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워홀 도전기_3
나는 굉장히 건강하다고 생각했다. 이곳에 오기 전 몸이 망가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언제부터인가 머리카락이 많이 빠지기 시작했고, 두피에 손을 대기만 해도 아프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쉽게 기름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 매일 마주치는 선생님이 내 얼굴이 너무 안 좋은 쪽으로 어두워지고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며 피검사를 받을 것을 권유하기도 했었다. 이 와중에 엄마의 계속되는 다이어트 요구, 퇴직한 회사 원장의 황당한 소문, 새 반 학부모들의 터무니없는 요구까지. 작은 것들이 하나둘씩 쌓이며 나를 짓눌렀지만, 그땐 그게 스트레스라는 걸 몰랐다.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는 그저 신났으니. 하지만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종종 저 멀리 보이는 달을 보면서 루프탑 수영장에 달을 보며 수영하는 상상을 하고는 했다. 그랬던 내가 이곳에서 지내며 서서히 회복되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시도 때도 없이 배고프던 허기짐이 사라지고, 운동할 시간도 생겨 규칙적인 운동도 하기 시작하니 다이어트에 얽매일 필요도 없고 얼굴에는 윤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일 걱정이었던 두피문제도 깨끗해져 가는 모습이 보였다. 가족과 친구들도 영상통화를 할 때마다 얼굴이 활짝 피면서 생기가 돌아오는 것 같다고 좋아했다. 그동안 내가 만족하고 좋아하던 바쁘고 결과 중심적인 삶이 사실은 몸이 보내는 경고를 무시하고 스스로 가스라이팅했던 것은 아닐까. 정작 필요했던 건 이런 자연스러운 과정 중심의 하루하루였을까.
내가 살고 있는 미시소거는 한국으로 치면 용인정도 되는 것 같다. 용인에서 강남까지 걸리는 시간 대략 1시간 30분. 여기서도 downtown까지 가는 거리와 비슷하다. 그래서 그런가 이 동네는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차분하고 평화롭다. 넓은 도로와 틈틈이 보이는 공원, 그리고 그 속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강아지들. 마주치는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눈인사가 되고 스몰토크를 하며 나누는 이야기들도 참 다정하다. 처음에 이모부와 함께 돌아다닐 때는 이모부가 세상 모든 사람을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그렇게 여유롭게 이웃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억하고 부드럽게 다가갈 수 있는지에 적잖이 놀랐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사람을 대하는 진심과 품위를 배웠다.
그렇게 나도 점점 스며들고 있는 것 같았다. 3층에 있는 gym에 갈 때마다 마주치는 흑인 아저씨와 조금씩 말을 트면서 그의 소소한 것들을 기억하고 안부를 물어보고 진심으로 이야기를 들어주며 익숙하지 않은 다정함을 배워나갔다. 이 작은 행동이 일어나는 건 짧은 순간이지만 마음속에서부터 올라오는 풍요로움이 손 끝, 발 끝까지 꽉 채워주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날씨는 매서워 두꺼운 패딩을 입고 장갑, 모자를 착용해야 했지만 햇빛 하나는 끝내주는 4월 중순 어느 날, 친구가 떠나기 전에 소중히 만들어 준 귀여운 털모자를 착용하고 아침 일찍부터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워홀 카페에서 발견한 웰컴 서비스라는 것이 있다는 유학원에 가서 혹시 도움 받을 것이 있는지 확인해 보려고 했다. 간 김에 구경도 하고. 여기서 downtown까지 나가려면 mi-way 버스를 타고 시내와 가까운 곳까지 나가 전철로 갈아타야 한다. 집 바로 앞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타는 버스들은 번호 뒤에 E, W 등의 알파벳이 붙는데 East로 가는 건지, West로 가는 건지에 대해 알려주는 거다. 처음 버스를 타는 것이 걱정이 된 이모가 베란다에 서서 저 멀리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곳에서 나는 30살이 넘은 아기다. 어제 블로그로 찾아 다운로드하여 놓은 캐나다에서 자주 사용한다는 교통 앱 두 개를 번갈아 확인하며 타야 하는 버스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확인했다. 버스를 타자마자 사람들의 눈이 위아래로 빠르게 나를 흩었다. 당황했지만 누가 봐도 신난 관광객으로 보여서 그렇겠지. 햇빛 잘 들어오는 자리에 앉아 밖을 내다보면서 계속 위치를 확인했다. 출근 시간이라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리 고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버스정류장에서 내렸을 때 갈아타야 하는 지하철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빠르게 어디로 흘러 들어가고 있는 것 같은데 그저 따라가면 되는 건지 망설여졌다. 그때 내 옆을 지나쳤던 한 아저씨가, 눈이 마주친 걸 기억했는지 다시 돌아와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이모가 집에서 출발하기 전 사람 조심해야 한다고 아무나 쉽게 믿고 따라가면 안 된다고 당부하고 또 당부했었는데…’ 목적지를 알려주니 그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와 같은 방향이니 함께 가면 된다고 이야기했다. 그 아저씨를 따라가는 길에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이곳의 삶의 대해 물어보았다. 와이프와 함께 이민을 온 그 아저씨는 요즘 그렇게 캐나다에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는 인도인이었다. downtown 중심부에 위치한 호텔의 부주방장으로 일하며 캐나다의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했다.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는 일자리를 찾는 게 너무 어렵고 힘들어서 포기하고 돌아갈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내 이야기를 들으며 취업하는 게 정말 쉽지 않다고 여러 번 이야기하면서도 그래도 포기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분은 나에게 자신만의 소소한 팁들을 알려주었다. 교통카드를 찍는 법, 지하철에서 사람들에게 휩쓸리지 않고 대기하는 법, 지하철에서 깨끗한 자리에 앉는 법, 변덕스러운 날씨로 옷을 겹겹이 껴입는 법 등. 당시에도 ‘이 이야기를 왜 해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다정함이 배어있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웃음이 절로 나왔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생각하면 그 소소하고 어떻게 보면 불필요한 다정함에 괜히 웃음이 나온다.
그렇게 나는 아저씨와 헤어져 유학원으로 향했다. 처음 마주하는 높은 빌딩 숲 사이의 길에는 바쁘게 걸어가는 직장인들과 그 옆으로 보이는 대학교 학생들이 보였다. ’ 전에 한국에서 나와 함께 일했던 친구가 이 대학교를 다녔던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하며 대학교 컴퍼스를 자연스럽게 거닐었다. 빈티지한 건물과 하늘로 쭉 뻗은 커다란 나무들, 그리고 그 아래를 밝게 웃고 있는 젊은 아이들.
낯선 공간인데도 괜히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아, 나도 누가 보면 대학생일줄 알았던 시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누가 봐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유학원에 도착했다. 유학원의 웰컴서비스는 생각보다 별게 없었다. 은행 계좌, SIN number를 만드는 법, 교통카드를 사용하는 법, 우버 등을 위험하지 않게 탑승하는 법 등 기본적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며 어학원을 홍보하는 목적이 컸다. 재밌는 건 아까 만난 아저씨에게 들은 팁들이 섞여 있어 속으로 옅은 미소가 올라왔다. 얻은 것 없이 끝난 웰컴 서비스였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나왔으니 맛있는 디저트나 먹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몇 블록 걸어가면 보이는 레스토랑의 벽면에 철새들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미시소거에서는 볼 수 없는 화려한 건물에 홀린 듯이 안으로 들어가 화이트 와인 한잔을 했다. 주위로 보이는 사람들은 나이가 꽤나 있는 분들이었고, 노트북으로 일을 하면서 샐러드나 파스타와 함께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도 보였다. 들고 온 배낭을 내려놓고 편하게 소파에 앉아 캐나다 와인을 추천받아 멍 때리며 한잔을 마셨다. 동그란 테이블에 아이와 함께 온 아빠가 아이와 함께 장난을 치며 늦은 점심을 먹고 있는 것을 몰래 구경했다. 아이도 너무 귀여웠지만 평일 이 시간에 아이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아빠의 삶도 부러웠다. 서빙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아 눈에서 꿀을 흘리며 대화를 나눠주고 있었다. 낮술도 오래간만이지만 아무런 계획이 없는 남은 시간이 평온하게 다가왔다.
저녁에는 이모와 함께 일이 끝난 이모부를 데리러 갔다. 이모부는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반겨주었다. 우리는 이모와 이모부의 최애 베이글 집으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이모부는 주문하는 곳에 있는 직원에게 내가 누구인지 언제 캐나다에 왔는지 얼마나 있을 것인지 등 엄청난 TMI를 이야기하며 이 베이글 집에 처음 왔다는 것을 알렸다. 마감시간이 다 되어가는 터라 지쳐있는 모습이 역력해 보이던 직원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눈을 반짝이며 신난 미소와 함께 커다란 목소리로 나를 맞이했다. 빠르게 자신의 최애 베이글을 소개하고 내가 평소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 등을 물어보며 지금까지의 캐나다에서의 삶이 어땠는지 물어봤다. 아, 내가 아무리 MBTI가 E인 사람이라도 순식간에 진행되는 이 미친 친화력들은 언제나 당황스럽고 웃음이 나오며 내 모든 E력을 바닥까지 긁어모아야 했다. 그래도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반대였다. 친구들이나 기억해야 하는 사람들 이외에는 이름도 얼굴도 기억하지 않고 사사로운 대화도 잘하지 않는 내가 사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조금은 가볍고, 따뜻해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베이글을 먹으며 하루를 돌이켜보니 아직은 이 소소하지만 넘치는 다정함 속에서의 내가 서툴지만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낯설지만 따뜻한 이 변화가, 오늘만큼은 나를 기분 좋게 감싸 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