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워홀 도전기_38화
- 혜주, 사랑하는 나의 혜주. 나는 내가 이 생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너에 대한 마음은 변하지 않을 거야. 네가 어디에 있던, 어떤 삶을 살던 진심으로 너를 사랑하고 있어.
넌 내가 다시 살아갈 이유를 주었고, 난 너와 함께 할 때만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아.
그래서 난 너에게 언제나 부탁했어. 절대 나를 놓지 말아 달라고.
그 문자에 답장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게 남은 미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용기가, 이 힘든 여정을 다시 해 나갈 용기가 나에게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다. 그에게 문자가 하나 더 날아왔다.
"우리 통화를 하자."
난 또다시 나를 직면해야 했다. 스스로 너무 잘 알았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내가 억누르고 외면했던 감정들이 다시 올라올 것이라는 걸.
내가 이걸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계속 외면해야 하는 것인지. 그렇게 며칠을 고민했다.
그리곤 언제나 항상 그랬듯이 이 감정과 정면 승부를 보기로 했다.
그렇게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래, 그러자. 너 시간 될 때 전화해. 하지만 오래 기다리지 않을 거야.”
“퇴근하자마자 전화할게.” 그는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거의 하루를 기다리게 만들었다. 나는 다시 한번 더 문자를 보냈다.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아. 이쯤에서 그만하자.”
그 문자에 그는 빠르게 답장이 왔다.
“아직 일하는 중이야. 또다시 나를 떠나려고 하는 거야? 조금만 기다려줘.”
그렇게 그와 통화를 하는 순간, 그의 꽤 수척해진 얼굴을 본 순간 직감적으로 알았다.
‘얘 거의 죽어있었구나.’
안 봐도 비디오지만, 그는 일-운동-집이라는 루틴 속에 살면서 영혼이 없는 얼굴로 하루하루를 지냈을 거다. 그 와중에도 루틴을 지켜왔을 그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나는 루틴이고 뭐고, 바로 여행을 떠났었고, 머리를 염색하기도 하고, 친구들을 만나고는 했는데.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으로 서로의 마음을 알았다.
서로 감정이 없는 척, 화가 나있는 척하고 있었지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렇게 그가 먼저 나에게 입을 떼었다.
“어떻게 지냈어? 난 매일 너의 SNS를 확인하고, 너의 사진과 영상을 봤어.
넌 나 없이도 잘 지내는 것 같더라. 나는 마음이 무너지고 세상이 무너졌어.
하지만 난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확신했어. 그게 한 달이든 몇 년이든 어떤 시간이 걸리더라도, 너랑 나는 절대 헤어질 수가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했어.
너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면, 나는 언제나 기다릴 수 있어.
왜냐면 네가 나에게 다시 돌아올 거라는 걸 나는 알고, 믿어. 우린 서로에게 필요한 사람이야. “
예전 같았으면 이 말에 홀랑 마음을 빼앗겼겠지만, 이번엔 달랐다.
나는 그에게 내가 원하는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도 아직 너에게 마음이 있어. 근데 지난번 우리의 관계는 나에게 꽤나 힘들었어.
나는 더 이상 똑같은 방식으로는 못 이어나가. 더 이상 슬프고 힘들고 싶지 않아.”
그리고 그가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 네가 말하는 거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아. 노력할게.
하지만 너도 날 더 믿고 따라와 줬으면 해. 넌 너무 고집이 강해.
나에게는 조금 내려놔 줬으면 해. 네가 독립적이고 강한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나는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잖아.”
그렇게 우리의 두 번째 시도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 시도보다는 덜 뜨거운, 미지근하고 평온한 이 온도와 잔잔한 물결 속에서 시작된 이 관계가 어떻게 흘러가게 될 것인지 이제는 물속이 아닌, 조금 떨어진 해변에 앉아 바라보기로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며 바라본 그에게서 바뀐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그도 나에게 바뀐 모습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는 나를 옮아 매고 간섭하던 것들을 조금 더 멀리서 바라보기 시작했고,
전과는 다른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시간이 걸렸지만, 서로의 마음을 다시 확인한 이 순간이 관계를 조금 더 믿을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가 말하길 차분해지고, 확신에 찬 눈빛과 전이라는 다른 카리스마가 보인다고 말했다.
처음엔 우리는 서로의 달라진 모습이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많이 물어보았고, 나는 반대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길래 이렇게 조용한가 싶었다.
그러다 보니 한편으로는 불안감을 느끼기도 했다.
불안감을 느끼는 걸 지겹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라 조금만 불안감이 느껴지면 나는 이 관계를 다시 끝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가 다시 시작했을 때도, 그전에도 그가 항상 이야기하던-'날 포기하지 마.'라는 문장이 자꾸 떠올라, ‘조금만 더 지켜보자.‘라고 마음을 다 잡고는 했다.
그렇다고 입을 다물고 있지는 않았다.
언제나 느끼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강하게 이야기했다.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럴 때마다 그는 빠른 피드백을 보였지만,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라고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니, 그 피드백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주 조금씩, 조금씩 기억하고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바쁜 상황에 뭐라도 하겠다고 하는 그 모습이 귀엽게 보이기도,
종종 안쓰럽게 보이기도 했다.
우리는 점차 새로운 시도의 흐름에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관계에 잠시일지라도 안정을 찾은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내가 그에 대한 기대와 환상을 조금 내려놨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 쯤, 그가 이야기했다.
“독일 출장이 미뤄져서 12월에 갈 예정인데 너도 올래?”
“그래, 생각해 보자. “
그리고 며칠 뒤, 나는 독일행을 결정했다.
결정을 내리고 나니,
관계를 위한 여행을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인지 약간의 후폭풍이 밀려왔다.
옳은 결정일까. 후회만 하게 될까.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 들었지만, 그럼에도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건,
이렇게 핸드폰으로 이 관계를 이어간다고 답이 나올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와 내가 앞으로 더 발전할 수 있는지 아닌지는 직접 보고 그와 부딪혀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너무 기대된다.”
하지만 나는 가기 전 날까지, 이 여행에 대한 걱정과 스트레스가 조금씩 조금씩 쌓여가고 있었다.
막상 만났는데 우리가 서로 실망하게 되면 어떻게 하지?
내가 그를 받아들일 수 없으면 어떻게 하지?
아님 그가 나를 이해할 수 없다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주변 친구들이 언제 여행을 가는지, 설레는지 등을 물어보면
매번 나는 여행의 ‘ㅇ‘자도 꺼내지 말라고, 생각도 하기 싫다고 이야기하고는 했다.
만약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바로 이동할 생각으로 플랜 B까지 세워놓았다.
다가올 여행이 어떻게 흘러갈지 정말 하나도 예측되지가 않았고,
걱정 반 기대 반이었지만 잠시 잊고 지내기로 했다. 가면 알게 되겠지.
그렇게 출발하는 날이 다가왔고, 나는 그에게 짧은 문자를 보낸 후 비행기에 올랐다.
- 곧 만나.