었을 때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식의 교훈이 담긴 책인 줄 알았습니다. 자기 천성대로 살지 않고 남을 닮고자 하다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은 우매한 늑대 이야기인 줄 알았죠. 하지만 마리오 라모스는 그런 뻔한 작가가 아니었습니다. 사실 이 책의 진짜 이야기는 이 이후부터 시작됩니다.
홀로 무시무시한 독수리 둥지에 앉아 "난 양이 아니란말야!" 억울해하던 아기 늑대는 "내가 이렇게 독수리 먹이가 되게 보고만 있지 않겠어!" 하며 제 힘으로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둥지 옆 절벽의 돌들을 헤치고 땅굴을 파기 시작합니다. 어둠 속에 갇혀서 잘 파지지 않는 땅을 헤치며 아기 늑대는 자꾸 울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땅을 파내려가죠. 그러다 어느 순간 절벽 반대편에 다달아 구멍에서 떨어지고 맙니다.
떨어지다 겨우 나무를 붙잡은 아기 늑대는 살려달라고 소리쳤지만, 주변엔 아무도 없습니다. 외롭고 힘들게 간신히 버티고 있는 늑대에게 시간은 너무나 천천히 흘러갑니다.
늑대는 이렇게 다음 날 아침까지 버티다 버티다 결국 힘이 빠져 손을 놓게 되고 양떼 위로 떨어집니다. 도망가는 양떼들을 지나 너른 벌판으로 나가 먼 하늘을 바라보며 아기 늑대는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그래. 난 늑대야. 하지만 그냥 아무 늑대는 아니지.
나는 구름을 만져본 늑대라고.
이 마지막 아기 늑대의 독백과 표정에서 전 자존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 나는 꽤 괜찮은 늑대다'라는 자존감을 만든 건 결국 경험, 그러니까 절벽 위에서, 땅굴 안에서 발버둥쳤던 행동들이었습니다.
인생에 역경이 닥치더라도 내가 이겨낼 수 있을 거란 믿음, 내가 노력한만큼 성취를 이룰거라는 믿음은 심리학 책을 열심히 들여다본다고 생겨나지 않습니다. 고통의 경험이 자존감을 만듭니다. 비참함이나 절망감을 느끼면서도 '이것만큼은 꼭 해내고 싶다'고 절절하게 바라는 것이 있어 세상 안에서 뒹굴 때, 상처나 고난 따위에 지지 않겠다며 이 앙다물고 분투할 때, 내 삶을 끌고 가는 힘이 생겨납니다.
이 글에서 소개한 그림책은?
마리오 라모스 <양이 되고 싶었던 늑대> http://goo.gl/yYjM4Q
* [그림책 처방]에서는 우리가 오래전에 믿고 소중히 여겼던, 하지만 어른이 되면서 놓쳐버린 가치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처방받고 싶은 고민은 364ev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