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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C 최혜진 Oct 05. 2015

[그림책 처방] 친구가 없어요 2

나딘 브룅코슴, 올리비에 탈레크  <큰 늑대 작은 늑대>

'친구가 없어요' 1편 읽기 : https://brunch.co.kr/@hyejinchoi/24 



우정의 성분표 


슈퍼마켓에서 파는 과자 봉지를 보면 단백질, 지방, 염분 등이 얼마나 함유되어 있는지, 하루 필요량 대비 몇 퍼센트 함량인지 표기가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사랑' 혹은 '우정'이라는 것에도 성분표가 있다면 어떤 원료들이 어느 정도의 분량으로 녹아 있을까요? 전 오늘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았답니다. '우정' (혹은 '사랑')의 성분표를 만든다면 그 안에 과연 순도 100%의 '기쁨'과 '행복'만 있을까? 긍정적인 감정은 절반은 겨우 넘기고 (한 51%쯤) 나머지는 '질투 5%, 실망 15%, 경쟁의식 8%, 원망 3%...' 이런 자잘자잘한 양념들이 마구 들어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어제, 남편과 말다툼을 했거든요. 진 빠지는 시간을 보내고 새벽에 잠시 밤 산책을 했어요. '분명 사랑해서 헤어지기 싫다며 결혼해놓고 왜 이렇게 싸우고 원망하는 걸까?' 생각하며 밤길을 걸었죠. '우리는 왜 이럴까?' 생각하다가 찬찬히 깨닫게 되었어요. 사랑은 애당초 순도 100%의 긍정적인 감정이 아니라는 사실을요. 


어떤 날은 3%의 원망이 크게 느껴지고, 어떤 날은 15%의 실망이 강렬한 존재감을 발휘해서 '원래 좋은 감정이 있었다'는 사실까지 잊어버리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느껴지는 맛이 시시각각 바뀌는 것이 사랑의 본래 모습인데, 저는 거기에다 대고 '우리는 왜 100%로 행복하지 않을까'라고 걱정까지 한 움큼 더했죠. '100% 무가당이 필요하다면 <우리 결혼했어요>를 보시게나, 현실의 사랑은 그렇지 않다네.'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주었습니다. 



내 인생에서 그 사람을 쫓아내지 않는 것 


좋은 순간만 있다면야 자연스럽게 서로의 곁을 지키겠지만, 이렇게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이 아슬아슬한 비율로 오락가락 바뀌어가며 느껴지는 게 현실이라면, 무엇이 사랑을 계속 이어가게 하는 걸까요? 무엇이 오래된 우정을 지탱할까요? 이 질문에 있어 저에게 힌트를 준 건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에서 말한 이 문장입니다. 


“사랑을 ‘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는' 지속적 상태, 사랑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혼동하는 것에서 사랑에 대한 오해가 생긴다.”



저 문장에서 사랑 자리에 우정을 넣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처음 누군가과 가까워질 때는 '이야기가 통하는 느낌' '설렘' '재미'... 이런 좋은 감정들이 많이 느껴집니다. 최초의 경험인 것이죠. 하지만 우정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시간이 지나 안정적으로 우정 안에 머물러 있을 때는 확연히 느낌이 다릅니다. "왜 우리는 처음 같지 않을까?"  의아해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하지만 막상 관계를 오래 맺다 보면 무엇이 '우정의 동력'인지 잊고 최초의 경험만 막연히 그리워할 때가 있는 것 같아요. 


'머물러 있기로 하는 마음' 

저에겐 이것이 사랑이고 우정입니다. 그와 내가 만들어놓은 관계 안에 있기로 다짐하는 것, 그 의지만이 사랑이나 우정을 이어갈 수 있다고 믿고 있어요. 말다툼을 하다가 만신창이가 되어도, 뭔가에 푹 찔린 듯 상처가 나도, 아무튼 머물기로 결심하는 것이 결국 관계를 지킨다고 생각합니다. 


"화해란 요컨대 이 세상에 해결 따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사람의 인생에서 떠나가지 않는 것, 자신의 인생에서 그 사람을 쫓아내지 않는 것, 코스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는 것." 

- 에쿠니 가오리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 중 



네가 없으니까 심심해 


나딘 브룅코슴이 글을 쓰고 올리비에 탈레크가 그림을 그린 《큰 늑대 작은 늑대》는 우정이라는 감정의 성분표를 자세히 펼쳐서 그 안의 세부 감정의 결을 하나하나 설명해주는 그림책입니다. 친구를 사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관계에 있어서 '머물기로 하는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려내고 있어요. 


이야기는 언덕 위에서 혼자 살고 있는 큰 늑대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작합니다. 어느 날, 저 멀리에서 파란 점이 자기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큰 늑대는 돌연 걱정에 빠져듭니다. "저 파란 늑대가 나보다 크면 어떻게 하지?" 파란 늑대가 언덕 근처까지 왔을 때, 자신보다 작은 늑대라는 걸 깨닫고 안도합니다. 


둘은 말 한 마디 없이 서로 눈치만 봅니다. 나쁜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경계심을 놓을 수 없었죠. 그렇게  데면데면하게 있다가 밤이 되는데요. 언제나처럼 나뭇잎을 엮어 만든 이불을 덮고 잠에 들려는 큰 늑대. 작은 늑대를 보니 덮을 것이 없습니다. 이불 귀퉁이 쪼~끔을 내어서 덮으라고 건네주죠. 

아침이 되어 언제나처럼 운동을 하기 위해 나무에 오르기 시작하는 큰 늑대. 작은 늑대도 아무 말없이 그 뒤를 따르네요. 순간 큰 늑대는 또 다시 걱정이 빠집니다. "이 녀석이 나보다 나무를 잘 타면 어쩌지?" 하지만 작은 늑대가 버둥버둥 거리며 겨우 나무에 오르는 걸 보고 안심합니다. 오히려 작은 체구로 높은 나무에 오르는 작은 늑대의 용기를 가상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작은 늑대가 자신보다 높은 나뭇가지에 올라가지 못하게 신경을 씁니다. 

식사 시간, 큰 늑대는 언제나처럼 과일을 까서 식사 준비를 합니다. 작은 늑대를 슬쩍 보니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죠. 접시에 귤을 두 개 담아서 작은 늑대 쪽으로 슬쩍 밀어줍니다. 작은 늑대 역시 아무  말없이 귤을 먹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언제나처럼 산책에 나선 큰 늑대, 밀밭을 걷다가 뒤를 한번 돌아보고, 조금 더 걷다가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면서 파란 점이 되어 버린 작은 늑대를 흐뭇하게 바라봅니다. 산책을 한참 동안 하고 숲에서 나온 큰 늑대가 다시 언덕을 바라봤을 때, 그 곳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에이, 그 녀석은 너무 작아서 여기에선 안 보이지.' 하며 언덕 쪽으로 다가가는 큰 늑대. 하지만 밀밭까지 다가가도 여전히 언덕 위엔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서 안 보일만큼 작진 않은데?' 그제야 덜컥, 마음이 내려앉은 큰 늑대를 한달음에 언덕으로 뛰어갑니다. 


 

작은 늑대가 사라진 것에 깜짝 놀라 뛰어오는 큰 늑대의 황망함이 잘 느껴지는 장면이죠. 전 이 책에서 이 장면이 너무 좋습니다. 이렇게 원경으로 보여주고 있는데도 큰 늑대 심정이 잘 느껴지는 게 참 신기해요. 


책의 후반부는 작은 늑대를 기다리는 큰 늑대의 일상을 그려내는데요. 태어나 처음으로 잠도 자지 않고, 밥도 먹지 않고, 나무 타기도 하지 않고, 산책도 하지 않은 채 '멀리서 다가오는 파란 점이 없는지' 눈을 크게 뜨고 기다리죠. 그러면서 다짐합니다. '작은 늑대가 돌아온다면, 밤에 나뭇잎 이불을 좀 더 넉넉하게 덮으라고 줄 거야. 작은 늑대가 돌아온다면, 다음에 밥을 먹을 땐 접시를 가득 채워줘야지. 작은 늑대가 돌아온다면, 그 애가 나보다 나무를 잘 탈까 봐 걱정하는 짓은 하지 않을 거야. 나보다 더 높은 나뭇가지까지 올라가게 둘 거야...' 
 

그러던 어느 날, 저 멀리에서 파란 점이 보입니다. 큰 늑대의 심장은 쿵쾅쿵쾅 뛰기 시작하죠. '제발, 저 파란 점이 그 작은 늑대였으면  좋겠다...'라고 빌면서요. 그리고 깨닫습니다. 그 아이가 아무리 작아도 자기 마음 안에선 큰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요. 


다시 만나게 된 둘. 큰 늑대가 묻습니다. "어디 갔었어?" 작은 늑대가 손짓도 없이 멀뚱히 답하죠. "저~기" 큰 늑대는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걱정을 끼쳤다느니, 그 정도 말도 못해주냐느니.. 그렇게 따지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없으니까 내가, 심심해." 작은 늑대도 답하죠. "나도. 네가 없으니까 심심하더라." 


  

제가 이 책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우정' 안에 경계심, 질투, 경쟁의식, 걱정... 이런 부수적 감정들이 들어있는 게 당연하다는 메시지가 있어서였어요. 무조건 좋아하고, 하하호호 웃고 즐기는 것이 우정인 것처럼 오해하게 만드는 수많은 전형적인 그림책들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섬세함이 느껴졌거든요. 

사실 이 책은 여러 번 반복해 읽으면서 더 좋아하게 된 책인데요. '나를 걱정시키고 실망하게 하고 네 멋대로 이지만, 어쨌든 난 네 옆에 있는 게 좋아'라는 마지막 메시지가 큰 위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읽을 때마다 이렇게 생각하고 또 스스로를 다짐시키게 됩니다. 


그래, 어쨌든 그 사람 옆에 머물기로 하는 것. 그게 사랑이야. 


큰 늑대 작은 늑대

작가 나딘 브룅코슴 

출판 시공주니어 

발매 2008.01.20



글을 쓴 최혜진

10년간 피처에디터로 일하며 크고 작은 인터뷰로 각기 다른 결을 지닌 1천여 명의 사람을 만나 수만 개의 질문을 던졌다. 10년 차가 되던 해에 유럽으로 날아가 3년 동안 살며 책 <그때는 누구나 서툰 여행><명화가 내게 묻다><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를 썼고, 현재는 <볼드저널>의 콘텐츠디렉터로 일한다. 그림책이라는 놀라운 예술 장르에 매료된 자발적 마감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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