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워홀 도전기_4
누가 그랬다. 해외에서의 생활은 끝없는 외로움과의 사투라고.
특히나 나처럼 어학원도 다니지 않고, 아직 일자리도 구하지 못한 사람에겐 그 말이 더 깊이 와닿는다. 말하지 않는 시간이 늘어나고, 가끔은 너무 오래 말을 안 해서 정작 말해야 할 상황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순간도 생겼다. 한국에 있을 때는 내 사소한 걱정까지도 귀 기울여주는 아이들로 주변이 늘 북적였는데, 여기서는 그 시시콜콜한 하루를 나눌 사람조차 없었다. 시차가 어긋나 버린 친구들과는 대화도 쉽지 않았다. 미시소거라는 이 도시에서, 어쩌면 가장 자주 대화하는 건 아무것도 없는 내 핸드폰이었다. 종종 괜히 화면만 만지작거리는 내 모습이 위태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한국인이 그리웠다. ‘워홀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건, 한국인과 어설프게 친구 맺는 거’라는 글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개똥 같은 말을 해도 척척 알아들을 누군가가 너무 그리웠다. 그리고 이 도시엔 그런 한국인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워홀 카페의 ‘함께해요’ 게시판을 발견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친구를 구하고 있었다. 이 공간을 통해서 사람들을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올린 글을 쭉 훑어보니 나이와 성별을 밝히고 취미를 이야기하며 함께 어떤 것을 하고 싶은지 등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글을 본 사람들이 댓글을 달면 연락을 취해 만날 수 있는 그런 방식인 것 같았다. 방법을 확인했는데도 막상 글을 쓰려고 하니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함이 밀려왔다. 그래서 결국 길고 장황하게 나에 대해 쓰기 시작하다, 그 글이 조금 구질구질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어 모든 걸 삭제하고 짧게 나이와 성별만을 작성한 후 어색함을 담아 스마일 이모티콘을 하나 붙여 넣었다. 이게 뭐라고 괜히 심장이 뛰었다. 혹시 이상한 사람 연락 오면 어쩌지, 괜한 짓 한 건 아닐까. 머릿속에 별별 생각이 떠올랐다. 댓글은 생각보다 빠르게 올라왔고 자기소개, 그래봤자 성별과 나이 그리고 짧은 인사말을 보고 나와 맞을 것 같은 사람을 골라내야 했다. 어떤 사람은 그냥 카톡 아이디 하나를 던지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장황하게 소개를 늘어놓기도 했다. 신경 써 댓글을 달아준 것은 고마웠으나 정작 내 마음을 끄는 말은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남긴 댓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성별과 나이, 그리고 캐나다 전화번호.
왠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진지하게 다가온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헤더 언니를 만나게 됐다. 언니와의 연락은 특별할 것 없는, 아주 평범한 대화였다. 그게 좋았다. 겁 많은 내가 상상했던 수많은 걱정 시나리오들이 언니의 느긋한 말투에 하나 둘 녹아내렸다.
나는 언니에게 하고 싶었던 투어를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토론토에는 City Tower라는 티켓이 있는데 이 티켓을 사면 관광지 중에 5개를 골라 갈 수 있었다. 총금액을 계산했을 때 할인되는 부분도 나쁘지 않고 이 티켓만으로도 웬만한 관광지들을 갈 수 있으니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함께 티켓을 구매하고 가고 싶었던 곳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 중 하나로 나는 아쿠아리움을 이야기 했다. 하지만 언니는 부드럽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이야기 했다. "전 아쿠아리움보다 박물관이 더 취향이에요." 그 말이 오히려 나를 편하게 만들었다.
원하는 것을 정확히 인지하고 정중하고 부드러운 거절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에 대한 확신도 있어야 하지만 또 그만큼의 용기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거절을 당하는 입장에서도 기분이 나쁘기보다는 오히려 ‘이 사람은 본인에 대해 확신이 있는 사람이니 어떤 제안을 해도 억지로 하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물론 아닌 사람도 있지만.
한국에 있는 소중한 친구가 "너, 조금 더 거절해도 돼." 라고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그 친구와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신뢰가 있었기에 서로의 거절도 마음 편히 존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계에서 나는 여전히 거절을 어려워했다. 그들이 내게 건넨 용기를 외면하는 것 같아서. 하지만 거절을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나를 깎아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배워내야 하는 것 중 하나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언니의 자연스러운 단호함이 이 만남을 좀 더 편하고 오래 지속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박물관을 함께 가기로 했다. 언니와 함께 간 ROM(Royal Ontario Museum)이라고 불리는 박물관은 Downtown 중심에 위치한 꽤나 크고 유명한 박물관이다. 3층으로 되어있었는데 그 안에는 박제된 동물, 공룡, 광물, 물고기 화석 등 정말 다양한 주제들을 품고 있는 곳이었다. 나는 박제된 동물들이 있는 전시실을 걷다가 문득, 전에 가르쳤던 아이가 떠올랐다.
8살, 예쁘고 똑 부러지는 그 아이와 ‘동물원이 꼭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주제로 토론을 나눈 적이 있었다. 그 아이는 순수한 미소와 반짝이는 눈빛으로 자신이 얼마나 동물을 사랑하고 동물원을 좋아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 아이에게 새로운 시선을 주고 싶었다.
강요하지 않되, 꾸준하게 그들의 서식지와 먹이사슬, 생태와 자연 등에 대해 이야기 나누며 관련 영상과 책을 꾸준히 읽고 대화해 왔다. 그러다 충분한 시간이 되었을 때 다시 주제로 돌아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사랑스러운 그 아이는 동물원에 있는 동물과 자연에 살고 있는 동물이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고, 얼마 전 유치원 field trip에서 동물원을 다녀왔는데 거기서 봤던 축 쳐져 있던 호랑이에 대해 속상했던 마음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럼 동물원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동물에 대해 배우고 알 수 있을까 ‘로 넘어왔다. 당시에는 마땅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단순히 다큐멘터리를 보거나 책을 보거나 하는 정도로 우리가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고, 다른 나라에 있는 울타리가 없는 사파리의 존재를 알려주며 조금 더 환상적인 내용에 취중 했었다.
근데 이 ROM 박물관에 해답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가 죽은 동물을 박제해서 이렇게 다양하고 풍요로운 전시를 할 수 있다면, 살아있는 동물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도 동물에 대해 알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에게 이곳을 꼭 보여주고 싶었다. 지금 떠오르는 생각들을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어떤 눈빛으로, 어떤 질문으로 돌아올지 너무 궁금했다. 당장 영상통화를 걸고 싶었지만, 한국은 새벽이었다.
나는 마음을 잠시 접고, 언니와 함께 박물관을 나왔다.
언니와 나는 1층 카페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헤더 언니는 차분하지만 유쾌했고, 많은 것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나와 닮은 듯 다른 결을 가진 사람처럼 느껴져 꽤나 잘 맞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오래간만에 편하게 사용하는 한국어에 나도 말이 점점 많아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Kensington Market으로 향했다. 전에 혼자 가보려다 너무 멀게 느껴져 포기했던 곳인데, 오늘은 달랐다. 둘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발걸음은 멀리까지 가벼웠다. 누군가와 함께 걷는 길은, 그 길 자체가 목적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도착한 그곳에서,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