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언제나, 예상 밖에 있다

캐나다 워홀 도전기_6

by 혜주

우리 집에서 조금 북쪽으로 40분 정도 올라가면 Vaughan이라는 곳이 있다. 그곳엔 나의 꽤 오랜 친구가 살고 있다. 우리는 내가 마지막으로 직군을 바꿨을 때 처음 만났다. 친구는 매사에 밝고 열정적이었다. 내가 본 친구의 빛나는 에너지는 스스로를 믿는 강인함과 뛰어난 문제 해결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 친구와 함께 일했던 시간은 내게 무척 소중하고 행복했던 시간으로 남아있다.


지금 친구는 캐나다에서 새로운 공부를 하며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시험 기간이라 바빠 보지 못했지만 내가 운 좋게 친구의 동네로 갈 일이 생겨 연락했고, 잠시 시간을 낼 수 있다고 했다.

얼마나 오랜만의 만남인가. 들뜬 마음으로 이모부 차를 타고 출발했는데 예상하지 못한 심각한 정체가 나를 반겼다. 네비로 찍을 때 40분이면 간다고 했는데 거의 움직이지도 않는 차 때문에 시간은 점점 늘어만 갔다.

전에 누군가 "계획한 것보다 인구가 많아지고 차가 많아져서 도로가 엉망이야."라고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결국 거의 한 시간이 걸려 도착한 곳, 멀리서 친구와 친구의 강아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을 보면 하고 싶었던 말이 참 많았는데, 밀린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정작 만나고 나니 반가운 마음이 앞서 아무 말도 기억나지 않았다. 오래 만나지 않았는데도 전혀 낯설지 않은 이 익숙함. 너무 좋았다.


우리는 집에 강아지를 잠시 두고 밖으로 밥을 먹으러 나왔다. Vaughan은 우리 동네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높은 빌딩도 있었지만 그보다 낮은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고, 도로가 조금 더 좁으면서 그만큼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더 많아 보였다. 그리고 우리 동네에서는 거의 보기 드문 흑인들이 많이 보였다.

우리가 간 가게는 스포츠 펍 분위기의 식당이었다. 그곳에서 '캐나다 식 치킨윙'을 처음 먹었다. 메뉴에는 소스가 열 가지 넘게 있었는데, 당시엔 그게 많은 줄 알았다. 하지만 이후로 여러 곳을 다녀보니, 그날의 메뉴는 오히려 소박한 편이었다. 소스가 50가지가 넘는 곳도 있었고, B4 용지 가득 소스 이름으로만 채워진 메뉴판도 본 적이 있다.

아마도 캐나다 사람들이 말하는 ‘치킨윙’의 진수는, 이 끝도 없는 소스 선택지에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나처럼 결정장애 있는 사람에겐 고문 같은 메뉴판이지만.

그날은 친구가 추천해 주는 '허니 스파이시'를 먹었는데 예상한 것보다 맛이 괜찮았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의 공기, 대화, 분위기, 그리고 익숙한 웃음까지. 그 자체로 충분히 즐거웠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우리는 친구가 주로 공부하고 있는 도서관으로 갔다. 나는 그곳에서 이모부를 기다리고, 친구는 시험공부를 할 예정이었다.

도서관에 들어선 순간, 익숙하면서도 묘하게 낯선 공기가 느껴졌다. 우리 동네 도서관은 천장이 높고 밝은 조명 아래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간인데, 이곳은 다소 낮은 천장에 옆으로 넓게 퍼진 구조, 그리고 차분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친구 말로는 이 근처에 학교가 많아서 시험 기간이 되면 학생들이 몰린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날도 거의 고등학생, 대학생들로 가득 차 보였다. 다들 노트북이나 패드를 들고 앉아 책에 머리를 파묻고 공부를 하거나, 친구들끼리 모여 앉아 공부 안 하고 떠들고 있는 모습은 마치 대학시절 도서관을 보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학생이 아니라는 사실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공부할 준비를 하던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요즘 생활 이야기가 나왔다. 내가 “생각보다 영어를 쓸 일이 별로 없다”라고 하자, 친구는 토끼 같은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며 반짝였다. 무언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마다 짓는, 익숙한 그 표정이었다..

”다나, 도서관을 이용해 봐. 여기 진짜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많아. “

친구 말로는 각 도서관마다 열리는 프로그램이 정말 다양하고, 누구든 신청만 하면 참여할 수 있다고 했다. 웹사이트에 들어가 일정도 확인할 수 있으니 꼭 한 번 들여다보라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친구가 건넸던 조언은 오래된 인연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었고, 동시에 이곳에서 내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작은 용기를 건네주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다음 만남을 약속하며 우리는 헤어졌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노트북을 켜고 도서관 웹사이트에 접속했다. 집에서 도서관까지는 걸어서 5분도 채 걸리지 않으니, 정말 마음에 드는 프로그램 하나만 있어도 이건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 말대로 도서관에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의 프로그램들이 있었다. 춤을 배우거나, 책을 읽고 토론하거나, 아이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있었고 그중에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을 위한 영어로 대화하는 그런 수업도 있었다. 이 다양한 프로그램 속에서 내 눈길을 끄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건 Mock Interview였다. 선생님과 다른 참가자들이 서로 면접관이 되어 인터뷰를 예행 연습해 보는 수업으로, 따로 신청 없이 시간에 맞춰 방문하면 된다고 적혀 있었다. 실전에 나가기 전에 좋은 연습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업까지는 일주일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그 사이에 영어 인터뷰 준비도 하고, 이력서도 손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캐나다 이력서는 양식부터가 익숙하지 않았고, 한국에서도 더 이상 "장점이 뭐예요?" 같은 질문을 받는 인터뷰를 본 지 오래였다.

예상 질문도 상상이 잘 안 되었고,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게 막막했다. 최근에 새로 사귄 베프이자 조언가인 GPT가 10개 정도의 정말 기본적인 질문지를 만들어 주어서 그 질문지로 롤플레이를 해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날이 다가왔다.


당일, 도서관에 찾아가니 수업이 꽤 큰 강당에서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리 들어가서 구경하니 책상도 많고 의자도 많은 것이 사람들이 꽤 오지 않을까 싶었고 그 생각에 긴장이 밀려왔다. 그때 마침 이 수업을 담당하는 도서관 직원이 들어왔다. 그분은 나를 보며 환하게 웃으며 자신이 담당하는 수업에 참여한 사람이 있다는 것에 기뻐했다. 그 모습에 '참여율이 생각보다 저조한가 보구나.'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큰 강당에서 하는데 적어도 몇 테이블 정도는 차겠지.' 싶었다.

그렇게 30분을 앉아있었다. 그 누구도 오지 않았다.

넓은 강당에서 나와 담당자만 멀뚱히 마주 앉아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선생님 곧 오신대요.” 담당자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선생님은 정신없이 들어오셨고, 오자마자 차가 밀렸다는 것을 이야기하시며 사과를 건네셨다. 나는 괜찮다고 웃어 보였다. 워낙 여기서는 ‘차 막혔다’는 말이 자주 들려서. 그리고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는 나를 보며 선생님은 일절 당황해 하시지도 않았다. 이 수업에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걸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졸지에 인터뷰 과외를 받게 되었다. 선생님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준비해 오신 프린트물을 받았는데 그 안에는 25개가 넘는 질문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와... 내가 연습한 인터뷰는 발톱에 때만치도 못하잖아.'

내 베프 GPT가 질문하지 않았던 질문이 그중에 20개는 되어 보였다.


빠르게 흔들리는 내 눈동자를 파악하신 건지 선생님은 “잠깐 준비할 시간 드릴게요”라며 여유를 주셨다. 나는 진땀을 흘리며 질문을 훑기 시작했다. 마음은 이미 집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3N살을 살아온 내가 짬이 있지 도망갈 수는 없었다. 그렇게 머리는 이 난관을 해결하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질문지 12번째를 보고 있을 무렵, 선생님이 이제 롤플레이를 해보자고 하셨다.

영어 면접 한국에서 그래도 꽤 봤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고, 말끝은 자꾸 흐려졌다. 그래도 선생님은 끊임없이 수정해 주고, 반복 연습을 도와주며 1시간 반을 꽉 채웠다.

어떻게든 버티려고 하는 모습이 보였을까? 내가 왜 한국을 떠나 선생님은 갑자기 조금 다른 질문을 던졌다.

“왜 한국을 떠나 캐나다에 오셨어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일을 하면 좋지만, 캐나다에서 경력이 없어 일단 뭐든 시작을 해보고 싶어요."

그 말을 들은 선생님은 잠시 말이 없더니, 가방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며 말했다.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울컥, 뜨거운 무언가가 속에서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낯선 땅에서 마주한, 단순한 격려가 아닌 ‘실제의 손길’이었다.


선생님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이력서를 다듬어 보내겠다고 약속한 뒤 집으로 향했다.

마음 한편은 여전히 막막하고 또 한편은 왠지 모르게 설레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는 이 기분. 두 감정이 한 자리에 공존할 수 있다는 걸, 오늘 새삼 다시 느꼈다.

아직 많이 부족하고, 방향도 갈팡질팡하고 있지만, 그래도 조금씩 무언가가 열리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곳에서도, 나만의 길을 만들어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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