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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혜진 Jan 12. 2018

겨울 냄새

1월 영랑호에 다녀온 후


  집으로 돌아와 처음 맡은 건 좀약 냄새였다. 속초 영랑호에서 맡은 겨울 냄새는 상쾌했기 때문에 좀약 냄새가 콧속에서 더 또렷했는지도 모른다. 겨울 냄새란 이를테면 언 땅, 찬바람을 맞는 나무, 둥둥 떠 있다가 호수에 머리를 박고 먹이를 잡는 청둥오리와 관계가 있었다. 애인은 줌을 당겨서 청둥오리들을 찍었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 카메라가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그 카메라는 오랫동안 방구석에서 하품을 하며 졸다가 의식을 잃기 직전이었는데 내가 애인에게 중고시장에 팔아달라고 해서 아마도 정말 의식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애인은 팔아도 돈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자기가 장난감으로 쓰겠다고 했다. 카메라는 가느다랗게 눈을 떴을 것이다. 스마트폰 카메라에 밀려나 잊힐 뻔한 니콘 P100은 그렇게 되살아났고 청둥오리들이 둥실둥실 겨울을 나는 장면을 찍을 수 있었다. 내게서 멀리 떠나지 않고 곁에 있게 되어 카메라는 내심 좋아했을까? 내심 좋아한 건 나였다.  


  겨울 냄새가 꼭 자연하고만 관계가 있는 건 아니다. 인사를 받지 않는 택시 운전사, 범바위에서 마주쳐 인사를 주고받았기에 우연히 다른 곳에서 다시 만났을 때 눈인사를 했는데 못 본 척 피한 아저씨, 새벽에 휘몰아친 눈보라에도 끄떡하지 않는 초고층 아파트와도 관계가 있다. 이런 기억은 굳이 마음에 담고 싶지 않은데 저벅저벅 걸어와 불청객처럼 마음 한 곳에 자리를 잡는다. 눈치를 줄수록 더 오래 있겠다는 투다. 나는 고개를 돌린다. 그런데 좀약 냄새를 맡은 것이다. 이 좀약은 지난여름 이 집에 왔다. 하루는 잡동사니가 쌓인 베란다 근처에서 작고 하얗고 투명한, 심지어 살짝 빛나기까지 하는 벌레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어머, 너는 어쩜 그렇게 예쁘니.” 혼잣말을 했었다. 그리고 가던 길을 가라고 보내주었다. 며칠 후 그 예쁜 벌레의 이름이 궁금해서 검색을 해보았는데 아뿔싸, 나는 어린 좀을 보고 예쁘다고 한 것이었다. 충격을 받은 나는 집안 곳곳에 좀약을 놓았고 약에 취한 듯이 눈에 불을 켜고 다니다가 얼마 후 좀 더 거무튀튀하게 변한 벌레를 만날 수 있었다. 그때 그 벌레가 자라서 색이 변한 건지 다른 놈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놈’이라고 적는 것에서 이미 눈치챘겠지만) 나는 그놈을 처리했다. 그런데 또 얼마 안 가 좀약이 발암물질이라는 걸 알게 됐고 안 그래도 냄새가 독해 머리가 아팠던 나는 좀약을 놓았던 장소를 모조리 떠올려 좀약들을 수거해 버렸다. 그리고 잡동사니가 쌓인 베란다를 청소했다. 안 쓰는 물건들을 밖에 내놓느라 현관문을 열 번은 연 것 같다.

 

  물론 여행을 가려고 문을 여는 것이 좋다. 꼭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애인과 한차례 싸우기는 했어도 애인이 찍은 청둥오리 사진은 왠지 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영랑호에 둥실 떠있는 오리들은 차가운 호수에 떠있는 것인데도 그 모습이 포근하다. 부리부터 머리, 몸까지 쑤욱 물속으로 들어간 새끼오리를 보고 ‘언제 나오지’ 기다리던 애인과 나는 퐁 솟아오르는 오리를 보고 감탄했다.


  비록 집에서는 화학물질의 냄새 때문에 눈을 가느다랗게 떴지만 겨울 냄새를 느낀 그 힘으로 숨은 좀약의 위치를 추적했다. 그리고 마침내 분홍색 플라스틱 케이스 안에서 여유롭게 자고 있는 그놈을 찾아냈고 (지금 내가 ‘놈’이라고 적는 것에서 이미 눈치챘겠지만) 나는 그놈을 처리했다. 영랑호에서는 청둥오리 말고도 윤기 나는 까만색 새들도 보았다. “어머, 너는 어쩜 그렇게 예쁘니.” 예쁜 새들의 이름을 찾아보았지만 아직 찾지 못했다. 검색창에서는 그런 게 잘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말이다. 새벽에 눈보라가 휘몰아칠 때 새들은 모두 어디에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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