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워홀 도전기_5
Kensington Market에 들어서 조금 걸으면 나오는 치즈 가게 앞에서 발이 멈췄다. 치즈를 좋아하는 나로선, 너무 당연한 반응이었다. 한국에서는 구할 수 있는 치즈에 한계가 있어 종종 해외배송을 알아보고는 했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정말 많은 종류의 치즈가 있고 쉽게 구매할 수 있다는 점이 그냥 가게 앞을 지나는 것만으로도 나를 설레게 만들었다. 이 가게도 마찬가지였다. 가게 안 곳곳에는 서로 다른 치즈들이 차곡차곡 정갈하게 쌓여 있었다. 수많은 종류의 치즈들에 마음이 빼앗겨 이 치즈, 저 치즈 구경하며 어떤 맛일까, 어떻게 먹을까 궁금해하고 있을 때, 안 쪽에서 사장님이 말을 건넸다. “그냥 잘라먹으면 돼요.” 한국말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사장님은 어떤 치즈를 찾는지 물어보셨다. 나는 안 먹어본 새로운 치즈를 경험해 보고 싶다고 이야기하며 다른 음식과 함께 하지 않아도 치즈 하나만으로도 풍미가 충분한 게 좋다는 이야기를 했다. 사장님은 몇 가지 치즈를 조금씩 잘라 내게 맛 보여 주셨다. 그러고서는 책 한 권을 꺼내 들고 오셨다. 《세상 거의 모든 치즈》.
그 책을 본 순간 나는 살짝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내가 한국에서 가장 좋아하던 치즈 책이었다. 순간 머릿속으로 '아, 이 사장님도 이 책을 좋아하시나?', '내가 지금 구입하려고 하는 치즈가 저 책에 나온다고 보여주시려고 하시는 걸까?' 많은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이 책을 꺼내신 이유를 듣고자 눈에 한가득 물음표를 담아 사장님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사장님은 온화한 미소와 함께 자신이 이 책의 저자라는 사실을 이야기하셨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는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 책의 저자를 만난다는 건 상상도 못 해 본 일이었다. 그것도 이 낯선 나라, 낯선 시장, 낯선 골목 안에서 일어난다는 건 더더욱. 너무나도 놀라운 우연에 어떻게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을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너무 신기하다, 정말 반가워요." 만을 이야기하며 내가 그 책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얼마나 재미있게 읽었는지를 줄줄 늘어놓기 시작했다. 사장님도 내 반응에 엄청 놀라시며 자신이 원래 오늘 출근하는 날도 아니고, 심지어 막 퇴근하기 직전에 이렇게 우연히 나랑 만난 것에 대해 더욱 신기해하셨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우리가 이곳을 찾은 타이밍이 더 놀랍게 느껴졌다.
어쩐지 언니랑 이곳으로 걸어오면서 단 한 번도 빨간 불에 멈춘 적이 없었는데. 세상에, Kensington Market도 언니가 먼저 제안했던 건데. 그날 헤더 언니가 내 하루에 행운을 불러다 준 사람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가게 안에서 한참을 떠들었다. 치즈 이야기를 하다가, 책 이야기를 하다가, 언니와 만나게 된 이야기, 그리고 여기까지 오게 된 서로의 이야기까지.
그렇게 사장님과는 다음 만남을 기약한 후 우리는 마지막 코스로 CN TOWER로 향했다. 토론토의 상징과 같은 곳으로 500미터 보다도 높은 전망대에 올라가 도시를 한 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 올라가니 정말 엄청난 사람들이 있었다. 다들 이곳에서 인생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아마 옷장에서 가장 예쁜 옷을 고르고 골라 입고 오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화려했다. 그 속에서 배낭을 메고 서있는 우리가 진정한 관광객 모습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정신없는 상황에서 ‘밖을 제대로 볼 수 있기는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해가 막 지기 시작하던 순간의 토론토의 모습은 그 많은 인파 속에서도 강렬했다. 저 멀리 지고 있는 붉은빛 석양이 이 높은 빌딩 숲을 오묘한 색들로 물들이면서 아래에선 그 빛을 받으며 차량들이 바쁘게 움직였고, 바로 내 발아래에는 푸른 Rogers center가 보였으며, 그 뒤론 잔잔하게 물결치는 바다 같은 Lake와 Haber front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빽빽한 나무로 가득한 Toronto Islands와 함께 작게 보이는 비행기들. 그 모든 아름다운 디테일들에 잠시였지만 내 주변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천천히 전망대를 걸으며 사람들 틈으로 360도를 돌며 구경했다. 석양은 점점 사라지며 각각의 빌딩에서는 하얀 별 빛이 미친 듯이 쏟아져 나왔다.
“와, 내가 지금 캐나다에 있기는 하구나.”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내가 이곳, 토론토에 왔다는 사실을 실감 났다.
그 장면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얼마 전에 친한 친구가 툭 던졌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걸어간 만큼, 내 것이 된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풍경, 내가 걷고 있는 이 도시가 언젠가 정말 내 것이 될 수 있을까. 지금 느끼는 이 낯섦이 사라지고 이 도시가 편안하게 느껴질 날이 올까?
이 생각이 내 마음을 꽉 채우는 순간, 가슴속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만큼은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마음속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들을 잘 살아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벅찬 감동이 오래오래 남았으면 좋겠다고, 조용히 바라며 새기고 또 새겼다.
아마 언니도 나와 비슷한 감동을 느끼지 않았을까? 언니는 이곳에 온 뒤로 처음으로 캐나다에 온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예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우리는 이곳에서, 이 많고 화려한 인파 속에서 조용히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오늘따라 미시소거의 밤공기가 이상하게 차갑지 않고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집으로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좋다. 좋았다. 계속된 뭔가 충족되지 않은 외로움 속에서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과 이 낯선 곳이 한층 더 편안해지는 그런 오늘이 집으로 가는 내 발걸음을 조금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